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57화 (1,347/1,794)

템빨 68권 - 10화

템빨골은 보통의 언데드와 많이 다르다. 레벨과 스탯이 오르며 전직이 가능했고 스킬도 학습했다.

마치 플레이어처럼 성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골격을 교체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환골탈태다.

스탯과 별개로 육체의 근본적인 위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템빨골들을 데스나이트와 리치로 성장시키겠다는 그리드의 꿈은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템빨골에게 억만금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았다.

아그너스의 사자가 보여준 위용이 그의 뇌리에 강렬히 자리 잡은 여파이기도 했다.

죽지 않고 두려움을 모르는 언데드가 강한 힘을 지닐수록 상대방을 얼마나 가혹하게 압박하는지... 공국에서의 전투에서 그는 새삼 실감했었다.

‘돈이야 어떻게든 모을 수 있고.’

아이템 자동 제작의 속도는 아이템의 크기, 형태, 구조, 재질, 그리고 레벨 제한의 영향을 받는다.

아이템이 크면 클수록, 형태와 구조가 복잡할수록, 재질이 뛰어날수록, 레벨 제한이 높을수록 제작 속도가 느려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건 재질과 레벨 제한이었지만 시장이 요구하는 아이템의 수준은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

가장 많은 수요가 있는 아이템의 레벨 제한은 여전히 300레벨대에 불과했고, 사람들의 재정엔 한도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재질도 마냥 특별한 것보단 적당히 뛰어난 것이 선호됐다.

시장이 요구하는 아이템쯤이야 지금의 그리드는 대부분 10분 내에 오토 제작이 가능한 것이다. 하루 날 잡고 100개 이상의 아이템을 찍어내서 단 하루 만에 돈방석에 앉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만들다가 운 좋게 전설이나 신화 아이템이 뜨면 단원들에게 보급하면 되고.’

이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짜릿하다.

그리드의 기분은 최근 몇 년을 통틀어서 가장 좋았다.

제작 기술이 ‘완성’됐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해주고 있었다. 기술 레벨을 올리겠답시고 틈날 때마다 팬티를 만드는 등, 지난 몇 년 동안 억눌렸던 부담감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고 기쁠 수밖에.

물론 너무 들떠서 이성적인 판단을 그르치거나 하는 실수를 범하진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쌓아온 모든 노력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시장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아이템을 풀면 안 되겠지. 아이템 시세가 박살나면 결국 나만 손해니까. 유통 수량은 항상 라우엘의 조언을 받고 신중하게 조절하도록 하자.’

잠시 후.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리드가 유페미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마탑 지하의 단련실.

450레벨의 훈련용 골렘 ‘내부’에 무지갯빛 마력을 폭사시켜 허물어뜨리고 있던 유페미나가 훈련 모드를 종료하고 그리드에게 다가왔다.

“마법은 잘 배우셨어요?”

“응, 같이 가서 구경하지 그랬어. 브라함의 마법에 관심 많잖아?”

유페미나는 여전히 복제술사의 특성 일부를 보유 중이다. 대상의 기술이 ‘마법’의 범주에 있는 이상 원본보다 위력을 몇 배나 강화해서 복제할 때도 있다.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닌 마법사였던 무무드의 지식과 기술이 타인의 마법을 낱낱이 파헤치고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리치 갈구노스.

그리드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던 초네임드 보스가 그녀의 손에 쓰러진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무무드의 후예와 복제술사가 일으키는 시너지는 그리드와 브라함의 <지공>을 웃도는 마법사 카운터였다.

마력의 ‘조합’을 방해하고 내부에서 파괴시키는 무무드식 마법에 지슈카의 파마의 화살까지 더해지니 갈구노스 입장에선 재앙을 만난 격이리라.

“브라함 공께 실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유페미나를 향한 브라함의 호의는 과거의 후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브라함은 유페미나가 아니라 그녀가 품은 무무드의 힘과 의지를 배려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유페미나는 브라함과의 선을 확실하게 지켰다. 그의 배려와 호의에 의지하지 않고 거리감을 유지했다.

“브라함도 언젠간 무무드가 아닌 너를 봐줄 거야.”

브라함과 유페미나의 관계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게 된 그리드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예전 어느 날처럼 유페미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녀는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외모와 달리 어엿한 성인이었지만 그리드에겐 동생 같은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유페미나도 순순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타인의 힘을 보고 훔치는 복제술사.

유페미나는 복제술사의 직업 특성상 타인을 속이고 기만해왔고 종종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무의식중에 타인과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만큼은 아니었다.

그리드의 기술은 단 한 번도 훔쳐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와의 관계에 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왔다는 자부심 때문인 건지, 그녀는 그리드에게만큼은 어떤 막연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고 마음이 편했다. 정말로 친오빠 같았다.

“여기, 원하시던 물건이에요.”

유페미나가 갈구노스의 유해와 핵을 그리드에게 건네주었다.

“안 그래도 지슈카 언니가 그리드 오빠에게 필요할 거라고 하길래 따로 손 안 댔어요.”

“지슈카가...”

“아까 보니까 두 분 사이가 어색해 보이던데, 연애는 시작도 못해보고 깨졌다는 소문이 사실이에요?”

