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65화 (1,355/1,794)

템빨 68권 - 18화

“역시 크라우젤도 인마대전을 대비하고 있었구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플레이어 중에 천외천을 선망하지 않았던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재작년 국대전 이후 동대륙에서 두문불출했던 그가 오래간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감탄과 경의가 잇따랐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최상급 하이랭커임에도 그랬다. 언제라도 길드를 세워 수많은 인재를 거느릴 수 있는, 혹은 이미 그러고 있는 사람들이 크라우젤 앞에선 겸손해졌다.

그리드의 뒤를 잇는 공식 서열 2위의 존재감이라는 것이다.

“시, 실화냐...”

아레스 군단의 정예들이 민망해서 딴청을 피우는 그때 토반은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크라우젤.

비록 템빨단은 아니지만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이다. 실력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그렇다.

뭘 해도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는 랭킹 1위 시절에도 나쁜 소문 하나 없던 사람이 바로 크라우젤이었다. 아군이 됐을 때 가장 든든한 존재 중 하나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마침 라우엘의 길드 채팅이 올라왔다.

-크라우젤님께서 지옥 탐사대에 지원하셨고, 제 재량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의 판단은 유라님께 맡기겠습니다.

“...”

“...”

루비를 뒤로한 크라우젤이 어느덧 유라 앞에 다가섰다.

나란히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은 운명, 인연, 연인 등의 단어를 자연히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잘 어울렸다. 외모만 놓고 봤을 땐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 오빠 불쌍해.’

뒤늦게 정신 차린 루비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품는 그때.

꿀꺽!

곳곳에서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크라우젤과 그리드의 친분이 깊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크라우젤과 유라의 관계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유라가 야탄의 종 시절에 적대했던 상위 랭커 중 하나가 바로 크라우젤이었고, 국가대항전에서 유라의 발목을 몇 차례나 붙잡았던 사람도 다름 아닌 크라우젤이었다.

크라우젤과 템빨단의 관계를 떠나서 두 사람의 감정이 좋기는 힘든 것이다.

사람들은 과연 유라가 크라우젤에게 활약할 기회를 줄지 의문이었다.

“당신이 선봉을 맡겠다고요.”

유라가 한 템포 늦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든든하네요. 루비 양의 생각은 어때요?”

“네? 저, 저야 당연히 좋죠.”

루비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사심이 섞인 대답은 아니었다.

크라우젤은 검성이다. 설령 신성력을 전혀 못 쓰더라도 ‘검을 쥐는 이상’ 악마들에게 상성상 우위에 설 수 있다.

상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에겐 무의미했다.

법칙을 무시하고 반드시 베는 존재가 검성이기에.

크라우젤이 대체 불가능한 전력으로 평가 받는 이유다.

“크라우젤 오빠하고 함께하면 선봉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루비의 의견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 또한 같았다. 토반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왠지... 슬픈데?’

누구보다 기뻐하던 토반이 문득 서글퍼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기분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헛기침한 토반이 크라우젤에게 자신의 무기를 건네주었다.

과거 쥬다르교의 성물이었던 <초월신성검>이다.

그리드가 레베카교에서 얻은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와 마찬가지로 교내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고 방치됐던 물건.

그것을, 한때 쥬다르교 제일 성기사였던 토반이 수많은 업적을 세워 ‘자격’을 얻고 손에 넣었었다.

이번 지옥 탐사에서 토반이 선봉을 맡아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용 조건이 ‘나’라고 봐도 무방한 물건이지만... 검인 이상 네가 다룰 수 있겠지? 이 무기가 루비의 성역 건설을 도울 거다.”

그리드가 ‘모든 아이템’을 제한 없이 착용하고 사용하듯, 크라우젤은 ‘모든 도검류 무기’를 제한 없이 휘두른다. 심지어 누구보다 더 잘 다룰 수 있었다.

검성의 검술은 검을 통찰하고 교감하는 것을 기본 바탕으로 삼기에 그렇다.

고개를 끄덕인 크라우젤이 초월신성검을 받아들였다.

“신뢰에 보답하겠다.”

“좋아. 곧 돌려받으러 갈 테니까 잘 간수하고 있으라고.”

토반이 씨익 웃었다.

경쟁자였던 시절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크라우젤과 이토록 큰 신뢰를 쌓을 날이 올 줄이야.

크라우젤과 교감해온 그리드, 그리고 크라우젤의 어머니를 돕고자 노력했던 라우엘의 공헌이리라.

“탐사대 전원을 지옥으로 옮기려면 시간이 촉박해요.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이번 탐사의 참가자는 300명에 육박한다. 그들을 전부 전송하려면 시간이 촉박했기에 유라가 재촉했다.

그녀는 크라우젤이 동대륙에서 무엇을 해왔고, 어떤 성취를 이뤘는지 그리드를 통해서 전해들은 바 있다. 지옥문을 여는데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콰지직!!

유라 곁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새카만 통로가 생겼다.

지옥문이다. 유라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크라우젤은 그 광경에 어떤 감회마저 느꼈다.

“먼저 가있으마.”

크라우젤이 앞장섰다.

