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9권 - 3화
세상을 지키고자 싸웠던 사내가 있다. 남을 위해 살았을진대 공교롭게도 벗을 배신했다.
스스로를 위해 살았던 사내가 있다. 남을 믿지 않았을진대 하필 벗을 믿었다.
엇갈린 두 사내의 기술과 지식, 야욕과 대의가 합하여 빚어낸 집념의 산물.
그것은 태생부터 독을 품었다. 어떤 한(恨)이었다. 아마도 사내들의 성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미묘하게 불완전했다.
하여 여력이 없었다.
새로운 주인의 탐욕을 감당하지 못했다. 광룡철을 소화하지 못했다.
한이 깊어졌다.
주인이 스스로의 과욕을 한탄하게 만든 죄가 그것을 괴롭혔다.
차가운 금속은, 내색하지 못한 채 안에서부터 썩어갔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몰라도 되는 사실이었다.
끝내 광룡철을 소화하고 주인의 욕(慾)을 탐(貪)하였으니 한을 풀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어느 금속의 이야기는, 그대로 영원히 묻혔다.
올바른 엔딩이었다.
“고백하마.”
입이 없어 침묵한 채, 심장이 없어 뜨겁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차갑게, 늘 그래왔듯 주인의 곁을 지키던 탐욕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응한다.
레이더스의 모습을 빌려 얻은 황금의 눈동자로 은발의 사내를 보았다.
빛을 파편으로 만드는 파도 사이에서도 여전히 표표한 사내였다.
탐욕은 그를 알고 있다.
비록 주인은 아니나, 부모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가끔씩 스치는 미련을 엿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일말의 미련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때때로 너와 파그마를 비교했었다.”
“...”
깊은 여운에 잠겨있던 그리드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특히 파브라늄에 한해서 그랬다. 놈이었다면 저 절학의 상징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그런 식의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드가 브라함을 마주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홍옥이, 붉은 눈동자에 흑요석이 담긴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감상이었는지 네가 깨닫게 해주는구나. 네가 모든 면에서 놈보다 낫다. 나보다도 월등히 뛰어나다.”
브라함이 파그마에게 살해당했던 것은 파그마보다 약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파그마가 많이 준비했을 뿐이고, 다만 브라함은 배신을 예상치 못했었을 뿐이다.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 치명적인 실수가 브라함으로부터 수백 년의 세월을 빼앗았다.
하지만 브라함의 자부심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최강이 될 거라고 자부했다.
히드라를 소멸시킨 후에 더욱 더 확고하게 품은 믿음이었다.
한낱 역사가 된 전대 전설들의 전성기와 자신의 잠재력을 저울질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언젠가 그리드가 자신을 뛰어넘을지언정 그건 먼 훗날의 일일 거라고 보았다.
자신이 역대 모든 전설을 초월한 후에 이르러서야 그리드가 자신을 넘어설 거라고 판단했다.
그것을 정정한다.
“너의 잠재력은 무한이다.”
대해와 견줄 수 있는 나의 잠재력을 아득히 웃돈다.
“그러니 네가 최강이다.”
상상해본다.
검성의 검이 세상을 가르고 무패왕의 검이 백만을 멸할지언정 탐욕의 방벽을 세운 그리드에겐 닿지 못하는 광경을. 설령 그리드에게 닿을지언정 탐욕의 비가 먼저 저들의 몸을 적시는 광경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절대적인 장관이다.
영혼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 달라했더니 개밥그릇을 만들어놓았던 지난날의 그리드가 기억에서 날아갈 정도로 인상 깊었다.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구나.”
[템빨신 그리드가 열세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드높은 자가 그를 논하기를.]
[우주처럼 무한하다 하였다.]
[태양보다 찬란하다 하였다.]
[검정 은하에 둘러싸인 모습이 퍽 위대하다 하였다.]
[그는, 증명을 마쳤다.]
...
..
