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75화 (1,365/1,794)

템빨 69권 - 8화

하스터의 청각은 굉장히 예민하고 정확했다. 소리만으로 공간을 지각하고 물체의 이동을 포착하는 수준이다. FPS계의 전설로 등극하기까지 연마하고 공부해서 얻은 후천적인 능력이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청각은 수십, 수백의 소음이 훼방을 놓을지라도 현혹되지 않고 목표물을 정확히 포착할 정도여서, 전성기 시절의 그는 맵핵을 썼다는 의혹을 몇 번이나 받아야 했다.

쩌정!!

정면을 바라본 채, 창대를 등 뒤로 세워 갓 핸드의 칼침을 막아내는 하스터.

누군가 이 장면을 봤다면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거냐며 감탄했을 것이다.

몸을 부들부들 떤 그가 앞으로 고꾸라지지만 않았어도.

‘끅... 이거 실화인가?’

하스터는 작금의 상황이 도무지 실감되질 않았다.

도대체 이 공격력은 뭐란 말인가?

갓 핸드의 공격을 방어할 때마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울린다. 실제로 생명력이 깎여나갔다. 이래서야 방어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게 서른 개나 있다고?’

그리고 나는 그 30개 전부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말했었고?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군.’

얼굴을 붉힌 하스터가 고개를 좌측으로 꺾었다. 동시에 쇄골을 비틀어 어깨를 세웠다.

쩌엉!

갓 핸드의 공격이 어깨 견갑에 가로막힌다.

공격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기우는 몸을 고스란히 놔둔 하스터가 등이 땅에 맞닿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허리에 힘을 줬다.

스칵!

서슬 퍼런 칼날이 콧대를 스친다.

하스터는 시야의 구석으로 사라져가는 갓 핸드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붙잡아 제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그의 출수가 갓 핸드의 속도보다 느렸다.

쿠왕!!

새로운 파공성이 들려온다.

소리의 울림을 통해 위치를 즉각 파악한 하스터가 골반을 회전시켰다.

촤르륵, 갓 핸드가 찔러온 검에 펄럭이는 망토가 감긴다. 하스터는 망토에 악력을 싣고 휘둘렀다. 망토를 꽈배기처럼 꼬아서 칼날을 붙들고, 갓 핸드의 궤도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의도였다.

‘그리고 스킬을 꽂아 넣는다.’

절호의 기회다.

하스터는 판단했지만, 이번에도 잘 되지 않았다. 망토가 검을 감싸기 직전에 갓 핸드가 빠져나가버렸다.

‘또, 또 시작이군.’

언젠가부터 이랬다.

스스로의 판단엔 문제가 없다고 자부하건만 결과는 늘 꽝이다. 단순히 ‘느려서’ 몸이 안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행동을 자꾸 방해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애초에 내 판단이 잘못 됐던가.’

콰창!!

하스터는 3대 1의 싸움을 하는 중이다.

하나의 의도가 수포로 돌아갈 때마다 입는 손실이 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갓 핸드를 놓친 바람에 다른 두 개의 갓 핸드가 양쪽 허리로 파고들어왔다. 쏘아지는 칼날을 막기 위해 창대를 기울인 하스터는 손목이 찢겨나가는 듯한 격통에 시달려야했다.

‘큭... 여기서 승부를 건다.’

조금 전에 놓친 갓 핸드가 하단으로 접근해오는 게 느껴졌다. 가볍게 한쪽 발을 들면 피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대로 공격을 넘긴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진 않다는 판단이 뇌리에 스쳤다. 판단이 선 순간 몸은 자연히 움직였다.

꾸욱!

하스터가 양팔에 힘을 실었다. 창대를 짓누르고 있는 두 자루 칼을 힘껏 밀어붙여 지지대로 삼아 허리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물구나무를 서서 하단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텀블링, 위치를 유리하게 바꿀 생각이었다.

분명히,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완전히 들어올리기도 전에 갓 핸드가 휘두른 칼이 먼저 그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렸다.

***

“신기하군.”

그리드가 망치질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오토 제작 중이다. 바르바토스의 시야로 하스터의 분투를 지켜보면서도 아이템을 만들 수 있었다.

“근력이 갓 핸드보다 훨씬 못한데 묘하게 잘 버텨. 검무 한 번 막을 때마다 손목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끈질기게 버티는 거지?”

컨트롤을 잘 한다는 느낌은 딱히 없다. 종종 엉거주춤한 자세로 빈틈을 드러냈기 때문에 오히려 컨트롤이 별로라는 인상이었다. 방금 갓 핸드에게 발목이 베였을 땐 엉덩이가 뒤로 슬쩍 빠져서 솔직히 웃겼을 정도다.

“힘을 타점에 집중시키는 게 아니라 어깨부터 무기까지 둘러치는 습관이 있네요. 오러의 흐름도 그 습관에 맞춰져 있고요. 덕분에 상대적으로 강한 공격과 충돌해도 위력을 분산시켜서 충격을 덜 받아요.”

