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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73화 (1,363/1,794)

템빨 69권 - 6화

Satisfy에서 지옥이란 실재하는 지역이다.

플레이어는 지옥을 개념이 아닌 공간으로 인식한다.

단순히 고난이도의 사냥터로 인식하느냐, 절대로 접근해선 안 되는 금지(禁地)로 인식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탐사대원들의 인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흔히 비유적으로 이르는 지옥과 Satisfy에 실재하는 지옥을 별개로 치부했다.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히 그렇게 됐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고 깨달았다.

지옥은 단지 강력한 마물과 악마들이 출몰하는, 종종 대악마가 도사리는 사냥터 따위가 아니었다. 관념적으로 알았던 지옥 그 자체였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참담한 환경.

설령 이곳에 악마가 없었을지언정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피부에 스치는 바람이, 발에 밟히는 땅이, 귓전에 스며드는 소리가,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가.

하나도 어김없이 혐오스럽다.

가만히 서서 숨만 쉬어도 몸과 정신이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이곳은 오로지 악의로 빚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정신병 걸릴 것 같군.”

우그러진 하늘에 소용돌이치는 붉은 별들과 수천 개의 눈동자로 사위를 감시하는 만월.

소름 돋는 지옥의 밤을 멍하니 올려보던 폰이 중얼거렸다. 솔직한 속내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레가스가 애써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반트너가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지슈카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지 않았다면, 루비가 따스한 기운으로 감싸주지 않았다면,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고 있는 유라의 등이 단 한 번이라도 허물어졌다면.

폰은 이미 진즉에 악의에 익사했을 것이다.

뻔히 피할 수 있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여서라도 이곳에서 도망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번대 지옥의 환경은 그만큼 가혹했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괴한 풍경들, 귀를 힘껏 막아도 고스란히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들, 밟을 때마다 몸을 출렁이게 만드는 지면의 감촉과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악취, 음식을 꺼내는 순간 썩게 만드는 오염 된 공기 등등.

폰은 그 모든 게 견디기 힘들었다.

사실, 탐사를 시작하고 5일이 지난 시점부터 정신력이 한계였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다. 9일째를 맞이한 지금 이 순간은... 그냥 미칠 것만 같았다.

“...”

폰의 안색이 초췌해질 때마다 ‘약해 빠진 놈.’이라는 핀잔을 주며 도발하던 반트너도 언젠가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텅 빈 시선은 꿈틀거리는 땅에 못 박힌 채다. 감히 하늘을 올려보지 않았다. 지옥달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에.

“으으...”

템빨국의 십공신과 루비, 이벨린, 제드노스, 라엘라, 코크.

발할라의 삼(三)장군과 오아시스.

붉은 현자 하스터와 검성 크라우젤.

탐사대엔 소수의 정예만 남았다. 열정적으로 의기투합해도 부족할 판국이었다. 한데 대부분 말수를 잃고 정신줄을 붙잡기 위해 노력하는 게 고작이다.

언제 또 다시 마물들이 나타날지 모를 상황.

23번 지옥의 마물들이 얼마나 강했던지 상기한 오아시스가 손톱을 깨물었다. 무패왕의 칼집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네가 뭐라도 해라, 반푼아. 내 더 이상 네게 무패(無敗)를 바라진 않는다만, 죽음을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까지 용납할 대인배는 못 된다.

‘그쪽 어차피 인간 아니잖... 히익! 칼 떨어지니까 움직이지 마세요.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애초에 순순히 죽을 생각 따위 없었어요.’

오아시스는 무패왕의 검술 일부를 계승했다.

자격이 없는 힘을 취한 셈이다. 반동으로 페널티가 부여됐다. 사망할 때마다 무패왕의 칼집이 징벌을 내려 혼절하게 되고, 이때 강제로 로그아웃 된다. 그리고 24시간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못한다.

세상 모든 플레이어에게 하루 최대 2번의 죽음이 허용되는 반면 오아시스는 하루에 쓸 수 있는 목숨이 하나뿐인 셈이다.

‘처음부터 이렇진 않았는데...’

어느 날 겪었던 사하란과의 전쟁에서 연달아 2번 죽자 생긴 페널티였다.

안 그래도 2번 연속 사망은 처음 겪는 일이라 충격이 컸는데, 페널티까지 추가되자 멘탈이 완전히 박살났었다. 한동안 폐인으로 지냈을 정도다. 더 많은 죽음을 겪을수록 더 큰 페널티가 생길 거란 사실을 직감한 채 두려움에 떨었다.

오아시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보다 더 실감되고 두려운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

무력과 정신력은 무조건 비례하지 않는다. 특히 신인에게는 신인만의 패기가 있는 법이다.

