템빨 69권 - 9화
<(속보)e스포츠계의 전설 하스터, 템빨단에 합류?>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에서 하스터의 목격담이 속출하고 있다.
그리드의 상징으로 유명한 ‘갓 핸드’를 닮은 비행형 아이템을 대동한 채 성벽을 뛰어넘는 영상은 며칠 째 큰 화제가 되는 중이다.
영상을 분석한 미국의 한 전문가는 ‘아무래도 하스터가 그리드의 후계자로 낙점 된 것 같다’며 흥분을 금치 못하기도...(중략)
비록 후계자가 아닐지라도, 올타임 넘버원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프로게이머와 Satisfy에서 신화를 쓴 그리드의 협력은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각에선 ‘히든 클래스 사냥’의 희생양이 되는 등 전성기가 끝난 하스터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감을 품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으나...
...
..
<모험가여, 작은 마을을 경계하시오>
야탄교의 주장대로 인계와 지옥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일까.
마을에 들렀다가 주민의 습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는 플레이어들의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이는 제국 동남부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최초로 발생한 사건으로, 거리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마을의 주민들이 괴물로 변해 여행자를 습격한다고 하니 철저한 주의가 필요하다.
(중략)
소위 ‘유령 마을’이라고 불리는 이 마을들은 대륙 각지에서 출몰하고 있으며, 고작 나흘 만에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
...
..
연일 새로운 화제로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 하스터는 여전히 갓 핸드와 씨름 중이었다.
그리드에게 구입한 아이템 덕분에 부족한 스탯을 어느 정도 충당하긴 했지만 그의 스탯은 기본적으로 지력에 치중되어 있다.
신검과 묠니르를 무장한 8개의 갓 핸드가 검무와 매직 미사일을 난사하며 휘몰아치는지라 감당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상성이 불리한 것이다.
붉은 현자는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웨폰 마스터리>스킬과 근접전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액티브 스킬을 다수 보유하긴 했지만, 사실 근접전보단 마법에 더 특화 된 존재니까. 그렇다고 해서 또 마법사는 아닌지라 마법과 관련한 패시브 스킬을 많이 가진 것도 아니다. 한 가지 예로 마법 캐스팅 속도가 느린 편이다.
신속이 최대의 강점 중 하나인 갓 핸드를 상대론 사실상 마법이 봉인되는 셈이니 섣불리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이 영상... 성벽 위까지 도망쳤을 때 찍힌 건가?’
이러다가 탐사대에 복귀하기도 전에 인마대전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오늘도 역시 그런 불안감에 시달리며 로그아웃한 하스터가 요즘 유명하다는 영상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무섭게 쫓아오는 갓 핸드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이었다.
한데 영상을 촬영한 각도가 묘하게 절묘해서, 쫓긴다기보다 마치 갓 핸드를 통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라인하르트 내성의 아름다운 풍경(소문에 의하면 아이린 왕비가 직접 가꿨다는 정원)을 촬영하던 유저가 우연히 찍은 영상이라는데... 덕분에 졸지에 ‘그리드가 갓 핸드를 맡길 정도로 신임하는 사람’으로 세간에 소문이 나버렸다.
실상은 처맞고 있을 뿐이건만...
“민망하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하스터가 단련실로 이동했다.
골프장과 수영장, 테니스장 같은 대형시설을 갖춘 그의 대저택엔 운동장처럼 넓은 실내 단련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후우...”
게임에서 사용하는 창을 고스란히 재현해낸 실제 창을 양손에 거머쥔 하스터가 한 번의 심호흡으로 집중 상태에 돌입한다.
‘나쁜 습관을 고친다.’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은 하스터에게 천금보다 더 귀중했다.
갓 핸드와 대련하는 영상을 녹화하고 시청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에게 매우 안 좋은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그게 나쁜 습관이라고 인지하기 힘들었다.
존경하는 스승께 배운 품새들이었기에.
설마 그 품새들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스승님께서 내게 잘못 된 가르침을 주신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인 건 확실해. 언젠가 스승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날이 오기 전까진 기존의 품새들을 봉인한다.’
부웅!
허공을 가르는 창의 움직임이 매섭다.
전성기를 되찾아가는 중인 지난 시대의 전설은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와 품격이 있었다.
***
‘며칠 하다가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성공하는 사람치고 근성 없는 사람은 없구나.’
영우의 생활 패턴은 공교롭게도 하스터와 맞추어졌다.
땀내 풍기는 아저씨(상당한 미남이라 그런지 아저씨라고 하기엔 좀 애매한 느낌이지만)와 같은 시간에 게임에 접속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또 같은 시간에 로그아웃해서 함께 하루를 마감하는 기분은... 은근히 불쾌했다.
