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63화 (1,353/1,794)

템빨 68권 - 16화

현대적이고 편리한 인프라, 발전한 기술, 안정 된 경제, 높은 치안,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 등등.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봤을 때 템빨국은 굉장히 매력적인 국가다.

사하란 제국의 유구한 역사와 풍족한 자원조차도 현대인의 감각으로 가꿔진 템빨국의 편의성과 비교하면 큰 매력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템빨국으로 이주해오는 사람의 숫자는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플레이어가 템빨국의 국적을 탐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템빨국의 높은 치안은 용병으로 활동하는 유저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상위 보스 리젠 구역을 통제하는 템빨단의 방침은 고렙 유저들의 발길을 되돌렸으며, 템빨국 정부가 직접 감시하고 뮤토 상단이 관리하는 경제시장은 상인 유저들에게 외면 받았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템빨국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살기 좋은 나라’일지 몰라도 어떤 ‘꿈’을 품기에 좋은 환경은 아닌 것이다.

“철광석 시세가 벌써 5골드까지 치솟았는데요? 그래도 더 사놓을까요?”

“오르는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음... 9골드 아니, 13골드까지 싹 다 매입해.”

“제국이 새로운 요새 공사를 발주했다고 합니다!”

“거긴 입찰 경쟁이 너무 심하니까 동부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자. 석재 매입 경쟁이 동부에서 먼저 심화 된 걸 보면 그쪽 왕국들도 조만간 요새 증축을 시작할 거야.”

상인들과 기술자들에게도 인마대전은 대목이었다.

특히 템빨국 소속이 아닌 상인들과 기술자들에게 그랬다.

템빨국 소속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대부분 템빨국 정부의 의뢰를 받고 물건을 생산하거나 공사를 진행했으며 단가를 책정할 때 템빨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지만, 타국 소속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여러 국가의 의뢰를 받았고 단가 책정에서도 자유로운 면이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현재 금속과 석재 자원은 품귀 현상을 겪는 중이다. 전쟁을 앞두고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까닭이다.

인마대전 소식이 전해지고 고작 나흘 만에 시세가 20배 가까이 폭등했을 정도인데, 템빨국 소속 상인들과 기술자들은 변동하는 시세와 관계없이 물건을 기존 가격 그대로 템빨국에 납품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식으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템빨국은 자국 상인들과 기술자들에게 채석장과 광산 등의 사용권을 주고 안정적인 판매루트를 보장해주는 대신 ‘늘 같은 시세로 물건을 매입한다.’는 조건을 내세웠었다. 노동자들과 상인들은 당연히 받아들였고 말이다.

몬스터와 도적, 혹은 경쟁업체가 고용한 용병 등을 두려워 할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자원을 채취하고, 어떤 시기에도 늘 같은 값에 물건을 납품할 수 있다는 건 너무 큰 매력이었으니까.

대신 이번 특수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평소 받아온 혜택을 생각하면 아쉬워해선 안 되기도 했다.

“매입한 물자들은 무조건 창고에 쌓아둬. 특히 대장간 수요가 높은 품목들은 시세가 최대한 오를 때까지 절대로 시장에 풀지 마.”

여태껏 템빨국은 아이템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장장이가 템빨국 소속이니만큼 그게 당연했다. 템빨국 소속이 아닌 상인들은 템빨국에 자원을 납품하려고 할 때마다 진땀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

템빨국의 넘치는 인력을 자원이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템빨국은 아이템을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템빨국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다니...

상인들은 어떤 쾌감마저 느꼈다.

***

“오늘 들어온 재료는 이게 전부인가?”

“광산들이 죄다 쿨타임에 걸렸다고 하네요.”

“생산량이 부족하면 거래소에서라도 매입해야지.”

“거래소엔 더 이상 매물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 상단이나 개인들이 인마대전 이슈가 뜨자마자 사재기를 시작한 바람에...”

“우리는 손가락만 빨고 있었나?”

“에이, 라우엘이 누군데 당연히 제일 먼저 사재기를 시작했죠. 근데 아시다시피 거래소는 클릭 빨리하는 사람이 임자 아닙니까. 전부 다 사놓는 건 불가능했죠. 그 와중에 어떤 정신 나간 갑부가 아이템 정렬순서를 ‘가격 높은 순’으로 해서 매물을 싹쓸이 해가기도 했고... 소문에 의하면 철광석 하나를 무슨 200골드에 샀을 정도라는데, 그쯤 되면 사재기가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허... 재벌의 유희 같은 건가? 어찌됐든 오늘은 글렀군.”

대장장이 랭킹 1위이자 템빨국 대장장이협회 부회장 판미르. (회장은 그리드인데 별 의미 없는 감투다)

나흘 전부터 대장간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노동에 매진했던 그가 처음으로 망치를 내려놓았다. 일을 하고 싶어도 재료가 없어서 못하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근데 설마 최고급 재료들도 수량이 딸리나?”