***
『템빨단을 주축으로 삼은 랭커 탐사대가 지옥으로 떠났다는 제보가 약 열흘 전에 있었죠. 이를 놓고 온갖 의문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여태껏 지옥을 독식해온 템빨단이 갑자기 왜 다른 랭커들과 협력하여 탐사대를 꾸렸느냐가 특히 많은 화두에 올랐죠. 여러분께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밝혔듯이 템빨단은 인마대전을 축제가 아닌 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국이나 발할라 등의 거대 세력과 연합을 맺은 것부터가 사태의 심각성을 암시하고 있죠. 인마대전에 대비해서 랭커들을 전반적으로 육성하려는 게 템빨단의 의도라고 봅니다.』
『누군가는 전투계열 플레이어의 평균 레벨이 300에 도달한 만큼 상황이 쉽게 흘러갈 거라고 말합니다. 고작 몇 마리의 대악마에게 좌지우지되었던 과거와 달리 이번 전쟁에선 손쉽게 승리할 거라고 주장하죠. 참으로 어리석은 식견입니다.』
『인마대전은 이름 그대로 대규모 전쟁이 될 테니까요.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소수의 대악마가 아니라 ‘지옥의 군단’이 침공해오는 것인데 어찌 과거의 경우를 들먹입니까? 이번 사태는 결이 다릅니다. 우리가 여태껏 체험하지 못했던 위기가 닥쳐올 겁니다. 템빨단이 상위 랭커들을 규합시켰듯 모든 플레이어가 서로 협력해서 위기에 대비해야 합니다.』
Satisfy가 출시되고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허울뿐인 전문가는 이제 드물다.
책상 앞에 앉아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전문가를 자처했던 이들은 도태되었고 실제로 Satisfy를 플레이하며 깊이 이해한 자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꿰찼다.
작금의 지식인들은 템빨단의 경고를 좌시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며 템빨단을 본받아 힘을 합쳐야한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야탄교가 악마를 숭배하는 이상 인마대전은 일종의 종교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야탄교 입장에서 인마대전은 축제가 맞았다.
캐시아이템의 수혜를 입은 뒤로 신도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 전례 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그들은 지옥과의 협력을 기대했다.
세계의 종말이 자신들의 영달로 이어질 거라고 설파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야탄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대륙과 인류의 안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보상에 갈급했다.
야탄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잇따랐다.
그들은 인마대전의 수혜자가 되기를 원했다. 악마의 편에 서서 더 쉽게, 안전하게 승리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보상을 차지하길 바랐다.
물론 인류의 강역을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삼신교와 연합국에 합류하는 플레이어도 많았다.
하지만 야탄교에 투신하는 플레이어와 비교해서 소수에 불과했다.
NPC와 인연을 맺었다거나, 확고한 터전을 세웠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이 세상을 귀중하게 여기는 플레이어는 여전히 많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 삼신교는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고 공표했다. 연합국과의 연대를 거부했다.
연합국에 템빨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템빨국이 템빨신교의 본거지 아닌가.
삼신교가 템빨국과 협력하게 되면 그건 즉 템빨신교를 새로운 종교로 인정한다는 꼴이 됐다.
아스가르드 출신이 아닌 신은 모조리 이단으로 규정해온 삼신교 입장에선, 교황을 비롯해 수많은 인재를 템빨신교에 빼앗겨 원한이 깊은 레베카교 입장에선 특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하나로 뭉쳐도 부족할 플레이어의 세력 구도가 지리멸렬하게 나뉘었다.
하지만 연합국의 수뇌부는 침착했다.
어느 정도 예견했던 사태였기 때문이다.
저마다 소속이 다르고 사상이 다른 플레이어를 하나로 규합하는 건 애초에 힘든 일이었다.
***
템빨단이 사태를 비교적 평온하게 받아들인 그때...
“아니 이런 빌어먹을. 하나로 똘똘 뭉쳐도 부족한 판국에 악마들 편에 붙는 인간들은 뭐야?”
S.A그룹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밸런스 때문에 야탄교를 밀어줬던 게 독이 됐군요.”
“야탄교를 지원한 것도 모르페우스고 인마대전을 연 것도 모르페우스잖아. 이쯤 되면 모르페우스의 판단력에 좀 의구심이 생기는데.”
“쉿, 큰일 날 소리.”