오아시스는 흑수정 성을 떠나기에 앞서 유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21번 지옥에 도착하기 전까진 복귀하지 않을 거예요.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해도 지옥문은 열지 않을 거니까 단단히 각오하세요.”

진정한 지옥은 21번부터 시작이라며, 최소 21번 지옥에 적응해야만 인마대전에 대비하는 의미가 있는 거라고 유라는 당부했었다.

사실상 뒤가 없는 전진이었다.

23번 지옥에 도착한 시점부터 탐사대는 고작 20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흑수정 성이 있는 25번 지옥부터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라우엘이 고르고 고른 300여 명 중 상당수가 고작 2개의 지옥을 넘는 동안 마물에게 짓밟혀 죽거나 두려움을 견디지 못해 도망쳤다.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환경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남은 탐사대의 부담감은 한층 더 커졌지만 오아시스의 정신력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이제 2개의 관문밖에 남지 않았다.

23번 지옥과 22번 지옥만 돌파하면 된다.

여기 남은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인마대전의 승리를 이끌 주역이 될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되고 싶다.

이제 와서 포기할까 보냐...

오아시스가 일행을 독려하려는 순간이었다.

“유라 넌 괜찮지?”

피폐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맑은 음성이 울려 퍼졌다.

지슈카였다.

<파마의 화살>이라고 했던가.

상서로운 ‘기운’을 오른쪽 팔에 두른 그녀는 지옥의 악의로부터 자유로워보였다. 가혹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맑은 눈빛을 유지했다.

“그럼요.”

대답하는 유라의 음성은 평온할 지경이다. 평소에도 지옥에서 활동하는 인물답게 남들과 확실히 다른 면이 있었다.

“저도 괜찮아요!”

손 드는 루비의 목소리는 힘찼다. 성녀의 위용이라고 할까.

소위 ‘그리드의 여자’라고 불리는 그녀들은 탐사대의 희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크라우젤 또한 워낙 말수가 적어 조용할 뿐이지 신변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게다가 하스터.

한 시대를 풍미하며 e스포츠의 황제로 군림했던 그 또한 단 한 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연륜이라는 걸 테지. 일전에 ‘히든 전직자 사냥’의 피해자가 돼서 큰 망신을 당했다고 들었는데 상처를 회복한 듯했다.

멀쩡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희망을 얻은 오아시스가 힘차게 소리쳤다.

“저도 아직 할 만합니다!!”

“오~ 아레스가 헛살진 않았네.”

지슈카가 피식 웃었다. 아레스의 오른팔과 왼팔을 자처해온 삼장군들을 비웃는 처사였다.

“...”

발할라의 대장군 럭.

스스로의 실력에 큰 자부심을 품고 늘 기고만장했던 그가 지슈카에게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웠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꼴이.

신입(오아시스)에게 모범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의지하고 있는 자신이 병신 같았다.

“기죽은 모습이 안 어울리는군.”

“...실컷 비웃어라.”

내내 잠자코 있던 럭이 크라우젤에게만큼은 반응했다.

크라우젤이 싫어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게 아니다.

과거의 자신은 크라우젤을 해치기 위해 노력했건만, 정작 크라우젤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자신을 신경 써줬으니, 괜히 더 민망해서 퉁명스레 반응하게 됐을 뿐이다.

크라우젤이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나는 타인을 비웃지 않는다.”

“...시발.”

휴식의 종료를 알리는 유라의 기립.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는 크라우젤의 뒷모습을 노려본 럭이 욕설을 토했다.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욕설이었다. 검성으로 전직하고 레벨이 1로 초기화됐을 당시의 크라우젤을 비웃었던 자신과 지금의 크라우젤을 비교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빌어먹을, 정신 바짝 차리고 잘하자.’

오아시스가 차라리 너희보다 낫다는 듯이 말했던 지슈카의 조롱은 필시 합당했다. 여기서 주저앉아 오아시스보다 뒤처지는 건 럭 본인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각성한 그는 굉장한 실력을 발휘했다.

지슈카가 순순히 등을 맡겼을 정도다.

“그치. 럭은 이래야지. 그래도 명색이 하오급 실력자라고 불렸었잖아. 지금은 하오보다 훨씬 못해 보이지만.”

“흥, 이번 탐사에 지원조차 안 한 그런 겁쟁이랑 비교하지 마라.”

“하오도 지원 했었어. 라우엘이 떨어뜨렸을 뿐이지.”

“뭐? 하스터도 받아들인 마당에 하오는 왜? 너희랑 친하지 않나?”

“반용족왕을 설득해보라고 보냈다는데.”

“아, 그런가...”

콰자자작!!

위축 된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물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탐사대 사이엔 분명한 전우애가 싹트고 있었다.

유라, 지슈카, 루비, 크라우젤이 중심을 제대로 잡아줬기 때문이고 오아시스가 실력에 어울리지 않는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발할라 삼장군의 분투는 템빨단원들을 자극했다.