최고급 재료는 대부분 그리드에게 밀어주는 중이다. 그리드가 만드는 아이템이 다른 대장장이들이 만드는 아이템보다 월등히 뛰어났으니 당연했다.

“네...”

“이거야 원... 그리드도 손 놓고 있겠군.”

“이번에 발할라에서 10만 대군을 지원 보낸다고 했잖아요? 그중 5천이 정예 중의 정예랍니다. 최소한 그 5천 명에겐 상위 아이템을 보급할 예정이었다는데 그것마저 힘들게 생겼어요.”

“라우엘과 라빗 경이 골치 아프겠어.”

***

“안 됩니다.”

템빨성 대회의장.

템빨국 각처의 고위 관계자들과 발할라의 참모진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 앞에서 위축될 법도 하건만, 행정관 라빗은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품귀 현상을 빚은 전쟁 물자들을 비싸게라도 매입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전면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저희가 왜 비싼 돈을 주고 물자를 매입해야 합니까? 전 절대로 찬성 못합니다.”

“병사들에게 새로운 장비를 보급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나요. 물자를 사지 않으면 무슨 수로 장비를 만들어서 보급하죠? 설마 완제품을 매입하자는 말씀은 아니시죠?”

발할라의 여군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입가가 경련하는 것이, 새어나오려는 비웃음을 참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눈치다.

우스울 수밖에.

현재 대륙의 대부분 국가는 자신들의 조국을, 그리고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하나로 뭉치겠노라 결의한 상태다.

일부 변방 오지의 소국이나 반용족 정도를 제외하면 악마들의 무서움을 목격하거나 체험했던 만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데 연합의 중심인 템빨국의 행정을 맡고 있다는 작자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망령 된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물자들을, 시세가 올랐다는 이유로 매입하지 않겠다니?

물자를 사재기해 폭리를 노리는 상인들의 행태가 괘씸하긴 하다만, 물건 시세의 변동은 경제시장의 자연스러운 섭리다. 괘씸하단 이유로 섭리를 거부하겠다고? 어린 애의 투정이나 다름없다.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는 여군사에게 안경을 고쳐 쓴 라빗이 반문했다.

“외부에서 완제품을 구입해봤자 기존에 쓰던 장비보다 수준이 낮아 쓸데없는 지출일 것입니다만. 발할라 병사들이 기존에 쓰던 장비들은 시판되는 장비보다 수준이 낮나보군요?”

“대체적으로 낡은 장비를 쓰고 있는 실정이긴 해요. 아시다시피 어느 나라 때문에 대장장이가 부족해서.”

“그만.”

여군사의 말을 발할라의 선임군사가 끊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심지어 양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추태를 보이다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또 있을까.

한숨 쉰 그가 묵묵히 있는 총군사 사마천의 눈치를 살핀 뒤 말했다.

“라빗 행정관께서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잊지 않았기에 물자를 구매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시는 거겠죠. 제 생각 또한 같습니다.”

“본질...이라 하시면?”

여군사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놈도 발할라의 군사라고.

속으로 혀를 찬 선임군사가 설명했다.

“우리는 악마들로부터 인계를 지키자는 기치 아래 모인 시대의 영웅입니다. 인류를 돕는 입장인 거고, 상인들 또한 인류에 포함되죠. 그들은 우리에게 응당 협력해야지 거래를 제안 할 자격이 없습니다.”

“물론 논리대로라면 저들이 우리에게 협조를 해야 함이 옳긴 하죠. 하지만 싫다는데 어쩌겠어요? 설마 설득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설득은 필요 없소. 때가 되어 재앙이 시작되면 저들이 알아서 우리에게 협력하고자 할 테니. 라빗 행정관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훌륭하네.’

잠자코 회의를 지켜보던 라우엘이 감탄했다.

발할라의 선임군사.

총군사 사마천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그의 통찰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템빨국 탑2의 정치력을 자랑하는 라빗의 속내를 즉각 눈치 챌 정도로.

‘저기서 만약 결단력까지 갖췄다면...’

라우엘이 생각하는 순간 선임군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재앙이 시작 된 후에 물자를 지원 받아봤자 너무 늦습니다. 다소 극단적인 방법이긴 하나, 저는 세상에 재앙의 전조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무슨 수로요?”

“데빌슬레이어께서 템빨국 소속이시지 않습니까. 그분께서 대륙 각지의 도시들을 순회하며 지옥문을 열고 마물들을 흘러나오도록 하면... 마물의 힘을 체험한 사람들이 충분한 경각심을 품고 인마대전이 축제가 아닌 재앙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을까요.”

스틱세이가 정색했다.

“일부러 마물을 풀어 사람들을 해치자는 말이오? 천인공노 할 짓이오! 동의할 수 없소.”

반면 라우엘의 평가는 달랐다.

