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17화
지난 3일.
전쟁 물자를 가득 실은 마차가 라인하르트에 속속들이 도착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마차의 행렬은 ‘거래소를 싹쓸이 한 정신 나간 갑부의 정체가 사실은 그리드였다.’는 헛소문을 퍼뜨렸을 정도다.
그리드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돈 많아 보이면 좋은 거지, 뭐.
실제로 소문의 효과는 컸다.
템빨국에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던 상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마다 상전처럼 굴던 그들이 이제는 거북이처럼 납작 엎드렸다.
설마 우리가 괘씸하답시고 철광석 하나를 200골드에 매입해서 물자를 충당할 줄이야... 이건... 이건 그냥 미쳤다.
상인들은 그리드의 폭력적인 재력이 두려웠다. 광기마저 느꼈다.
그리드를 상대로는 결코 갑이 될 수 없음을, 자신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은 아직 모른다.
그리드가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 중인지.
진실은 인마대전이 시작되고 나서야 밝혀질 것이다.
***
“실례합니...?”
별궁 한 채를 통째로 개조해서 만든 대장간.
그리드를 찾아온 라우엘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불멸의 대마도사, 혹은 망자들의 왕이라고 추대 받는 리치가 모루 앞에 서서 망치를 두드리고 있다.
대장장이들에게 신성시 될 정도로 존귀한 종족인 드워프가 분주히 뛰어다니며 잡일을 돕고 있기도 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왔어?”
그리드를 돕는 리치와 드워프의 정체는 템빨골2와 케를 옹이었다.
별궁 대장간은 도심에 세운 대장간보다 다소 규모가 작았지만, 그리드가 굳이 이곳에서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이목을 신경 썼기 때문이다.
리치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했다간 수많은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와 소란이 생길 테니.
“리치가 대장일 하는 모습 보니까 너무 비현실적인데요. 그 와중에 멋진 이유는... 흑염룡을 품어서인가?”
“왜 다짜고짜 헛소리야? 어쨌든 빨골이가 멋져지긴 했지.”
너울거리는 칠흑의 마력을 망토처럼 두르고, 모든 행동마다 마력의 잔상을 남기는 등.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도 저런 포스는 보여주지 못할 거다.
탭댄스 추면서 망치 두드리는 꼴이 우스워서 문제지.
“중간 중간에 읽는 책은 뭐랍니까? 설마 전생의 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금단의 마법서...?!”
“...마드라의 일기장이다. 글씨가 워낙 괴발개발이라 해석에 꽤 시간이 걸리는 눈치야. 너, 들뜬 거 보니까 협상이 잘 됐나보다?”
“후훗,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다만 대장간 수요가 높은 물자에는 끝까지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더군요. 철광석을 2골드 이하론 양보 못하겠다나. 그럼 관두라고 했습니다.”
“현 시점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지 않나? 상인들도 많이 양보한 거 같은데?”
“양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애원하는 수준이었죠. 그들 입장에선 매입가보다 수 배, 수십 배나 싸게 팔게 된 셈이니 피눈물이 흐르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이미 충분한 물자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세가 너무 뛴 물품들엔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지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아이템 만들다가 실수하거나 실패하면 도안에 표기 된 것보다 더 많은 재료를 소모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그리고 우리뿐만 아니라 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물자를 최대한 확보하려고 혈안일 텐데, 조만간 시세가 더 오르기 전에 지금 조금이라도 사놔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연합국들과 가격 담합을 맺어놓은 지라.”
“너 혹시 공산당 아니냐...?”
“하하,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품은 자들이 시장 경제를 해치려 할 때 올바르게 인도해주는 것도 국가의 역할이죠. 그런데... 템빨골이 완제품을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라우엘이 다소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지팡이, 오브, 로브 등의 마법사용 아이템을 그리드가 아닌 템빨골2가 전담해서 제작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템빨골2에게 대장장이 기술이 있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템빨국의 마법사들이 사용할 물건을 만들 자격이 있을까? 템빨골2의 대장일 실력이 제법이라고 해도 실제 대장장이의 실력엔 미치지 못할 텐데?
그리드가 라우엘의 불안을 덜어줬다.
“괜찮아. 빨골이가 마법용품을 제작하는 솜씨는 거의 장인 수준이거든.”
리치가 되면서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전반적으로 높아지다 보니 마법용품을 제작하는 기술도 자연히 발전했다.
그리드가 재단 기술을 발전시키자 대장장이 기술도 덩달아 발전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현재 템빨골2는 마법사용 아이템 제작을 도맡는 중이었고, 템빨골1과 케를 옹, 그리고 갓 핸드들은 잡일과 병사용 아이템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 그리드는 본인의 아이템을 정비할 수 있었고 말이다.
