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11화
[<갈구노스의 영혼>이 당신의 부름을 감지하였습니다. 무시합니다.]
‘됐다.’
키야아아아악!!
지금 막 템빨골2의 몸을 차지한 갈구노스.
놈을 자아 부여의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드가 빠르게 움직였다.
갈구노스의 유해에 깃든 마력을 제어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템빨골2를 그는 돕지 못했지만, 갈구노스에게 역으로 몸을 빼앗긴 템빨골2는 도울 자신이 있었다.
이제부턴 그냥 쥐어 패면 되니까.
그리드는 갈구노스가 차라리 죽길 바랄 정도의 고통을 안겨줄 계획이었다. 템빨골2의 몸을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자아 부여로 회유할 것이다. 그것이 유혹으로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몰아붙여서.
스릉!
<갈구노스>
템빨골2의 머리 위에 휘황찬란하게 떠오른 이름이 그리드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느새 갈구노스의 코앞까지 다다른 그가 발검과 동시에 살의 검무를 꽂았다.
그 과정을, 유페미나는 일부 놓쳤다. 그녀의 눈엔 그리드의 움직임이 뚝뚝 끊겨 보였다.
‘빨라...!’
무무드의 후예도 결국은 마법사다. 유페미나는 민첩성이 낮았다. 하지만 복제술사 시절부터 단련하고 축적해온 통찰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동체시력에 상당한 보정을 받았다. 그녀의 최대 강점 중 하나였다.
한데 그리드의 움직임을 놓쳤으니 꽤 큰 충격에 휩싸였다.
진짜 놀랄 일은 따로 있었지만.
스카앙!!
“...!?”
복제술사의 특성과 무무드의 마법으로 분석한 뒤 분해하거나, 지슈카의 파마 화살로 꿰뚫어야만 파괴할 수 있었던 갈구노스의 두껍고 새카만 실드.
보통의 마법과 물리력은 모조리 흡수해버렸던 그것이 그리드의 검격 한 번에 부서지며 마력의 파편을 산란시키는 게 아닌가?
‘공격력이 얼마나 높아야 저게 가능한 거지?’
갈구노스의 실드를 부수려고 지슈카와 고생했던 순간들을 떠올린 유페미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여러 감상이 느껴졌지만, 몸과 머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동시에 3개의 마법을 사용했다.
복제술사의 특성으로 갈구노스를 관찰하고 약점을 분석, 무지갯빛 마력을 개입시켜 분해와 파괴를 유도한다.
트리플 캐스팅.
천재가 도달한 경지였다.
콰드득!!
그리드에게 입은 상처에서 칠흑의 마력을 안개처럼 내뿜던 갈구노스의 몸이 관절의 역방향으로 뒤틀렸다. 신체 모든 부위가 기괴하게 꺾인 채 지하 단련실의 조명을 등지자 비쩍 마른 고목나무의 그림자를 연상시켰다.
무무드식 마법이 마력의 흐름을 역행시키고 육체의 오작동을 유도한 결과였다.
[또... 네년인가...]
안개의 마력으로 그리드에게 역공을 시도하려다가 제지당한 갈구노스의 시선이 유페미나한테 꽂혔다.
새빨간 안광이 분노와 살의를 담고 일렁인다.
그녀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눈치였다.
당연하다.
리치 갈구노스는 이미 한 번 그녀에게 패배했다. 신으로 군림했던 사원에서 끄집어내졌다. 리치의 몸으로 신이 되고자 했던 비원을 이루기 직전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갈구노스는 앞으로 영원토록 유페미나를 원망하고 저주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래선 안 됐다.
갈구노스와 유페미나의 시선이 얽힌 1초.
고작 그 1초 동안 그리드는 수십 회의 검로를 그렸으니까.
콰르르르륵!!
무형검과 연의 조합은 파괴적이다.
수십 개의 검로가 저마다 나선을 그리며 돌풍처럼 휘몰아쳤고 한편에선 ‘인지하기 힘든’ 사각 공격이 쏘아졌다.
단 1초 만에 완성되는 검술. 그건 차라리 어떤 현상에 가까웠다. 재해가 일으키는 현상.
“...!?”