폰이 고통을 극복했고 반트너는 공포를 극복했다. 레가스가 그들의 사이에서 전투를 조율하자 환상적인 연계가 펼쳐지며 마물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휩쓸려나갔다.

스칵-!

극검의 검이 찬연한 검광을 뿌릴 때마다 수십 마리의 마물이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잿빛으로 산화했고,

콰콰콰콰쾅!!

유페미나와 제드노스, 라엘라의 대단위 마법이 적의 진영을 통째로 무너뜨리자 폭군이 노도처럼 진격했다. 크리스의 거대한 대검이 태산을 짓누르는 무게를 품고 떨어질 때마다 악마의 몸이 폭발해버렸다.

“와우. 역시 형님들.”

“저희도 힘내죠!”

이벨린, 코크, 오아시스도 셋이 뭉쳐 다니며 제대로 활약했다. 지휘관을 잃고 흩어지는 마물들의 진로를 차단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마침 또 다른 악마가 새로운 군단을 이끌고 나타났지만 즉시 페이커에게 암살당했고, 지슈카가 내린 화살의 비가 잔당들을 쓸어버렸다.

유라와 크라우젤은 늘 선두에 있었다.

루비의 힐과 버프를 등에 업고 거침없이 전진, 지옥에 인간의 강역을 넓혀갔다.

“하스터! 당신은 후방으로 빠져! 뒤에서 마법으로 보조나 하지 왜 앞에서 얼쩡...”

“으악!”

“...”

안타깝게도 도중에 하스터가 죽어버렸지만... 일행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드디어 도착한 22번 지옥에서 야영을 준비하는 탐사대의 표정은 종전보다 훨씬 밝았다.

20번 지옥까지 도달했었다는 그리드와 사자들의 기록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탐사대가 방문한 지옥들은 군주를 잃은 상태였다. 그리드와 달리 대악마와 직접적인 마찰이 없어서 난이도가 훨씬 쉬웠다.

유라는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서도 탐사대의 가능성을 엿봤다. 점차 강해지는 페널티를 부여받은 상태로 오직 플레이어로 구성 된 탐사대가 22번 지옥까지 도착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적어도 여기 남은 사람들은 인마대전에서 충분히 활약할 거야.’

야영지를 건설하는 동료들에게 유라가 재차 설명했다.

“우리의 목표는 21번 지옥에서 장기간 생존하는 거예요. 인마대전이 시작할 때까지 쭉 21번 지옥에 머물 계획이니까 이곳에서 최대한 실력을 쌓아두세요.”

“인마대전이 언제 시작되는데?”

“글쎄요. 며칠 후일 수도, 몇 달 후일 수도 있겠죠.”

“...그, 식량이 못 버틸 텐데... 그나마 준비해온 식량이 거의 다 썩어가지고...”

“중립 지역에 들러서 보급하면 되요. 제가 혼자 인계에 다녀와도 되고요.”

“너 없이 40분을 어떻게 버텨? 안 돼. 혼자 가지마.”

“추하다, 폰! 너는 더 이상 내 라이벌이 아니다!!”

“너 아직도 나한테 라이벌 의식 느끼는 거야? 머리털이 없어서 염치도 없는 건가?”

처음 지옥에 도착했던 날처럼 떠들썩해진 템빨단원들.

그들의 사기는 고작 반나절 뒤에 다시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런 염병...”

22번 지옥의 악마들은 인계의 네임드 보스만큼이나 강력했다. 빠르게 처치하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그 탓에 마물의 숫자가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갔다.

‘한계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해방되는 건가.

몇몇 사람들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바로 그때.

[템빨신 그리드가 열세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이다.

짧은 서사시가 끝난 후.

최초의 신화 클래스 전직자가 탄생했다는 한 줄의 소식이 일행의 시야를, 의식을 잠식했다.

“...두 유 노우 갓리드?”

가장 먼저 기운을 차린 사람은 극검이었다.

이어서 유라와 지슈카가, 루비와 크라우젤이, 그리고 템빨단원들이...

하나둘씩 잃었던 사기와 의욕을 되찾았다. 늘어뜨렸던 무기를 고쳐 쥐고 악마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제부턴 집념의 영역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공포를 허물어뜨리고 악마들의 목을 베어나갔다.

신기하게도 그리드는 늘 이랬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리더의 역할을 다해 동료들을 지탱해줬다.

덕분에 지금의 템빨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드디어...”

다음 날.

로그아웃한 그리드가 아직 달콤한 잠에 빠져있을 무렵 탐사대는 21번 지옥에 도착했다.

인마대전에서 활약할 최소한의 자격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처절한 생존게임의 서막이었다.

그리드와 함께 세상을 지킬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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