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12화
갈구노스가 신격화 된 리치라고 해봤자 그의 세계는 작은 사원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 사원에서조차 끄집어내졌다. 몇 안 되는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슈카와 유페미나라는 신생 전설 ‘따위’에게 짓밟히고 격을 훼손당했다.
템빨골2의 몸을 빌려 부활했다고 해봤자 힘이 온전할 리 없는 것이다.
설사 온전했을지언정 무의미하다.
그리드라는 이름이 새겨진 이 거대한 세계에서 그는 미천하고 비루한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결론은, 그리드의 승리는 처음부터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뜻이다.
유페미나 또한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쉽게 끝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갈구노스의 강함은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치열하고, 위기와 반전이 반복되는 명승부가 펼쳐질 거라고 추측했었다.
근데 이건 무슨...
“...허무해 뭐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유페미나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녀는 천재다. 하지만 천재의 슬기와 감각으로도 그리드의 선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갈구노스를 압도한다는 건, 천재의 영역에서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드는 자신이 갈구노스를 압도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페미나 입장에서야 이 승부가 허무하게 느껴졌지 그리드 입장에선 치열한 전투였다.
‘생각보다 힘든 상대였다.’
이정의 수련도구 세트를 처음부터 벗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그리드는 리치 갈구노스를 강자라고 인정하고 인식하되 자신보단 하수라고 확신했었다.
한데 공간 왜곡이라는 변수가 있던 것이다.
‘공간 왜곡... 말로만 들었을 때는 감이 잘 안 잡혔었는데 정말 엄청나군.’
갈구노스는 격을 훼손당했을 뿐만 아니라 템빨골2의 육체를 빌린 탓에 레벨이 격하된 상태였다. 육체의 ‘질’ 자체는 올랐을지 몰라도 성장도는 도리어 떨어진 셈이다. 게다가 리치 갈구노스 시절에 애용했을 장비들도 모두 잃은 상황이었다.
한데 낙월검에 아이템 합체까지 연계하고 나서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예상대로라면 훨씬 더 쉽게 박살내고 몰아붙였어야하는 건데, 여러 유리한 조건들에 비해 압도하지 못했다.
‘공간 왜곡이 사기...’
원인을 분석하며 눈살을 찌푸리던 그리드가 곧 거짓말처럼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었다.
8등신이 되면서 신장도 커진 템빨골2.
이제 그리드와 눈높이가 같아진 녀석의 눈웃음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절로 풀어졌다. 기대감도 컸다.
템빨골2는 갈구노스의 힘을 어디까지 흡수했을까.
[나는... 나는 진 게 아니다... 다만 시기가 적절하지 못해 잠시 물러난 것일 뿐...]
이제는 템빨골2의 핵이 된, 전(前) 갈구노스의 핵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아 부여로 각인 된 갈구노스의 음성이었다.
놈의 핑계를 귓등으로 흘린 그리드가 템빨골2의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이름:템빨골2
레벨:430
레벨까진 좋았다.
그래도 명색이 신격까지 쌓았던 리치를 흡수한 여파로 한번에 4차 전직을 달성하고 30개의 레벨을 추가로 얻었다. 기대 이상의 성장이었다.
하지만 클래스명은 심히 실망이었다.
직업:공간을 왜곡하는 댄싱 리치
“...”
공간 왜곡의 권능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식언이 붙은 건 매우 기쁘고 멋진 일이었지만 댄싱 리치는 뭐란 말인가.
물론 템빨골들이 춤추는 걸 좋아하는 덕분에 도발의 귀재가 된 걸로 모자라 검무도 출 수 있다지만...
‘...좀 없어 보이잖아.’
사실 리치킹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5차 전직쯤엔 그렇게 되려나.’
뭐, 클래스명 따위가 무슨 상관이랴.
이어서 템빨골의 스탯과 스킬 목록을 확인한 그리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일단 스탯의 수치부터 변화가 있었다.
근력과 민첩성은 여전히 낮았고 체력 비율은 오히려 전보다 떨어졌지만 대신 4천 8백의 지력과 2천의 통찰력을 얻었다. 통찰력이 2천이나 되면 어지간한 속도전에선 밀리지 않을 동체시력과 상황 파악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 고작 그 정도로 표현해선 안 될 듯하다.