“하아... 인마대전이 열릴 거라고 미리 예고한 보람이 없네요.”
“규칙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인마대전의 심각성을 공지했어야...”
“사람들이 전쟁의 심각성을 몰라서 진영을 나눈 것 같아? 알면서도 외면하는 거야. 게임 속 세상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룰을 어기고 신뢰를 잃으면서까지 공지했어도 변하는 건 없었을 거다.”
“쉿, 쉿!”
“...”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주시하던 운영팀 팀원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윤상민 이사가 방문했기 때문이다. 숨결이 거친 걸 보아 달려온 듯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팀장에게 건네받은 지표를 살피는 그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또 임원회의 열리겠구만.
팀원들이 윤상민 이사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끼는 그때였다.
“어...? 어라?”
Satisfy의 전반적인 동향을 24시간 관찰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저편의 신입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설마 지옥에서 벌써 선발대라도 보낸 거야?”
“그, 그게 아니라...”
“바빠 죽겠는데 어리바리하긴... 어?”
우왕좌왕하는 신입들에게 핀잔을 주며 다가간 로버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사님!”
“...?”
본사 사내 분위기가 아무리 자유분방할지언정 일개 대리가 이사를 호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뭔가 사달이 났음을 직감한 팀원들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고 윤상민 이사와 운영팀장이 로버트에게 다가갔다.
꿀꺽!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시발 설마 또 야근...’
팀원들이 머리를 부여잡는 그때였다.
“하핫...! 하하하핫!!”
윤상민 이사가 대소를 터뜨렸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아주 호쾌한 웃음소리였다.
“...?”
뭐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가온 팀원들이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수백 개의 화면 중 절반 이상이 마침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드였다.
직업 전용 아이템인 <탐욕>의 ‘밸런스 유지용’ 부정 특성을 삭제한 그가 새로운 서사시를 쓰는 중이었다.
“...헉!”
기겁한 팀원들이 윤상민 이사로부터 물러났다.
혹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이성을 잃은 게 아닐까 경계하는 것이었다.
마침 웃음을 그친 윤상민 이사가 중얼거렸다.
“우리가 믿을 사람은 이제 당신뿐이야...”
“...?”
팀원들의 얼굴이 급기야 하얗게 질렸다. 윤상민 이사가 실성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다행히 윤상민 이사는 아주 멀쩡했다.
얼마 전, 그는 무패왕의 원본 검술을 얻은 그리드를 보고 커다란 경계심을 품었었다.
그리드를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그를 무조건 신뢰해도 괜찮은 건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그리드의 동향을 살피며 그가 걸어온 길을 다시 한 번 돌이켜 본 윤상민 이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그리드를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자신이 왜 그리드의 팬이 됐었는지 상기하자 자연히 그렇게 됐다.
“지금 당장 음향팀에 연락해서 테마곡 다섯 곡 정도 준비하라고 하게.”
“네...? 테마곡이요? 다섯 곡이나요? 아, 혹시 인마대전에 삽입할 배경음악 말씀하시는 거면 나흘 전에 이미 완성 됐다고 들었...”
“그리드 전용 테마곡 말일세! 화면에 그리드가 등장할 때마다 음악 바꿔서 깔리게 하라고 해!”
“...”
“이사님, 팀장님. 임원회의가 소집됐다고 합니다.”
“아 마침 잘됐군. 그냥 내가 직접 가서 말하도록 하지.”
“...괜찮으신 건가?”
“플레이어용 테마곡 만들라고 하시는데 넌 저게 괜찮아 보이냐?”
윤상민 이사가 떠난 후.
팀원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참고로 Satisfy에서 테마곡을 보유한 캐릭터는 초네임드급 NPC나 보스몬스터 중에서도 극히 소수다. 심지어 그마저도 한두 곡이 전부였고 특정 상황과 조건이 부합해야만 재생되게끔 설정되어 있었다.
특정 플레이어용 테마곡을 만들어서(그것도 5곡이나) 화면에 찍힐 때마다 재생시키라니... 그건 회장님의 인가를 얻어야 할 정도의 사항이었다. 당연히 실현 될 리 없다고 팀원들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