하지만 굳이 의식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하스터는 갓 핸드와 대련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서 영우의 일과에 자신의 패턴을 맞춘 것이다.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었다.
순수하게 노력 중인 사람에게 태클을 걸기엔 영우가 그런 사람들을 너무 좋아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 충실한 느낌이 드는 게 사실이었으니.
둠칫둠칫.
스마트워치의 벨소리가 울렸다.
3주 연속으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라엘라의 신곡이다.
‘Satisfy에선 최고의 마법사로 활약하는 신급 플레이어인 제가 현실세계에선 월드클래스 아이돌입니다. ~덩달아 템빨의 힘?!~’이라는 어느 유명 웹소설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인물답게 꾸준히 음반을 내는 모습을 보면 참 대단했다.
방송 활동은 안 해도 종종 콘서트를 열 정도이니 라엘라도 보통 근성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월드클래스 아이돌이 된 걸로 모자라 하이랭커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전화를 받은 영우가 빙그레 웃으며 인사했다. 홀로그램에 떠오른 유라도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했다.
“오늘도 이탈자가 없던데?”
-네, 다들 정말 잘 버텨주고 있어요.
하스터가 낙오 된 이후.
어느덧 8일이 지났건만 지옥 탐사대는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동안 크라우젤의 우주 검은 지옥을 5번이나 갈랐다.
“인마대전이 열리기 전에 지옥이 멸망할 가능성은 없을까?”
-후훗, 우주 검에 베인다고 해도 지형이 조금 변하는 정도니까요.
“...”
세계의 형태가 칼에 베여 바뀌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유라의 태도가 영우를 경직시켰다. 아무래도 유라의 감각도 일반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수백 개의 아이템을 찍어내는 영우의 감각이야말로 일반인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지만.
-지슈카의 활약이 대단해요. 럭 일행이 의욕을 잃을 때마다 도발하거나 격려하면서 다시 노력하게끔 만들거든요.
“음...”
아레스의 삼장군들 말인가.
안 그래도 라우엘이 말했었다.
지슈카가 그들에게 꽤 큰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고.
“성격이 맞는 구석이 있나보네.”
-네, LTS 시절에도 인연이 있었나 봐요. 겉으로 봤을 땐 원수지간 같은데 실상은 조련사와 돌고래들을 보는 기분이랄까... 은근히 사이가 좋아지고 있어요.
“돌고래는 무슨. 원숭이들이겠지.”
영우가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영우가 귀엽다는 듯이 웃은 유라가 오늘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듯 천천히.
영우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의 오랜 일과였다. 하루의 끝을 함께하는 것이다.
***
무후총에서 실패를 겪은 이후.
그레니어의 산군에게 도전했다가 또 한 번 커다란 벽을 느낀 아그너스는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바꿨다.
템빨단의 영역이 아닌지라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동대륙으로 찾아갔다. 마을과 도시를 습격하며 민간인을 학살하고 힘을 복구했다.
부활한 사신의 가호를 받는 나라들은 되도록 피했다. 여전히 환국의 통치 하에 있는 곳들을 노렸다. 다행히 양반이 나타나질 않아서 활동하기 편했다. 동대륙의 위용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드와 크라우젤 놈들에게 아주 박살이 났군.’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두 사람의 존재감을 절실히 느낀 아그너스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다.
미쳤던 시절 또한 부정하지 않고 삶에 넣고 복기했다.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겪어왔는지를.
역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베였다.”
바알의 호출이 있었다.
기껏 열심히 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온 호출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마대전을 앞둔 상황이지 않나.
또 예전처럼 ‘민간인을 학살하는 퀘스트’를 받는 건가 싶어 기대감이 생겼다.
과거에는 같잖은 이유로 거부했던 ‘기회’를 이번에야 말로 쟁취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냉큼 달려왔다.
한데 흘러가는 상황이 기대와 사뭇 달랐다.
바알은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다.
술잔을 쥔 손의 약지를 세워 보이며 웬 상처 따위를 자랑했다.
사실 상처도 아니었다.
다만 흘렸던 피의 자국만이 어렴풋이 흔적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바알은 그조차도 황홀한 듯했지만 말이다.
“검성이 지옥을 가를 때 우연히 베였다. 이렇게 깊은 상처를 입은 건 난생 처음이다. 몹시 신선하고 즐거운 자극이여서 행복할 지경이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아그너스에게 바알이 설명해주었다.
