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15화
플레이어 출신의 군왕은 여전히 단 둘뿐이다.
템빨신 그리드와 군신 아레스.
거느린 인재의 질과 양, 세력의 크기, 자본, 기술, 무력 등.
모든 지표에서 템빨국이 발할라를 앞섰으며, 단연코 그리드가 아레스보다 뛰어나다 말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레스를 쉽게 보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었다.
심지어 그리드조차도 아레스의 실력과 수완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레스를 우습게 본다는 것은 즉, 그리드 자신을 제외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를 하찮게 본다는 뜻과 일맥상통 했기에.
-국가대항전에서 활약하셨던 모습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리드의 음성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꽤 긴 세월 교류해오지 않았나.
두 사람이 직접적으로 만난 횟수는 적어도, 개인적인 감정은 꽤 좋은 편이다. 비슷한 위치이기에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교감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게다가 템빨국과 발할라의 군사협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템빨국 1군단 소속 병사 중 <특성>을 개화하거나 부분적인 <한계돌파>를 겪은 정예는 대부분 발할라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온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의 특성을 인위적으로 개화시키고 스탯을 한계돌파 시키는 일.
그건 여태껏 수많은 병사들을 육성해온 피아로와 아스모펠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
본래라면 병사 스스로 깨달음을 얻거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기적.
그것을 인위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 인물은 세상에 오직 단 한 명, 군신 아레스뿐이었다.
오직 그리드만이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만드는 기적을 행사하듯이.
-내 활약? 새로운 역사를 썼던 자네의 활약상들과 비교하면 굼벵이가 구르는 재주에 불과하지. 그건 그렇고 오래간만에 목소리 들으니 좋구만. 콜라에 청량감이 더해지는 것 같아. 으하하!
템빨국과 발할라의 군사협력은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협정이 아니다.
템빨국 또한 발할라를 돕는다. 발할라의 정예는 템빨국산 아이템을 무장하고 있다.
물론 양국은 적절한 선을 지켰다. 서로에게 진심전력으로 협조하진 않았다.
발할라는 템빨국 병사들을 ‘적당히’ 훈련시켜줬을 뿐이고, 템빨국은 발할라 병사들에게 ‘적당한’ 무구를 ‘정당한’ 가격에 판매했을 뿐이다.
한때 아레스는 템빨국과 진정한 우방이 되기를 꿈꿨으나 현실의 벽이란 그리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외교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다. 수장의 독단으로 정치적 노선을 결정지을 순 없다.
더군다나 아레스는 네임드 NPC들을 가신으로 거두기 위해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커다란 대가를 지불했다. 지불한 대가의 내용 중에는 가신들의 ‘꿈’을 이뤄주겠노라는 약조 또한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꿈의 내용이란 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곤 했다.
아레스가 거둔 네임드 NPC들은 대부분 사하란 제국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
네임드 NPC 상당수가 제국 소속이거나 제국으로부터 뭔가를 빼앗긴 전력이 있는 이들이었던지라.
-종종 연락드리고 싶었지만... 불편해 하실 것 같아 자제했습니다.
-으음, 나 또한 자네가 불편할까 자중해왔다네.
템빨국과 발할라는 서로 협력하되 경계했다.
양국이 서로를 마냥 신뢰하지 못하고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크게 2가지다.
발할라 입장에서는 템빨국의 ‘대장장이 독점 사건’이 거슬렸고, 템빨국 입장에서는 사하란 제국과 적대하는 발할라의 외교가 골치였다.
하지만 양국 모두 속내를 대놓고 표출하진 못했다.
전국의 대장장이들이 템빨국으로 몰려 간 이유는 템빨국이 그들을 의도적으로 현혹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와 함께하길 바랐을 뿐이다. 한데 그걸 무슨 염치로 템빨국에게 따지겠나?
대장장이들을 독점하게 된 템빨국이 아이템 시세를 조작해서 타국에 바가지를 씌우긴 했지만, 적어도 발할라에겐 그러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발할라와는 정당하게 거래했다.
템빨국 또한 사하란 제국을 적대하며 국경에서 꾸준히 전쟁을 일으키는 발할라를 제지 할 명분이 없었다.
4황자 에단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발할라는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에게 역이용 당해 제국을 침략했다가 실패하고 대규모 피해를 입은 전력이 있다. 원한이 깊었다.
게다가 발할라는 제국과 적대하는 세력들을 흡수하며 제국을 명분으로 삼아 발전해온 국가다. 태생적으로 제국과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에단의 반란 사건 이후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바사라와 그리드가 화친을 맺었다고 해서 그 관계를 발할라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오늘 용기를 내어 자네에게 연락 한 이유는... 예상했겠지만 인마대전 때문일세.