갈구노스를 난도질하던 그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공격의 80퍼센트 정도가 갈구노스의 신체에 닿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진 까닭이다.
‘공간 왜곡!’
공간계 마법의 궁극.
어떤 물체, 현상, 심지어 개념마저도 다른 공간으로 전이시켜버리는 대마법이다.
란스티어의 그림자 이동술과 비슷하지만 한 차원 위였다.
그림자 이동은 사용자 본인의 신체를 다른 그림자로 이동시키는 기술인 반면 공간 왜곡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했으니.
물론 쉽게 쓸 수 없는 마법이었다.
심지어 저 브라함조차도.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호란디아’를 배합해서 만든 촉매가 필요하고 소모되기 때문인데, 그건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무형검을 회수하는 그리드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러고 보니 저놈...’
자신의 뼈에 촉매제 생성 술식을 새겨놨었다.
설마 공간 왜곡을 쓸 수 있는 촉매제를 생성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좋아.’
경악이 기쁨으로 변화한다.
템빨골2가 공간 왜곡 마법을 쓰는 광경이 그리드의 머릿속에 펼쳐지며 의욕을 증폭시켰다.
[너는... 상당히 강하군.]
몇 번이나 베이고도 그리드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갈구노스가 처음으로 그리드에게 말했다.
“너도.”
그리드가 화답하는 순간.
스팟!
갈구노스가 블링크를 사용했다.
놈의 위치는 어느덧 유페미나의 등 뒤.
곧장 순보로 따라붙은 그리드가 갈구노스에게 칼을 박았지만 갈구노스의 마법도 유페미나의 등을 관통한 직후였다.
순보가 모든 상황에서 만능은 아닌 것이다. 상대방이 먼저 공간을 이동한 이상 당연히 한 발 늦을 수밖에 없다.
[파마의 힘을 쓰는 계집만 없으면 네년 따위야.]
울컥,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유페미나의 모습을 보자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는 갈구노스였다. 템빨골과 달리 표정의 변화가 적었지만 지금만큼은 놈의 희열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 새끼 이거 나는 안중에도 없군.’
무시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그리드였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유페미나가 어그로를 끌어주면 이쪽이야 편했으니까. 차분하게 극살을 전개했다.
하지만 갈구노스에겐 2가지 까다로운 부분이 있었다.
첫째, 항시 발동되는 리치의 권능 ‘마나 실드’가 받는 데미지의 상당량을 흡수했고.
둘째, 기껏 마나 실드를 꿰뚫고 들어간 공격 중 상당수가 ‘공간 왜곡’에 씹혔다.
이번에도 하필 극살 중 살이 공간 왜곡에 빨려 들어갔다.
도대체 어디를 다녀온 건지 흙탕물에 흠뻑 젖은 무형검.
그리드가 검을 회수하는 사이. 고작 그 한 호흡 사이에 갈구노스와 유페미나는 치열한 공방을 나누고 있었다. 유페미나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새겨졌다.
촤르륵, 쿵!
촤르륵, 쿵!
갓 핸드에게 유페미나의 호위를 맡긴 그리드가 이정의 수련도구 세트를 벗었다.
또 한 호흡이 흐른 그 짧은 사이에,
콰장!!
“윽!”
유페미나가 새로운 상처를 입었다.
상황이 웃겼다.
그녀가 허공에 격발한 마법이 갓 핸드에게 가로막혀 있었고, 그 탓에 갓 핸드가 경직되었으며, 갈구노스는 쉽사리 유페미나의 빈틈을 찔렀다.
갓 핸드는 읽지 못한 수 싸움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유페미나는 갈구노스의 경로를 예측한 반면 갓 핸드는 예측하지 못해서 도리어 유페미나를 훼방 놓은 격이었다.
“미안!”
수련도구 세트를 벗어 본래의 능력치를 되찾은 것으로 모자라 투기까지 축적한 그리드다. 그의 속도는 그야말로 섬전 같았다.
“에? 이, 이 정도로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유페미나가 당황했다. 그리드가 대체 언제 곁으로 다가왔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들린 방패가 측면으로 쏟아지는 갈구노스의 마법 폭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정말... 차원이 다르네. 서포트 하기도 벅차겠는데?’
