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14화
머잖아 인마대전이 열릴 것이다.
S.A그룹의 고위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알린 소식이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세상이 온통 축제 분위기다.
드디어 Satisfy도 플레이어를 위한 대규모 이벤트를 진행하는 거냐며. 이제야 강호의 도리가 바로 섰다며.
곧 다가올 학생들의 방학 시즌에 맞춰서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추측들이 잇따랐다.
템빨국엔 비상이 걸렸다.
템빨단원들은 악마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두려워했고, 준비했다. 마치 긴 겨울을 앞둔 것처럼.
“이벤트는 개뿔. 어떻게 봐도 줄초상 치를 각인데 왜 아무도 모르는 거야? S.A한테 몇 번을 더 당해봐야 세상에 둘도 없이 사악한 기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각심을 품을까.”
“평범한 유저들이 S.A를 나쁘게 생각하긴 어렵죠. 밸런스의 희생양이 되는 건 늘 상위 길드나 랭커들이었으니. 그보다 인마대전이 도대체 언제 열리는 건진 아직도 파악 못 했어요?”
“안팎으로 조사 중인데 단서가 전혀 없어. 이쯤 되면 S.A가 마냥 노심초사하라며 일부러 정보를 푼 것 같다니까? 숫제 고문이야, 고문. 근데... 병사들 훈련 상태가 왜 저래? 3군단 이하 병사들은 수준이 너무 낮은데?”
“훈련이 문제가 아니라 재능이 문제에요. 스탯 한도치가 워낙 낮잖아요. 재능 있는 병사들은 죄다 1, 2군단에서 차출해 가는 마당에 그 외 군단에서 수준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죠.”
“스탯 한도치까지 성장시킨 게 고작 이 정도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훈련이 문제지 재능이 문제냐? 투정을 부릴 거면 일단 한계까지 성장을 시킨 다음에 부려!”
버럭 소리치는 토반이었지만 사실 그도 쉬운 일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재능(스탯 한도치)이 낮은 NPC일수록 성장속도도 더딘 법이니까.
하지만 힘들어도 해야 한다.
지금 시국이 그렇다.
“로이먼한테 말해서 교관 역할 맡을 상급기사들 차출해줄게. 휴고 네가 직접 기사들 총괄하면서 훈련 일정 진행해줘.”
“네.”
L.T.S시절부터 체다카 길드원들과 함께해온 템빨단원 휴고.
직업 랭킹 3위, 통합 랭킹 120위의 괴물이면서 템빨국의 권력과 그리드의 템빨까지 무장하고 있다.
어딜 가나 만인지상으로 군림할 거물인 것이다.
하지만 토반에겐 여전히 깍듯했다.
지슈카, 레가스, 페이커 같은 천재들을 보고 느낀 열등감을 감당 못해 은퇴하려고 했을 때 그를 붙잡고 이끌어준 사람이 다름 아닌 토반이었으니까.
“너도 천재야. 쟤들은 괴물일 뿐이고. 너보다 못한 나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네가 왜 포기를 하겠다는 거야?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고? 개소리. 버티긴 왜 버텨? 그냥 즐겨. 네가 게임을 했던 이유가 뭔데? 재밌어서 아니었어? 이건 아직 소문일 뿐이지만... 업계에 있는 지인에게 듣기로 머잖아 가상현실게임이 나올 확률이 높아. 그때까지 초심을 되찾고 천천히 실력을 쌓자. 부자 돼야지. 우리도 월드스타 한 번 돼 봐야지 않겠냐?”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때 토반이 내밀어준 손을 붙잡지 않았다면, 나는 Satisfy에서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아니, 혼자서는 결코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거다.
내 성공의 절반은 체다카 길드에 속한 덕분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리드를 만난 덕분이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토반에게 부채의식을 갖고 있단 뜻은 아니다.
토반이 평소에 휴고를 멋대로 부려먹는 일도 없었다. 토반은 휴고를 동료로서, 동생으로서 존중하고 아껴줬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템빨국 군사부 2인자의 권한을 마음껏 휘둘렀다.