창가에 서서 하스터를 지켜보던 메르세데스가 입을 열었다.

“다만 훌륭하다고 평가하진 못하겠어요. 손목을 덜 쓰게 돼서 무기의 경로에 제약이 생기고 일격에 깃드는 힘이 약합니다. 민첩성도 억제 되고요.”

“갓 핸드의 위력을 분산시키느라 어쩔 수 없이 저러는 건가?”

“누구랑 싸워도 저 스타일을 고수할 것 같아요. 고의적으로 들인 습관인 듯해서.”

“저런 습관을 왜 들인 거지?”

“윈프레드 경은 마나를 역전시켜서 축기(縮氣)를 유도하는 전투법을 구사했다고 들었어요. 축기에 성공하면 대상의 힘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정확히 그 타이밍에 맞춰서 기술을 연계하면 대상에게 치명상을 입힌다고 해요.”

축기란, 마나나 검기 등의 자원을 흐트러뜨리는 개념이다.

쉽게 말해서 대상의 스킬을 취소시키는 무시무시한 기술이었다. 거기에 카운터를 연계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궁극기일 것이다.

“아마 윈프레드 경께선 저자가 ‘축기에 성공한 이후’ 기술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게끔 저런 습관을 들여놓은 것 같아요. 하지만 문제는 저자가 아직 축기법을 완전히 깨우치지 못했다는 거겠죠. 윈프레드 경께선 도중에 돌아가셨으니.”

“음...”

축기법이라는 아주 강력한 스킬이 있고, 그 스킬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어떤 기술을 연계해야한다. 다만 그 기술을 연계하기 위해선 특정 동작이 선행돼야 하고, 그 동작이 하스터의 습관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파그마의 후예가 검무를 쓰려면 반드시 보폭을 밟아야 하는데, 하스터는 그 보폭만 배운 상태고 정작 검무는 마음대로 못 쓰는 건가? 심지어 보폭을 밟는 게 습관화 되었고?’

하스터는 10년 이상을 윈프레드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10년 동안 온갖 퀘스트의 연속이었을 거다. 극단적인 예로 창을 하루에 천 번씩 휘둘러야 한다는 일일 퀘스트도 있었을 테지.

그것이 ‘스승’을 둔 플레이어들의 숙명이다. 모험과 사냥을 통해 성장하는 보통의 플레이어와 달리 퀘스트에 맞춰 생활해야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습관이 주입됐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윈프레드가 축기법을 완전히 전수하기도 전에 죽은 탓에 하스터의 인생이 덩달아 꼬인 셈이군. 하스터가 그 꼬인 실타래를 풀기 위해선 직업 퀘스트를 해결해야 할 텐데 아직 해결하지 못한 거고.’

그리드가 나름대로 해석해보는 동안 하스터의 생명력이 최소치로 떨어졌다.

나름 15분을 버틴 후였다.

전판보다 기록이 5분이나 늘었는데도 하스터는 전혀 만족한 눈치가 아니었다.

당연하다.

하스터가 이 대련에서 ‘이겼다’는 판정을 받기 위해선 3개의 갓 핸드를 모조리 경직시켜야 하는데 그는 단 1개의 갓 핸드도 경직시키지 못했다.

처음에 30대1을 운운하더니 3대1도 감당 못하는 격이다. 기분이 언짢을 만했다.

‘쉽지 않지. 지금의 갓 핸드를 경직시키려면 최소 7만의 데미지를 일격에 입혀야 하니까.’

물론 갓 핸드에겐 방어력이 없다. 하지만 무기를 쓴다. 원하면 방패도 다룰 수 있다. 공격을 차단하는 수단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빨랐다. 대략 시속 100km의 질주가 가능하다.

“근데 저자의 문제점은 따로 있어요.”

메르세데스의 관음... 아니, 염탐은 계속됐다.

“지각 능력이 육체 능력을 월등히 앞서네요. 어른이 아이의 몸으로 움직이는 셈이에요. 당사자는 판단과 행동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느끼고 있겠죠.”

‘아... 그래서 저런 건가.’

제3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하스터의 몸놀림은 굉장히 어색했다. 가끔 엉거주춤할 때는 몸치가 춤추는 꼴이라 다소 우스울 정도였다.

‘저렙존에서 저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아직 ‘새로운 육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

현실과는 다른 Satisfy의 육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괴리감을 느끼고 어색하게 움직이는 경향이 크다. 특히 노인이나 병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하스터는 초보자가 아니다.

Satisfy에서 최소 15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베테랑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런 증상을 겪는 이유는...

“무인이 저런 증상을 겪는 이유는 둘 중 하나에요. 모종의 이유로 급격히 약해진 육체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가.”

메르세데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진다.