‘낡은 장비들은 싹 다 새로 만들고... 사신의 숨결이 깃든 장비들과 신검들은 개조하는 방향으로 간다.’
<템빨신 그리드의 개변>.
이는 본래 <전설적 대장장이의 개조>라는 이름의 스킬이었다.
이해도가 100퍼센트인 아이템을 재해석하여 형태를 바꾸거나 강화하는 기술이었는데, 마스터 레벨에 도달해봤자 사용 가능 횟수가 총 10회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의 아이템당 단 1회의 개조만 가능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되도록 극후반에 쓰고 싶은 스킬이었다.
정말 지존급 아이템에나 쓸 생각으로 한참을 봉인했었다.
하지만 템빨신의 기술을 얻은 뒤론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아이템 개조 횟수에 제한이 없어진 까닭이다.
하나의 아이템당 단 1회만 개조가 가능했던 제한조차도 3회로 완화됐다.
앞으론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끼지 말고 팍팍 쓸걸...’
템빨신 그리드의 개변으로 바뀌며 사라진 전설적 대장장이의 개조 스킬은... 아끼다가 똥 된다는 선조들의 격언을 되새겨준 스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아쉬운 마음이 무척 컸다. 하지만 그리드는 금세 마음을 다스렸다.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봤자 무의미하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론 잘 되기도 했다.
사마천과 의논 할 일이 남았다며 떠나는 라우엘을 배웅해준 그리드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개변.”
[개변시킬 아이템을 선택해 주십시오.]
대장장이 기술이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로 진화한 덕분에 제작 아이템의 성능이 월등히 상승한 상태다.
게다가 개변이라는 단어 자체가 ‘더 좋게 바꾼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제부터 개변시키는 아이템들의 위력은... 기존보다 월등히 강력해질 것이다.
***
“후로이가 스파이로 잠입해서 서류를 조작 했다고? 이만한 물자를 확보할 정도의 재력을 가진 상단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페이커도 못할 일인 거 같은데?”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페이커가 완전히 기가 죽었어. 만약 후로이가 어쌔신의 길을 걸었다면 어쌔신 랭킹 1위는 자기가 아니라 후로이였을 거라면서.”
“푸하하! 그러고 보니까 페이커 그 녀석도 승부욕 엄청나지. 어쨌든 후로이가 정말 크게 한 건 했군.”
“영웅이지 뭐. 스파이로 잠입한 것도, 상단주를 속인 것도 어디까지나 주둥이 털어서 해낸 일일 텐데... 나중엔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을 세뇌하고 다니는 거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야, 그건 너무 나갔다. 소름 돋잖아.”
템빨단원 대부분이 라인하르트에 집결했다.
곧 시작 될 지옥 탐사 일정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템빨단원뿐만 아니라 다른 단체의 상위 랭커들도 이번 일정에 다수 지원했다. 인맥을 통해 소식을 듣고 찾아온 무소속 랭커들도 많았다.
직접 지옥을 찾아가 지옥의 수준을 체험하고 인마대전에 대비해 실전 훈련을 쌓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지옥에서 받는 페널티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강력한 악마가 너무 많고, 마물들의 능력은 굉장히 다채롭다. 최악의 경우 대악마와 조우할 수도 있다.
즉, 죽을 확률이 무척 높다...
템빨국은 누차 경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다.
그들의 공통점은 인마대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플레이어라고 해서 죄다 바보는 아닌 것이다. 인마대전의 위험성을 인지하는 사람도 많았고, 이번 지원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물론 그들 전부를 순수하게 신뢰할 순 없었다. 세상엔 온갖 빌런들이 난무했으니.
라우엘은 지원자들을 선별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본인 주장으론 ‘운명의 별자리에 수놓일 영혼들을 찾는 과정’이었다. 단순히 개소리였다.
어찌됐든 그 결과 지원자의 27퍼센트만이 지옥 탐사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옥에 입장하고 페널티가 발생하는 순간 호흡이 불가능하거나 마나 운용이 막히는 디버프에 걸리시는 분들이 생길 거예요. 특정 능력치가 자격 미달 수준까지 떨어지면 발생하는 마기 중독 현상의 일부인데, 그런 현상을 겪게 되시는 분들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로 말해주셔야 세희 양... 성녀 루비가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아... 네!”