현재 템빨단은 템빨국의 모든 백성에게 군사훈련을 시켜야하는 게 아니냐고 논의할 정도로 날이 선 상태였으니.
템빨국 사령관 중 몇 안 되는 플레이어인 휴고는 인마대전을 대비하는 기간 동안 구를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어휴 S.A 이 개자식들.’
성장 잠재력 낮은 병사들.
Satisfy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NPC 출신들이다.
원래라면 경비부대 정도에 배치 될.
한데 이들을 마물과 맞서 싸울 정예군대로 만들라고 한다.
물론 그리드의 템빨이 서포트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휴고는 눈앞이 깜깜했다.
***
‘이놈 이거 생각보다 더 쓰레기였구나.’
그동안 템빨단원들에게 익히 듣긴 했다.
갈구노스의 사원은 성스러운 외관으로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유인하고, 사냥하고, 시신을 언데드로 일으켜 노역시키는 악마의 소굴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아이들까지 건드렸을 줄은 몰랐다.
“...”
어린 해골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리드의 얼굴에 짙은 혐오감이 피어오른다.
그의 한숨에 깃든 망설임을 엿본 걸까.
템빨골2가 대신 나섰다.
리치답게 모든 속성의 마법을 섭렵하고, 특히 공간계 마법과 흑마법에 한해선 전설급 대마법까지 구사할 수 있게 된 템빨골2. 녀석이 새카만 마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어린 해골 병사들에게 안식을 선사한다.
[네놈...! 무슨 짓이냐!!]
갈구노스의 혼이 버럭 소리쳤다. 떨리는 음성에 깃든 노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장 튀어나와 그리드와 템빨골2의 멱을 딸 기세였다. 실제로 그랬다간 도리어 자신의 멱이 따였겠지만.
[성장의 각인을 새겨놓은 아이들을 소멸시키다니...!]
“성장의 각인?”
[망자를 성장시키는 비술이다. 아직 어린놈들에게만 적용 가능한 반쪽짜리 비술에 불과하지만...! 수백 년을 공들여 단 3개밖에 만들지 못한 것인데...!]
갈구노스의 실험실.
사원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이다. 왕좌 뒤에 숨겨진 비밀통토로만 입장할 수 있는.
템빨골2가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는 갈구노스의 기억을 뒤져 발견한 곳인데 지슈카와 유페미나도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던 것 같다.
“그딴 걸 왜 만들었지?”
[우문이구나. 세상엔 모종의 이유로 단명하는 자들이 우주의 별처럼 많다. 너 같은 왕들이 일으킨 전쟁에 휘말려서, 타고난 몸이 병약해서, 혹은 나 같은 악인을 만나는 등의 사고를 겪어서... 그런 식으로 일찍 죽은 놈들 중에 천재가 없었을까.]
“...역겨운 놈.”
단명한 천재들을 찾아 유해를 발굴하고(혹은 직접 죽여 시신을 공수해서), 언데드로 만들고, 성장시켜 최강의 노예들을 만들 계획이었나.
그리드는 마(魔)에 속하는 존재들이 대부분 끔찍한 놈들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마리로즈와 레라지에처럼 나름의 정도를 걷는 마인은 지극히 드물 터였다.
‘이놈은 끝까지 경계해야겠어.’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갈구노스는 노괴 중의 노괴였다. 어쩌면 고대부터 존재하며 오로지 힘을 갈구하고, 타인을 희생시켜 신격을 쌓아왔던 놈이 어느 날 갑자기 착해질 거라고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일까요.]
그리드의 심정을 헤아린 템빨골2가 진지하게 묻자 갈구노스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허튼 짓 못하게 철저히 감시하며 이용해먹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게끔.
“됐어. 시작해.”
[예.]
실험실을 나선 템빨골2가 반쯤 무너진 왕좌 앞에 섰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 주인 잃은 사원에 잠들어있는 망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너희들의 새로운 주인이다.]