쫓아가기에 앞서 심호흡하는 루비에게 유라가 한 번 더 당부했다.

“루비 양, 제가 도착할 때까지 당신이 사람들을 인솔해야 해요.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마세요.”

“네! 명심할게요!”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힘차게 대답한 루비가 지옥문으로 몸을 날렸다.

“세희야! 잘 꼬셔 봐!”

뒤에서 황당하게 외치는 예림의 헛소리는 무시했다.

***

[지옥에 입장하였습니다.]

[폐부를 꿰뚫어야 할 강력한 마기가 당신을 침범하지 못하고 흩어집니다.]

[정신을 봉쇄하는 사기가 당신에게 닿기도 전에 물러납니다.]

“앗...!”

루비가 기겁했다.

지옥에 입장한 순간 보이는 거대하고 투명한 유리 성.

아름답다는 감상이 막 피어오르려는데 7마리의 마물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흉측하고 거대한 마물들이었다. 대상의 마기를 감지하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성녀의 통찰로 봤을 때 정예 등급으로 해석해도 무방했다.

“피, 피해요!”

루비가 자신을 마중하는 크라우젤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놈들은 이미 크라우젤의 등 바로 뒤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지옥에 입장한 페널티로 모든 능력치가 하락한 크라우젤이 루비를 신경 쓰느라 놈들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크라우젤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는 괜찮다.”

동시에.

츠카카카카카카칵!!

크라우젤에게 발톱을 휘두르던 마물들의 몸이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선혈이 낭자했다. 비명조차 토하지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했다.

루비가 놈들을 인식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베인지도 모른 채, 놈들은 이미 죽어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검날을 검파에 마찰시켜 가속력을 얻는 발검술과는 달랐다.

만약 작금의 사태를 발생시킨 인물이 극검이었다면 뒤늦게나마 마찰음이 진동했을 테니까.

반면 크라우젤의 검술은 고요했다. 이질적인 소리가 전혀 섞이지 않았다. 검술을 발휘하기에 이상적으로 단련 된 육체와 최강의 검술이 맞물려 순수하고도 극강인 쾌검술을 발휘했다는 뜻이 됐다.

“곁을 지킬 테니 시작해라.”

산란하는 빛줄기 사이에 선 크라우젤이 또 다시 따스한 시선을 보내온다.

루비에겐 그 눈빛이 익숙했다.

오빠가 나를 보는 시선과 닮아있었으니까.

“네...!”

오빠가 한 명 더 생긴 기분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난 오빠가.

활짝 웃은 루비가 힘차게 대답한 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성역 선포.

성녀가 허락하지 않은 기운과 개념은 그것이 무엇이든 침범할 수 없는, 오직 성녀 루비가 법칙이 되는 영역을 세우는 과정이었다.

크라우젤은 초월신성검을 뽑았다.

그러자 크라우젤의 마나가 소모되며 루비의 주문을 따라 그려지고 있던 마법진의 각인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외부의 신성을 강화시켜 신성 마법을 강화하거나 성스러운 행사를 돕는’ 초월신성검의 효과였다.

본래라면 더 큰 집중력과 자원이 소모되는 성역 건설이 몇 배나 쉬워진 것이다.

크라우젤은 초월신성검의 작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들은 성녀를 경계한다고 들었는데.’

크라우젤이 알기론 삼신교의 신도들과 루비가 마찰을 일으킨 적이 없다. 게다가 이 순간 초월신성검이 루비의 행사를 돕고 있다. 초월신성검의 정보에 담긴 탄생비화를 보면 ‘쥬다르의 신탁을 받아 만든 검’이라는 문장이 있었기에 더욱 의문이었다.

‘쥬다르 신은 성녀를 딱히 경계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지금만 방관하는 건가?’

...모르겠다.

랭커라고 해서 세계관의 모든 스토리와 설정에 능통할 순 없는 법이다.

그리드가 정통해 있는 스토리가 지옥과 천상, 파그마와 브라함, 동대륙과 사하란 제국, 탈리마와 번헨 열도 등인 것처럼 크라우젤 또한 자신만이 정통해 있는 스토리가 따로 있었다. 종교에 대해선 잘 몰랐다.

키에에에에!!

새로운 마물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라우젤과 루비를 발견하고 습격해왔다고 보기엔 출현이 너무 빨랐다. 아무래도 이곳 자체를 처음부터 경계하고 있던 눈치다.

‘지옥문이 열리는 지점을 적들이 파악하고 있었군.’

쉴 틈 없는 공습이 지속 될 것으로 추측됐다.

크라우젤이 초월신성검의 상태를 점검했다. 루비의 행사를 돕고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기능이 정지되거나 약화 된 상태였다. 공격력도 크게 줄었다. 검에 담긴 진기 전부가 오로지 루비를 위해 작용하고 있었다.

토반이 위축됐던 이유다.

만약 토반이 작금의 상황을 맞이했다면 사실상 방패 한 자루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능동적으로 대응 할 수 있었다. 반대편 손에 새로운 검을 뽑아 쥐었다.

검성은, 쌍수검을 사용해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

또한 크라우젤은 쌍수검을 완벽하게 컨트롤한다.