“어느 날 갑자기 전성기 시절의 감각을 되찾았다거나.”

“...하스터의 전성기가 오래 전에 끝나긴 했지.”

한참 전에 끝난 전성기를 갑자기 되찾았다 치면... 당사자가 실감하지 못해도 이상하지 않다.

턱을 매만지며 생각해본 그리드가 <템빨신의 눈>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거치대에 놓인 수백 종의 아이템 정보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대량의 정보가 단번에 주입되는 것이다. 아직 익숙해지지 못해 현기증을 느낀 그리드가 머릿속에 급히 키워드를 입력했다.

‘스탯 상승. 근력, 민첩성.’

촤르르륵!!

그리드의 시야를 가득 채운 정보가 분별되기 시작했다.

옵션에 근력 상승이나 민첩성 상승 옵션이 붙은 아이템들의 정보만 떠올랐다.

총 35개였다.

“저거, 저거, 저거. 그리고 저것도.”

이곳에 있는 아이템은 모두 그리드와 갓 핸드들, 그리고 케롤과 템빨골들이 고생해서 만든 아이템들이었다.

그리드의 소유물이라는 뜻이다.

“하스터.”

“...?”

생명력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문제점을 분석하던 하스터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았다가 질색했다. 그리드가 5개의 갓 핸드를 추가로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설마 나를 높이 평가하는 건가?’

비록 3대1도 못 이기고 있지만 8대1로 싸울 자격이 있다는 뭐, 그런 건가?

‘음... 젊은 시절이었다면 호기롭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열혈물의 주인공이 되기엔 청춘이 끝난 지 오래라 아쉽다...

멋대로 해석한 하스터가 망설이는 그때였다.

“혹시 MMORPG는 안 해봤어요?”

“그럴 리가요. 게임을 좋아해서 프로게이머도 됐던 내가 장르를 가렸겠습니까?”

“근데 캐릭을 왜 그렇게 못 키웠어요? 해보긴 해봤어도 별로 안 해본 건가? 아니면 혹시 나랑 같은 과인가...?”

“...”

황당한 질문에 이은 인신공격.

어이없어서 말문이 막힌 하스터에게 갓 핸드들이 다가갔다. 그리드가 새로 데려온 녀석들이었는데 각자 방어구를 한 부위씩 들고 있었다.

“입어 보실래요?”

“...?”

“그쪽한테 첫 눈에 반해서 주는 선물 같은 게 아니라 잠깐 빌려주는 거예요. 그쪽이 너무 똥캐라 어쩔 수 없이.”

“...”

하스터가 아이템을 건네받았다.

에픽 등급과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들이었는데 성능이 하나 같이 굉장했다.

스탯을 200 단위로 올려주는 부츠며 건틀렛이라니. 이쯤 되면 유니크 등급이 아니라 전설 등급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야 정상 아닌가?

“그거 입고 다시 싸워보세요.”

하스터는 군말 없이 아이템을 무장했다. 그 또한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들을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고 그리드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다시 대결이 시작됐다.

3개의 갓 핸드가 빠르게 움직여 시야의 사각으로 흩어진 뒤 각기 다른 궤도에서 공격해왔다.

정성적이고 까다로운 협공이었다.

하지만 하스터에게 사각은 문제가 되질 않았다. 소리의 울림을 읽고 갓 핸드의 위치와 경로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저절로 떠오르는 판단에 반사적으로 몸을 맡겼다.

적의 발소리를 포착하자마자 화면을 옮기고 헤드샷을 날렸던 전성기 시절처럼.

쩌저정!!

“...!”

하스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준 것이다. 석상처럼 굳은 그의 주위로, 스킬 타격을 입고 경직 된 3개의 갓 핸드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긴 세월동안 의심을 품어왔던 자신의 판단력이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잠시 넋을 잃은 그의 귓전에 그리드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100레벨 정도만 올리면 전성기 되찾으시겠네요. 직업 퀘스트도 몇 개 클리어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

100레벨.

황당한 말인지라 환청으로 치부한 하스터가 성큼 그리드에게 다가가 섰다.

“나를... 나를 위해 아이템을 만들어준 이유가 뭡니까...?”

“...?”

“내가 이런 호의에 감동해 템빨단에 가입을 신청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선견지명이 아주 대단하시군요.”

“...”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

헛웃음을 흘리던 그리드가 문득 기대감을 품었다.

‘전대 적기사단과 하스터가 함께하면 여러 가지 시너지가 발생하지 않을까?’

나쁘지 않을 수도...

물론 몇 가지 사상검증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8대1이나 이기고 말하시죠. 지옥 가고 싶다면서요.”

“아, 네...”

“아이템은 선물 아니니까 돌려주시던가 돈을 내시던가 하고.”

템빨이라는 건 한 번 맛보면 도무지 벗어나지 못한다.

하스터는 당연히 돈을 지불했다. 왕창 뜯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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