생전부터 갈구노스를 신처럼 섬겼던 자들.
죽어서는 사원을 찾아온 모험가들을 속이고, 죽여 갈구노스를 위한 군대를 양성해온 1마리의 데스나이트와 30마리의 스켈레톤 워리어, 그리고 20마리의 스켈레톤 메이지가 템빨골2 앞에 무릎 꿇었다.
하나 같이 비범한 기운을 내뿜는 녀석들이었다.
특히 ‘레이지’라는 이름의 데스나이트는 사원에서 중간 보스 역할을 담당했던 놈답게 레벨부터 높았다. 무려 500. 스탯 각성을 5차까지 했다.
[템빨골2가 신화 <죽은 자들의 사원에서...>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지배력 스탯이 20퍼센트 상승하고 네크로맨서 관련 마법들의 성능이 10퍼센트 강화됩니다.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얻은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통솔할 시엔 지배력을 소모하지 않게 됩니다.]
[템빨골2가 신위 스탯을 개방합니다.]
‘정말로 신격을 쌓을 줄이야.’
물론 어디까지나 갈구노스의 사원에서만 알아주는 신격이다. 아직 미약한 격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시작은 미약한 법 아니겠나.
그리드의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번졌다.
반면 템빨골2는 아직 제대로 실감이 안 나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주인이시여.]
앞으로 자신이 이끌게 될 군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템빨골2가 그리드 앞에 무릎 꿇었다.
[감히 청하건대 저의 형제를 불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녀석.’
이 기쁨을 템빨골1과 나누고 싶은 눈치다.
그리드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딱! 딱딱딱!!
템빨골1이 그리드 발치의 땅을 헤집고 나타나 몸을 일으켰다.
[...]
이젠 템빨골1을 내려다보게 될 정도로 키가 커진 템빨골2가 자신의 형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템빨골1의 표정이 심히 불편해보였지만, 그리드는 둘이 포옹이라도 나눌 줄 알았다.
감격에 겨워 잠시 잊은 것이다.
‘파괴’의 권능을 지닌 템빨골1이 ‘수복’의 권능을 지닌 템빨골2를 장난삼아 때리고, 부쉈던 과거의 장면들을.
빠각!!
템빨골2가 형제의 뒤통수를 가차없이 후려치자 템빨골1의 두개골이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딱?
당황하는 게 보일정도로 템빨골1의 안광이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템빨골2는 멈추지 않고 템빨골1을 몇 대 더 두드려 팼다. 그러다가 템빨골1의 몸이 완전히 산산조각나기 직전에 수복시켜 다시 부수길 반복했다.
딱... 딱딱딱...
처음엔 저항하던 템빨골1이 이내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엉덩이를 세우고 엎드려선 두 눈을 엑스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제야 방긋 웃은 템빨골2가 템빨골1의 커다란 두개골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발이 자꾸 움찔하는 걸 보아 지금 당장 춤을 추고 싶은 듯했다.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제와 목소리 깔고 말해봤자 안 멋있다고...
한숨 쉰 그리드가 템빨골1을 달래주었다. 너도 언젠간 멋진 몸을 갖게 될 거라고 위로해주자 뒤늦게 서러움이 복받쳤는지 울먹이는 템빨골1이었다.
만약 메르세데스가 이 광경을 봤다면 품에 안고 위로해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신세가 처량했다.
“할 일이 태산이니 어서 돌아가자. 빨골2는 가자마자 아까 준 일기장부터 읽고.”
그때였다.
-그리드, 잘 지내나? 하하하!
귓속말이 날아왔다.
의외의 인물이었지만, 당황은 잠시였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으로 연락해왔는지 눈치 챘기 때문이다.
인마대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그에 대비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인물.
상대방은 세상에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기에.
-오랜만입니다, 아레스.
인마대전이 열릴 거리는 소식을 들은 이후 무겁게 가라앉았던 그리드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템빨신 그리드와 군신 아레스의 협력은 바알의 계약자 시절 파그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파급력을 자랑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