‘결단력까지 갖췄나... 아레스 님이 인재들을 많이도 모으셨군.’

라우엘이 봤을 땐 선임군사의 의견이 굉장히 타당했다.

대륙 각지에 마물을 풀고 도시를 파괴하다보면 플레이어들도 서서히 인마대전이 재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인마대전에 대비하기 위해선 템빨국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될 테고.

그럼 당연히 템빨국에 바가지를 씌우려고 했던 상인들을 향한 여론이 나빠질 거다. 유명한 상인일수록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템빨국에 물자를 싸게 넘길 테지.

‘말로만 위험하다고 백날 떠들어봤자 안 들어먹을 사람이 태반이니 이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긴 해. 하지만... 마물을 푼 사람이 유라님이라는 사실을 들켰을 때 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 여태껏 고생해서 쌓아올린 템빨단과 템빨국의 이미지가 단숨에 추락할 수도 있어.’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리드가 허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마물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심는 과정에 필연적인 희생이 뒤따르게 될 텐데 그걸 과연 그리드가 묵인할까?

턱에 손을 괸 채 생각하던 라우엘이 문득 사마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기에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저자도 선임군사의 의견이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하고 있을까? 만약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다면 지모가 나 이상이라는 건데...’

나와 비슷한 지모를 갖춘 선임군사의 상관인 이상 아마 더 뛰어날 확률이 높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소의 경계심을 품게 된 라우엘이었지만, 정치판 한가운데서 생활한 세월이 길다보니 표정에 속내를 드러내진 않았다.

양국 참모진이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그때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굳게 닫혀있던 대회의장의 문이 누구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열렸다.

그리드의 등장이었다.

전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할라측 참모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위대하신 템빨왕 전하를 뵙습니다.”

총군사 사마천을 필두로 발할라측 참모진 전원이 그리드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회의 중에 감정을 드러내는 등 부족한 부분을 많이 보였던 여군사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고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인외의 영역에 있는 매력 스탯과 위엄 스탯의 힘이다.

템빨국 인사들이야 워낙 그리드에게 익숙해져 종종 잊는 사실이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굉장히 멋지고 호감 가는 인물이었다.

배우나 화류계 클래스 전직자 중에는 매력 스탯에 포인트를 올인하고 옴므파탈, 팜므파탈 행세를 하는 사람이 종종 있는데, 그들조차도 그리드 옆에선 오징어가 될 것이다. 외모를 논하는 게 아니라 아우라의 문제였다.

“반갑습니다, 사마천 군사. 인사는 차후 나누도록 하고 일단 소식부터 전달하겠소. 앞으로 3일 내로 이곳 라인하르트에 대량의 전쟁 물자가 도착할 것이오. 전쟁에 대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물량이지. 처음 협의했던 대로 물자는 우리 측에서 매입할 테니 발할라 측에서는 우리가 생산하는 장비를 정당한 가격으로 구매해주시오.”

“...?”

“...?”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영리했지만, 그 누구도 그리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에 대비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물자가 곧 도착할 거라고?

혼란 속에 사마천이 입을 열었다.

“전하, 물자의 출처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라이온 상단입니다. 현재 내 측근이 첩자로 잠입해 있는 곳이오.”

“...!”

양국 참모진의 두 눈이 부릅떠지며 경련을 일으켰다.

사마천이 재차 물었다.

“물품들의 매입 가격은 어찌 되는지요?”

“기존 시세대로요. 내 측근이 워낙 일처리를 잘 해놔서.”

“...!!”

“...!!”

이번엔 사마천조차도 경기를 일으켰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정도다.

전쟁 물자의 시세가 오를 걸 예측하고 매입해 놓는 정도야 모두가 해온 일이다.

하지만 세작을 이용해 거대 상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필요한 만큼’의 물자를, 그것도 시세가 오르기 전 가격으로 미리 매입해놓는다는 건... 보통의 선견지명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의 수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지략조차도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구나...!’

[발할라 왕국의 총군사 ‘사마천’과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

순수한 선망의 눈빛을 보내오는 사마천과 당황하는 그리드.

장내가 소란스러운 와중에 라우엘은 후로이에게 귓속말을 보내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이 그리드의 지략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라이온 상단이 왜 우리에게 물자를 싼값에 넘긴다는 거죠?

-제가 상단주의 인장을 훔쳐서 서류 몇 개를 조작했거든요.

-...?

후로이가 그렇게 유능했다고?

아니, 이건 유능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고작 서류 몇 장 조작했다고 이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상단주의 인장을 어떻게 훔쳤다는 거야?’

그런 중요한 물건은 항상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텐데...?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혼란을 느낀 라우엘이 미간을 좁히자 코에서 얇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스킨은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중이었다.

어찌됐든... 천하의 라우엘이라도 이번 사태를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부터가 잘못 됐기 때문이다.

후로이는 스파이로 잠입한 게 아니다. 접대를 받고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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