수년 전.
서열 제22위의 대악마 베리드가 지상을 침공했을 당시.
최강을 꿈꿨던 아레스 군단은 자신감이 넘쳤었다.
베리드에게 위축되지 않고 호기롭게 도전했다.
그럴만한 자격이, 그들에겐 있었다.
하지만 무참히 패배했다.
아레스 군단은 맛 좋은 사냥감이라고 믿었던 베리드의 생명력을 고작 절반밖에 깎지 못하고 궤멸했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겪은 패배는, 아레스 군단의 근간을 휘청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모멸감을 안겼다. 떨쳐내기 힘든 회의감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때 아레스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리드가 아님을.
내 동료들은 템빨단원들처럼 강인할지 몰라도, 나는 그리드와 달라 그들의 버팀목이 될 수가 없음을. 일찍이 그리드에게 마스터의 자리를 양보했던 지슈카의 심정을 뒤늦게 이해했다.
-내 입으로 직접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발할라도 꽤나 강해졌다네. 고작 내 밑에 있기엔 아까운 인재들도 수두룩하지.
지옥의 군주가 얼마나 강대한 존재인지, 그 힘을 실감한 뒤부터.
아니, 그리드와 템빨단을 목표로 삼았던 순간부터 아레스의 열정은 극한의 상태를 유지했다. 대륙 각지를 떠돌며 인재들을 끌어 모았고 그들과 함께 합을 맞춰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리드, 우리가 자네의 발목을 붙잡을 일은 없을 걸세. 하니 인마대전 기간 동안 우리를 이끌어주게. 최대한 협력하겠네.
아레스 군단은 유능하다. 템빨단원들이 그렇듯, 그들 또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귀중한 경험으로 삼아 학습한다. 그러므로 인마대전의 심각성을 눈치 챘다. 모든 인류가 협력해야 할 시기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당연히 리더가 누구여야 하는지도 알았다.
-제국과 화친을 맺으라면 맺겠네. 새로운 황제는 유능한 인물이니 화친을 거절하진 않겠지.
-아레스...
그리드는 더 이상 인정에 목마르지 않다. 오히려 받들어지는 것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아레스 군단이 명문 중의 명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류들만 모인 집단. 전도유망한 만큼 콧대 또한 높은 그들이 내게 등을 맡기는 것을 넘어서 운명을 맡기려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내게 당신들을 이끌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문 따위 품지 않는다.
한 번쯤 마다하는 겸손도 굳이 부리지 않았다.
그리드는 스스로가 인류의 등불임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지옥에서 그리드와 사도들이 활약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옥이 33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서로 협력하지 않는 대악마들이 각자 고립되어 있으니 각개격파하기 쉬웠다.
하지만 인마대전에선 다를 것이다.
파그마의 과거에서 보았던 광경처럼, 놈들은 하나의 군대로 뭉칠 공산이 컸다. 놈들이 인계에서 페널티를 입는다는 점을 감안해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 명백했다.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차에 아레스 군단의 합류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나 다름없었다.
-으하하! 세상에 이토록 듬직할 수가 있나. 곧 우리 군사께서 라인하르트에 도착하실 걸세. 자네와의 대화가 잘 마무리 될 거라고 예상하고 먼저 출발하셨거든. 지모가 라우엘 못지않아 필시 도움이 될 테니 중용해주었으면 좋겠어.
-아레스 당신은 안 오시는 겁니까?
-나도 출발해야지. 하지만 치안대를 제외한 모든 병력을 이끌고 갈 거라 행군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네. 도착이 좀 늦을 것 같으니 이해해주시게.
-본토를 비워도 되는 겁니까? 만에 하나 악마들이 발할라에 침공했다간 백성들이...
-군사께선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 대규모 악마군단이 이용할 수 있는 지옥문은 번헨 열도나 무저갱, 반드시 둘 중 한 곳에서 열릴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야. 나는 그를 믿네. 그 양반, 대기만성형이었거든.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라우엘과 스틱세이도 똑같은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아레스의 군사가 그들과 비교해도 못할 것 같지 않았다.
***
드륵! 드르르르륵!
사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이 격랑을 일으킨다.
10마리의 소가 합세해도 움직이지 못할 거대한 쟁기를, 사내는 이를 악 문 채 이끌어 밭을 갈고 있었다.
쿠웅!