갓 핸드의 방해를 받아 반격의 기회를 놓친 유페미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녀가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짙게 웃었다. 화사한 미소 따위가 아니다. 눈빛이 투쟁심으로 이글거렸다.
그 투쟁심이야말로 그녀의 본질이다.
Satisfy 출범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쭉 비공식 랭커계의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했던 거물.
비록 ‘조건부’ 최강자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승부사의 기질을 갈고 닦아올 수 있었던 그녀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마음껏 날뛰어 봐요. 내가 최대한 서포트 해줄게.”
유페미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리드와의 듀오는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임을.
갈구노스는 너무 강한 적이고 그리드의 움직임은 자신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있다.
그리드의 의도를 미리 파악하고 호흡을 맞추는데 성공하여 갈구노스를 쓰러뜨리는 순간, 자신의 실력 또한 한 단계 발전하리라.
“그래.”
그리드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파악하고 있었다.
갈구노스는 보통의 방법으로 쓰러뜨리는 게 불가능하다.
어떤 형태의 공격이든 무려 80퍼센트 확률로 무효화시키는 공간 왜곡 마법과 리치 특유의 무한 마나 실드...
관건은 공간 왜곡과 마나 실드의 흐름을 끊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시 발동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마법을 무슨 수로?
‘지슈카의 파마 화살이 정말 큰 역할을 했었겠군.’
제압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너무 많고 까다롭다. 난이도 극악의 초네임드급 보스다.
갈구노스에게 섣불리 도전하지 않았던 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전해봤자 레이드에 실패했을 확률이 높았을 테니.
물론 어디까지나 ‘이걸’ 만들기 전까지의 이야기지만.
스캉!
무형검을 인벤토리에 넣은 그리드가 염룡검과 낙월검을 동시에 뽑았다.
물 흐르듯 아이템 합체를 연계하자 달빛처럼 시린 불꽃을 너울거리는 한 자루의 장검이 완성되어 그의 오른쪽 손에 쥐어졌다.
쿠와앙!!
초의 검무가 격렬한 기파를 발생시킨다.
펜릴의 망토가 요란하게 펄럭인다 싶더니 단련실의 단단한 지면이 뜯겨져나가며 파편이 부유했다.
그 중심에 검을 늘어뜨린 채 선 그리드의 시선은 격동하는 공간과 달리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렇기에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눈빛이다.
그리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준비 중이던 유페미나조차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지 못해 당황할 정도였다.
[네놈...?]
갈구노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낙월검을 꺼낸 순간부터 안광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한 놈의 반응을 통해 그리드는 눈치 채고 있었다.
‘고대의 존재였나.’
고대의 비술과 지식이 있기에 공간 왜곡의 촉매를 생성할 수 있는 거고 월야철을 알아보는 건가.
[...!]
“...!”
갈구노스와 유페미나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드를 중심에 둔 채 휘몰아치던 기파는 여전히 유페미나의 곁에 머물러있건만, 정작 그 기파를 발생시킨 원인인 그리드는 갈구노스의 코앞에 있었으니.
두 사람은 순보의 개념을 알고 있었지만 초의 화려한 이팩트와 결합 된 순보의 발동은 두 사람의 혼을 빼앗고도 남을 파급력을 발휘했다.
그 와중에 대단한 건 유페미나의 마법이 그리드의 등 뒤 너머에서 쏟아져 날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1초만 빨리 발동시켰어도 완벽한 서포트가 됐으리라.
[<갈구노스의 영혼>이 당신의 부름을 감지하였습니다.]
경악하는 갈구노스의 얼굴과 알림창의 내용이 그리드의 망막에 겹친다.
차가운 불꽃에 휘감긴 염룡낙월검은 이미 갈구노스의 핵에 닿기 직전이었다.
[갈구노스가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쿠와아아앙!
“...”
“...”
세상을 찢을 듯 포효하던 검이 우뚝 멈췄다.
사납게 그리드를 노려보던 갈구노스가 갑자기 방긋 눈웃음을 지었다.
녀석의 머리 위에 떠오른 이름은 템빨골2.
그리드가 직접 작명했던, 그래서인지 볼수록 정감가고 멋진 이름이다.
“...허무해 뭐야.”
유페미나의 혼잣말이 고요한 장내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