빙그레 미소 짓는 놈의 톱날 같은 이빨이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본래부터 웃음이 헤픈 놈일진대.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던 모습이 불쾌하게 다가왔다.
“허세를 부리는군. 인계에선 그리드에게 죽기까지 했던 놈이.”
비꼬는 아그너스에게 체파르데아가 버럭 소리쳤다.
-네게 빙의했던 ‘그것’은 전하의 지극히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개골! 어찌 그것을 전하라 할 수 있겠느냐!
“헛소리 집어치우고. 바알, 부른 용건이나 말해라.”
-이, 이런 버릇없는 놈이...!
“관둬라, 체파르데아.”
흥분하는 체파르데아에게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은 바알이 목을 길게 뻗었다. 시퍼런 혈관이 울퉁불퉁 솟은 두꺼운 목이 쭈우욱 늘어났다. 거대한 뱀이 동면에서 깨어날 때 기지개를 펴면 저럴까 싶었다. 그 모습이 몹시 기괴하고 역해서, 아그너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부질없게도 바알의 얼굴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목이 무려 7미터는 늘어난 것이다.
“너는 지옥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있나? 아아, 모르겠지. 너무 시시해서 섣불리 예상하기 힘든 내용일 거다.”
붉게 충혈 된 눈이 초승달이 기울 듯 뒤집어졌다. 피로 물들인 도화지에 대충 찍은 점처럼 흐릿한 눈동자가 물결처럼 흔들린다. 초점이 없다. 어느 것도 담기지 않는다. 코앞에서 마주보고 있음에도 무엇을 보는지 알 도리가 없다.
“마르바스를 찾아가라.”
스르륵.
더욱 길게 늘어난 바알의 목이 아그너스의 상체를 휘감으며 올라갔다.
뼈를 얼리는 한기와 피를 증발시키는 열기가 아그너스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는 아그너스의 귓가에 바알의 얇은 입술이 닿았다.
“놈은 내 아비의 충복이어서 속내가 뻔하다. 너와 접촉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겠지. 네게 세상의 진실을 알리면 네가 필시 자신의 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을 거다. 놈을 기만해라. 속이고, 짓밟고, 빼앗아라. 모든 게 정해져있어서 시시할 뿐인 세계를 너의 적들과 함께 망가뜨려 보아라.”
아그너스에게 새로운 에피소드와 퀘스트가 열렸다.
새카만 혀를 날림거리는 바알의 얼굴엔 여전히 짙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내키는 대로 날뛰어 나를 즐겁게 해다오.”
***
그리드가 신화 클래스로 전직했다는 소식에 가장 크게 동요한 세력은 단연코 야탄교였다.
곧 다가올 인마대전에서 악마들의 편에 설 야탄교 입장에서 그리드는 최대의 난적이다. 일종의 최종 보스였다. 그가 한 차원 더 강해진 만큼 야탄교의 긴장감도 커졌다.
이거 정말 심각한 문제라며 위축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야탄교의 기둥인 ‘종’들은 차분했다.
“지옥의 군주들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전쟁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록 그리드는 특별해서 수백, 수천의 대군을 홀로 감당할 수 있다지만. 놈의 세력이 수만, 수십만을 감당할지언정.
인마대전의 규모는 고작 수십만 단위가 아니다.
대륙 전체를 무대로 삼는, ‘최소’ 수천만 단위의 대규모 전쟁이 될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성장하다가 최근에 급격히 세를 키운 야탄교 신도의 숫자만 해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니.
더욱이 홀로 국가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력한 대악마들이 함께할 것이다.
대악마들이 마물을 동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예정이기도 했다.
여태까진 홀로 지상에 올라 외로운 사투를 벌였던 대악마들이 ‘군단’을 통솔하며 자신이 왜 군주라고 불리는지 증명할 터였다.
“또한 우리에겐 키메라가 있다.”
마물과 인간의 결합.
두 번째 종의 실험이 어째선지 너무 쉽게 성공하고 말았다.
완전히 다른 존재인 마물과 인간이 순순히 하나가 되어 강력한 마인으로 거듭났다.
기대와 달리 ‘악마’와 비견될 정도의 마력과 무력은 발휘하지 못했지만 어지간한 기사보단 강했다. 평범한 백성을 재료로 써서 선임기사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대량 생산이 쉽다는 게 최대의 장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인들은 각지의 여행자들을 죽이고 먹어치우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이 바로 ‘유령 마을 사건’의 주범이었다.
“우리가 늘 패배했던 건 사실이나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다.”
야탄의 종들이 단언하자 신도들이 환호했다.
그리드를 향한 두려움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