NPC의 지력은 지능과 비례하니까.
높은 지력(지능)과 통찰력의 시너지가 초월적인 전술과 전략의 구사를 가능케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능력이 더 빛나라고 통솔력 스탯까지 개방 된 건가?’
안목.
흐름을 관통하는 통찰이 그리드에게 더해지고 있었다.
템빨골2의 변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변화의 이유를 추론한다. 템빨골2를 단순한 리치가 아닌 지휘관이나 책사로 활용할 방법을 벌써부터 강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레벨당 얻는 스탯 포인트는 12개... 격에 비하면 조금 낮은 느낌이지만 합리적인 수준인가.’
굳이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너무 낮은 체력 스탯.
하지만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언데드는 지치지 않으며 리치의 마력은 무한하니까.
실제로 템빨골2에게는 ‘마나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생겼다. 이에 따라 <마나 실드>의 가치가 대폭 상향됐다. 부족한 체력은 마나 실드로 대체하면 그만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마나가 고갈되지 않는다는 저 사기적인 특성이 리치 클래스의 ‘기본 특성’이라는 점이다.
갈구노스의 유해와 핵을 흡수한 템빨골2의 가장 큰 강점은 무엇보다도 <촉매 생성>과 <공간 왜곡>의 가능에 있었다.
<촉매 생성>Lv.2(숙련도 축적 불가)
패시브 스킬
공간계 마법에 소모되는 촉매제를 자동으로 생성합니다.
속성계 마법에 소모되는 촉매제를 자동으로 생성합니다.
마법 자원 소모:마나 2,000~26,000
마법 캐스팅 시간:없음
재사용 대기 시간:없음
<공간 왜곡>Lv.마스터
지정한 지점의 공간을 왜곡시켜 활용합니다.
마법 자원 소모:마나 20,000. 호란-디아, 셀-티로브.
마법 캐스팅 시간:2초
재사용 대기 시간:3초
‘자원 소모가 말도 안 되게 크기 때문인가.’
촉매 생성이야 어디까지나 보조 마법이니 차치하고, 공간 왜곡 마법의 캐스팅 시간과 쿨타임은 굉장히 의외였다.
한 계열의 극의가 이토록 소탈한 제한을 갖고 있을 줄이야.
단점은 자원 소모량이 무척 크다는 건데, 리치에겐 적용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갈구노스는 공간 왜곡에 각인을 더해서 몸에 두르고 있던 거군...’
그리드가 템빨골2의 또 다른 마법 정보를 확인했다.
<주문 각인>Lv.5(숙련도 축적 불가)
패시브 스킬
발현한 마법이 아직 효과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마법의 형상을 유지합니다.
최대 20개의 마법을 각인 가능.
갈구노스의 백골에 새겨진 술식이 일으키는 마법.
알람 마법의 상위 호환이다.
알람 마법은 마법을 미리 캐스팅한 후 발동 타이밍을 직접 설정하고 예약해야 하는 반면, 주문 각인으로 미리 캐스팅한 마법은 발동 조건이 훨씬 자유롭다.
‘아니, 알람 마법의 상위라고 보는 건 적절하지 않아. 알람 마법엔 횟수 제한이 없으니까.’
게다가 알람 마법도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적재적소에 발동시킬 수 있다. 사용자의 역량이 높을수록 주문 각인보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드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지만.
템빨골2의 정보를 한참 동안 확인하며 정리해 본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빨골아.”
딱! 딱딱딱!
“턱 부딪치지 말고 말을 해, 말을.”
[예... 주인이시여...]
‘오오...!’
몇 년째 딱딱 거리기만 하던 녀석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리드는 묘한 소회를 느꼈다. 장성한 자식을 보는 기분이랄까.
[주인님과 대화할 수 있어 기쁩니다.]
템빨골2 또한 큰 감동을 느끼는 눈치였다. 안 그래도 다채로운 표정에 어떤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목소리 멋지다.”
[이 또한 주인님의 선물. 감사할 따름입니다.]
굵고 낮은 목소리가 동굴에서 울리듯 퍼지니 진중하고 포스가 있다.
말에 무게를 싣는, 그런 목소리였다. 염룡검의 <거짓 용언>이 떠오를 정도.