발끝에 실리는 무게가 무도가들의 궁극기인 천근추를 연상시킨다. 선명하게 갈라진 허벅지 근육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쟁기에 파헤쳐진 흙에 스며들 때마다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모르페우스의 예측을 몇 번이고 뒤집어엎은 끝에 극한까지 단련 된 농부의 육체를 얻은 이 사내는, 밭을 가꿀 때마다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축제...? 맞나?”
잠시 쟁기를 내려놓고 자신이 만든 밭의 풍경을 흐뭇하게 감상하던 사내가 미간을 나른히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모험가들이 인마대전을 운운하며 들뜬 모습을 보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아니면 요즘엔 대악마도 별거 아닌가?’
<오러 마스터>이자 <강철 농부>인 휴렌트.
세컨드 클래스 외에도 무려 31개의 칭호를 보유하고 있는 기적의 5인방 중 하나.
한때 지발과 함께 미국의 영웅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거물이지만 속세를 떠난 지 오래다. 몇 년 전부터 템빨단에 합류하긴 했지만 누구도 그에겐 별도의 임무를 내리지 않았다. 덕분에 템빨단에 가입하기 전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농부의 삶을 누렸다.
휴렌트는 여전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다. 관심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밭에서 ‘룬’을 찾는 것이었기에.
‘여기도 꽝이군.’
오러를 이용해 바람이라는 현상을 빚어낸 휴렌트가 몸에 묻은 땀을 털어냈다. 그리고 강철 농부의 고유 스킬 <성장 강화>와 결합시킨 오러의 비를 내려 ‘열흘 전까지만 해도 황무지’였던 광활한 논밭의 토기를 강화시켰다.
사용했던 쟁기는 이미 진즉에 빛으로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쟁기 또한 오러로 만든 것이었다.
쏴아아...
빗줄기가 강해질수록 푸른 새싹들이 빠르고 튼튼하게 자라났다. 밭을 망치는 몬스터의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본래 이 땅에 득실거리던 몬스터들은 휴렌트의 오러와 농기(農氣)를 두려워했으니.
“시발 왜 몬스터가 없지...?”
“길 잘못 든 거 아니야? 원래 밭이 있을 곳이 아니잖아?”
모험가들의 당혹이 느껴졌지만... 휴렌트가 신경 쓸 계제가 아니다.
‘음... 다음 장소는 어디로 옮길까.’
오늘도 찾지 못한 룬을 아쉬워하며 휴렌트가 고민하는 그때였다.
“저기요, 아저씨. 혹시 몬스터 못 봤어요? 분명 예전엔 여기서 데빌 아이를 봤었는데.”
“데빌 아이는 그냥 괴물이 아니고 마물이네만.”
이곳에 처음 온 날 마주쳤던 눈깔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린 휴렌트가 모험가들의 상태를 눈으로 흘기며 대꾸했다. 신성력이라곤 1도 없는 그런 평범한 장비로 데빌 아이와 싸울 생각이었느냐고 타박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마물인 걸 누가 몰라요? 곧 인마대전이 열릴 거라 대비할 겸 연습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거예요.”
“북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나아가 보게. 거긴 아직 데빌 아이들이 남아있을 테니.”
“헉, 머네...? 내 기억이 잘못 됐었나? 아무튼 고마워요.”
“저 아저씨 뭐야? NPC야, 플레이어야?”
“이런 오지에서 혼자 농사 짓는 사람이 설마 플레이어겠냐? 당연히 NPC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인마대전이란 말을 알아 듣잖아. 오지에서 혼자 사는 농부가 인마대전을 어떻게 알아?”
“템빨국이 대륙 모든 국가에 인마대전 관련 공문을 보냈대. 템빨국의 말이니까 각국 왕들도 당연히 의심하지 않았을 테고, 백성들에게 관련 소식을 전파했겠지.”
“어휴... 설마 인마대전 때 NPC들까지 숟가락 얹으러 오는 거 아니냐?”
“...”
차츰 멀어지는 모험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휴렌트는 생각했다.
저런 초보자들도 인마대전을 기대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대악마의 위용이 예전만 못한가 보다고.
참고로 방금 전 모험가들의 평균 레벨은 300 후반.
상위 랭커들이었다.
브라함과 부대끼다 보니 안목이 너무 높아진 휴렌트의 눈에만 초보로 보였을 뿐.
‘이번엔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 스승님께서도 룬은 오지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참에 차라리 금지(禁地)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군.’
밀짚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 쓴 휴렌트가 질풍처럼 사라졌다.
보다 크고 훌륭한 논밭을 만들 때마다 상승하는 스탯 덕분에 그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리드가 직접 공인한 템빨국의 비밀병기다웠다.
휴렌트 본인에겐 자각이 없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