유라의 실물을 가까이서 목도하고 반쯤 넋이 나가있던 랭커들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듣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페널티가 대체 얼마나 심하면 호흡 불가에 마나 운용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디버프가 심화 된단 말인가.
과연 최종 컨텐츠 구역이라고 알려진 지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에서 오히려 강력해진다는 데빌 슬레이어의 특성이 새삼 대단하고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토반 님, 루비 양, 준비 됐나요?”
“네!”
“자, 잠깐.”
성녀 루비는 힘차게 대답하는 반면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점검 중이던 토반은 손사래 쳤다. 가장 먼저 지옥문을 넘어야 한다는 중책을 맡게 된 그는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면 어떨까요?”
“안 돼요.”
토반의 상태가 좋지 않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레가스에게 유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번 원정에서 <흑수정 성>을 얻은 이후, 유라의 지옥문에는 고정 좌표가 생겼다.
스킬 레벨이 아직 낮아 랜덤으로 설정됐던 지옥문의 좌표를 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시스템이 흑수정 성의 안정성을 인정해준 덕분이긴 한데... 좌표의 위치가 애매했다. 흑수정 성의 ‘내부’가 아닌 ‘입구’다.
정확히는 성문 앞.
엄밀히 말해서 안전구역이 아닌 것이다. 지옥문을 넘는 순간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성기사 랭킹 1위 토반과 성녀 루비의 조합이 아닌 이상 사악한 존재의 기습을 감당하기 힘들다.
데미안이 아직 교황이었다면 데미안과 루비 듀오가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었겠지만, 템빨교 교주로 직책이 바뀐 데미안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성력을 소실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서 유라가 먼저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탐사대 전원이 지옥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이고 인계에 머물며 지옥문을 열어줘야 했다.
“토반 님과 루비 양이 먼저 넘어가서 ‘성역’을 세워야만 이번 탐사가 성립되는 거예요.”
지옥문의 쿨타임은 30분이고 한 번에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은 2명이다. 이번 일정 중에 레벨이 올라 쿨타임이 줄고 수용 인원이 늘어날 가능성이 무척 높긴 했지만, 스킬을 최소 10번은 더 써야 레벨이 오를 전망이라 그때까진 2명씩 보내는 수밖에 없다.
우선 문을 첫 번째로 넘는 사람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이 루비다.
그리드가 직접 이끌었던 지옥 원정대에 포함되지 못하고 자극을 받아 부단히 성장에 힘써온 아이.
그 아이의 힘이라면 탐사대가 감당해야하는 지옥 페널티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게 유라의 관측이었다.
“...”
뒤로 물러선 레가스가 토반을 힐끔 쳐다보았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눈치였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압박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어떤 상황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곳에 가장 먼저 입장해서 최소 25분 동안 루비를 지켜야하는 것이다. 단순히 흑수정 성에 들어가서 대기해선 안 되고, 후발주자들을 위한 <성역>을 반드시 설치해 놓아야만 했는데 설치에 걸리는 시간이 최소 25분이었다.
25분 동안 지옥 한복판에서 성녀를 지키는 임무...
템빨단 최고의 실력자들조차 성공을 자신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해야 된다. 나보다 강한 사람이야 수두룩하지만 지옥에서도 유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탱커는 나밖에 없어.’
...근데 만약에 실패하면 어쩌지? 내가 당해버려서 루비를 지키지 못하고 둘 다 죽어버리면 탐사 일정 자체가 꼬인다. 수백 명의 참가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템빨단을 망신시키는 셈이었다.“내게 선봉을 맡겨줄 순 없겠나.”
“...?”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는 토반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랭커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낮은 미성.
어째선지 아련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었다.
“...!”
아련하다 느낀 이유가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음성이었으니.
저벅. 저벅. 저벅...
황룡이 수놓인 흑색 장포가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서 펄럭인다. 길게 흘러내린 흑발이 일광을 머금고 투명한 물결을 일으킨다. 허리에 비스듬히 채운 검파에 얹은 흰 손은 섬섬옥수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선 고운 미남자.
가을의 향기를 품고 떨어지는 단풍을 헤치고 다가온 그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쌓아온 업적과 실력을 논하다 보면 어느새 호흡이 벅차질 지경이었으니, 외모까지 언급 할 여력이 없다.
“크, 크라우젤...!”
검성.
그러나 천외천이라는 이명이 더욱 더 어울렸던 사내.
“이 아이는 내가 지키고 싶다.”
늘 고요했던 그의 눈빛이 드물게 따스하다. 벗의 혈육이다. 귀중하게 대하는 게 당연했다.
“아...”
크라우젤과 마주 보고 선 루비의 뺨에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