“갈구노스의 자아가 종종 반발할 때가 있을 거야. 우선은 녀석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걸 목표로 삼자. 몸에 각인 된 마법들하고 공간 왜곡 활용에 적응하려면 녀석의 도움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
[예, 주인이시여.]
[흥, 누구 멋대로 나를 통제...]
[닥쳐라.]
[이 건방진...]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함부로 지껄이면 네놈을 소멸시킬 것이다.]
[...]
갈구노스의 핵은 아이템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지슈카와 유페미나가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고 그리드의 손까지 들어오게 된 거다.
삶에 대한 집착인지, 신격에 대한 집착인지 명예로운 죽음보다 연명하기를 선택한 갈구노스.
자아부여를 받아들여 핵에 봉인 된 시점부터 놈의 생사여탈권 완전히 그리드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놈의 속내가 무엇이든 그리드의 허수아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협조적인 태도를 바라려면 꽤 고생해야 할 거라고 각오했었는데... 템빨골2가 알아서 잘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 한숨 놓였다.
‘레벨도 올랐으니 새로운 장비부터 만들어줘야겠어. 빨골이가 지금 신체와 새로 얻은 마법에 완전히 적응하면 그때 가서 갈구노스의 자아를 장비로 옮겨주고... 아, 그러고 보니?’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리드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적응 기간 동안 사원을 가보는 건 어때?”
[갈구노스의 사원 말씀이십니까.]
“그래, 녀석의 유산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놈을 섬기던 신도들이 너를 따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훌륭한 조언입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탱고는 왜 추냐.”
객관적으로 봤을 때 템빨골2는 굉장히 멋져졌다.
검게 번지는 마력을 망토처럼 두른 크고 탄탄한 백골. 무게감 있는 음성이 곁들어져 분위기가 사는 붉은 안광. 흐트러짐 없는 자세 등등.
그런 모습으로 다짜고짜 탱고를 추자 솔직히 좀 깨는 감이 있었다.
[주인님의 식견에 탄복하고 기쁨을 느낀 나머지 그만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주인님께서 추지 말라 하시면 앞으로는 꼭 필요할 때만 추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드와 템빨골2가 뒷일을 수습하고 상황을 점검하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족히 30분은 흘렀다.
그 동안 망부석처럼 잠자코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페미나가 갑자기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드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단련실의 조명보다 밝은 빛이 그녀의 커다란 눈에 깃들어 있었다.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뭘?”
“오빠는 천재가 아니야.”
“...”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심지어 그리드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드를 두고 ‘노력의 천재’라는 말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건 그리드가 지존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해 끼워 맞춘 억지에 가까웠다.
정작 그리드는 공감하지 못했다. 물론 노력을 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자부심까지 품었지만 천재라는 단어는 여전히 낯설게 느꼈다.
그걸 뭘 새삼스럽게...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그리드의 커다란 두 손을 유페미나가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그리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가. 오빠는 대가에요.”
천재는 타고난 재능에 의지한다. 어떤 이치를 봤을 때 남들보다 쉽게 이해하며 대부분의 영감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는다. 다른 현상이나 개념을 보고 영감을 얻을 때도 많지만 타인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유페미나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자신이 그리드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어째서 자신이 그리드로부터 영감을 얻어왔는지.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다.
비교적 평범한 재능을 열정과 노력으로 극한까지 단련한 인물.
그리드는 대가다. 천재와는 결이 달랐다. 그래서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고(내가 아직 대가가 아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던 것이다.
“크라우젤도 아마 그래서 오빠를 특별하게... 존경해요.”
“...”
다짜고짜 열렬한 시선을 보내며 낯 뜨거운 멘트를 하는 유페미나.
얼마 전이었으면 민망하고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얼굴을 붉혔을 그리드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느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내심 눈치 챘기 때문이다.
계기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오직 크라우젤과 나눴던 유대를 페이커에 이어 유페미나와도 나누게 된 것이다.
‘다들 변하는구나.’
칸과 브라함 등의 좋은 인연들을 만난 덕분에 여태껏 쭉 홀로 앞서갈 수 있었던 그리드가 드디어 다른 사람들의 성장을 체감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리란 사실을. 지옥과 천상을 마냥 두려워할 날도 머지않았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