게다가...

‘지옥 페널티는 <검을 찬미하는 시>로 잠시나마 물리칠 수 있다.’

검을 찬미하는 시는 크라우젤과 검을 동화시킨다.

대상으로 삼은 검의 내구력과 공격력이 크라우젤의 생명력과 방어력으로 치환되며, 적용 중인 모든 약화 효과를 정화시키고 면역한다. 게다가 다음 스킬 사용 시 위력을 최대 14배(기존엔 11배가 최대였지만 검찬시의 레벨이 오르며 위력도 상승하는 중이다)까지 증폭시켰다.

크라우젤의 궁극기 중 가장 활용도가 높은 스킬이었다. 여러 변수에 대응이 가능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을 기다리는 변수가 너무 컸다는 게 문제였다.

끼긱.

“...?”

마물들을 베어나가던 크라우젤의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변했다.

그의 검들이 공명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반응했다.

[당신의 무기가 악마 ‘보레론’의 지배에 들어갑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크라우젤이 긴장했다.

검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검성의 특성이 아니었다면 방금 무기를 빼앗겼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대악마급의 권능이다. 고위 악마야.’

크라우젤의 시선이 강력한 마기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돌아갔고,

꽈아앙!!

크라우젤이 딛고 선 지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마치 노린 듯한 타이밍이었다.

“바르바토스님의 저격을 피하다니 용하구나.”

스아악...

급속도로 밀려온 검은 안개가 점차 형상을 갖추었다.

‘바르바토스의 권속’이라는 수식언을 단 악마 보레론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바르바토스는 권속의 시야를 공유 받는다. 설령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시야를 확보하는 이상 ‘저격’이 가능하다.

물론 세계선이 같아야 한다는 제약은 있다. 만약 그런 제약조차 없었다면, 인류는 지상에서도 바르바토스의 저격에 떨어야 했을 것이다.

콰아앙!!

재차 저격이 발생했다.

처음의 포격은 ‘초감각’으로 반응해 간신히 피했던 크라우젤이지만 이번엔 피하기 힘들었다. 고속으로 접근해온 보레론의 커다란 손이 그의 안면을 감싸 쥐려고 했기 때문이다.

저격과 정확히 일체되는 협공이었다.

바르바토스와 보레론이 합을 맞춰온 횟수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당연하다.

보레론은 본래 헬가오의 권속이었다가 바르바토스에게 붙은 크르차와 달리 성골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바르바토스의 권속이었다.

‘둘 중 하나는 허용하는 편이 좋다.’

크라우젤의 높은 통찰력과 직감이 상황을 찰나지간에 파악하고 판단한다. 그는 저격을 피한 대가로 안면을 내주었다.

꽈작!!

크라우젤의 몸뚱이가 지면에 세차게 꽂혔다.

푸욱!

이어서 보레론의 이마에 달린 뿔이 크라우젤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라우젤의 검은 보레론의 양쪽 눈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이 반격을 위해서, 크라우젤은 순순히 붙잡혀주었던 것이다.

“윽...!?”

시야를 잃고 당황하는 보레론의 복부에 자진모리를 날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크라우젤이 물약을 마시며 말했다.

“눈을 잃었으니 당분간 지원 사격은 없겠군.”

크라우젤이 그리드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듯 그리드 또한 크라우젤에게 정보를 공유해왔다.

인마대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는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일 거라며 놈의 특징들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해줬었다.

바르바토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해오는 저격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을, 크라우젤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설마 벌써부터 바르바토스의 권속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만.’

그리드가 말하길, 바르바토스는 유독 그리드에게 집착한다고 했다. 듣기로는 ‘시야’의 일부를 빼앗긴 원한이라고 했는데... 아마 그래서 그리드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지옥문을 주시해왔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그렇고... 과연 그리드의 동생답다고 해야 하나.’

크라우젤이 백호검을 감싼 홀리 인챈트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동료가 적의 공격을 허용하는 와중에 방어 마법이나 힐이 아닌 무기 강화 마법을 걸어줄 줄이야.

일반적인 성직자 플레이어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루비의 플레이 방식이 크라우젤을 웃게 만들었다.

공격적인 성향이 그리드를 꼭 빼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

홀리 인챈트에 베인 보레론의 눈이 재생을 못하고 있다. 물론 오래 지속되는 효과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홀리 인챈트가 유지되는 한, 크라우젤은 보레론의 눈을 몇 번이고 다시 벨 자신이 있었다.

‘후발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끈다.’

아마 유라라면 다음 주자로 크리스를 보낼 확률이 높다. 크리스의 괴력은 ‘그리드 다음’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탁월한 바. 이미 확보한 거점을 확장하는 용도로 쓰기에 그만큼 좋은 카드도 드물다.

‘승산은 그때부터 엿본다.’

저벅.

크라우젤이 보레론에게 다가갔다. 한 번의 보폭에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담겼다. 그 가능성 중에 보레론의 눈이 무사히 회복 될 확률은 존재하지 않았다.

루비의 성역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크라우젤이 지옥에서 받는 페널티가 약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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