“...”

그런 소문이 났다고?

짐짓 당황하는 그리드였지만 이내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털어놓았다.

“나는... 쓰레기야. 그래서 유라하고 지슈카 둘 다 사랑해. 하지만 세상은 이런 내 마음을 용납하지 않을 테고 두 사람에게도 실례라는 걸 알아. 결국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그중에서도 지슈카가 워낙 밝으니까 나 없이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고...”

“와... 쓰레기...”

유페미나가 가자미눈으로 비난했다. 표정에 혐오감마저 표출됐다.

“유라 언니하고 지슈카 언니 둘 다 오빠의 마음을 알면서도 오빠를 좋아했던 건데, 뒤늦게 그 마음을 핑계로 관계를 파탄 냈다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에요?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요.”

“오히려 배려심이 넘치는 거지 뭐라는 거야. 언제까지고 셋이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순 없잖아. 서로 상처만 더 커질 거라고.”

“애매하긴 뭐가 애매해요? 오빠는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하고, 두 사람은 오빠의 그런 마음을 알면서도 오빠를 좋아했는데. 세상이 비난할 거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래요? 셋이 서로 좋다는데. 욕하려면 하라고 해요. 당사자들끼리 행복하면 그만이잖아. 게다가 뭐? 언니들에게 실례라고요? 그건 오빠의 착각이죠.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 계기나 형태는 상관없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오빠가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 사람들 입장에선 결국 자신의 사랑이 결실을 맺는 거니까 기뻐할 거라고요. 하여튼 연애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이 꼭 혼자 망상하고 혼자 삽질한다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얘기는 그만하자.”

어디까지나 유페미나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드가 평생토록 학습해온 윤리와 상식을 깨뜨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눠봤자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바알의 계약자 시절 파그마의 눈으로 갈구노스의 유해를 분석했다. 지공의 지식이 이해를 도왔다.

그리드는 백골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수식과 문양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마력 회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력 응집, 변환, 폭주 보조. 촉매 생성 보조. 의념 강화 보조...’

범람하는 정보가 하나의 결과로 귀결된다.

갈구노스의 백골은 오로지 리치가 되기 위해, 리치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연구되고 개조된 상태였다.

힘에 대한 갈구노스의 열망이 얼마나 강했을지 여실히 느껴질 지경이었다.

‘세계 정복이라도 꿈꿨나?’

핵에 축적된 마력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죽으면서 상당량을 소실했을 텐데도 끝을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리드는 갈구노스의 성격까지 파악했다.

‘이런 힘을 갖고도 섣불리 세상에 나오지 않고 계속 던전에 숨어서 병력을 모았다는 건... 굉장히 신중한 성격이었다는 거겠지.’

그리드는 갈구노스 또한 전대 전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파그마나 브라함과 다른 세대의 전설 말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저력을 알았고, 저력을 알기에 섣불리 힘을 과신하지 못했으리라.

“...브라함이 놀랐던 이유가 있었어.”

그리드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갈구노스 레이드를 차일피일 미뤄뒀다간 언젠가 큰 봉변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며, 이번 지슈카와 유페미나의 활약이 지닌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했다.

이걸 대체 얼마에 사야하나...

갈구노스의 유해에 섣불리 값을 매기지 못하는 그리드의 표정을 읽은 걸까.

“돈은 안 받아요~ 언제 시간 나실 때 아이템 하나만 만들어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10개라도 만들어줄게.”

예전부터.

템빨단원들은 그리드를 위해 많은 제작 재료와 도안을 구해다 주곤 했다. 하지만 그 가치가 그리드의 제작 아이템과 맞먹느냐고 묻는다면, 그 어떤 단원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템빨단원들은 늘 그리드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관계는 서서히 변해가는 중이었다.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의 관계는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았다. 단원들이 그리드에게 주는 도움의 가치가 갈수록 커졌다. 그리드 입장에서야 동료들의 도움이 크든, 작든 언제나 귀중했지만 말이다.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그리드가 템빨골2를 소환했다.

딱딱, 딱!

탱고를 추며 등장한 템빨골2가 그리드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갈구노스의 백골과 핵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다.

딱딱! 딱딱딱!!

흥분한 걸까.

발을 동동 구르는 템빨골2의 모습이 그리드를 웃게 만들었다. 템빨골들을 귀여워하는 메르세데스의 어이없는 취향을 조금쯤 이해하게 됐을 정도였다.

“바로 시작하자.”

템빨골2의 진화가 시작됐다.

여전히 몸에 비해 해골이 큰 경향이 있는 템빨골2의 신체에 갈구노스의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결합되며 8등신이 되어갔다. 늑골과 골반이 두꺼워지며 튼튼한 안정감이 더해졌다.

갈구노스의 백골에 새겨졌던 온갖 문양과 술식들이 서로 이어지고 합쳐질 때마다 빛을 되찾았고, 난폭한 흑색 마력이 템빨골2의 전신에 넘실거렸다.

“...”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왈츠를 추던 템빨골2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녀석을 감싼 흑색의 마력이 점차 더 난폭해지며 불꽃처럼 타올랐다. 새로운 주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대로 템빨골2를 불태워버릴 기세였다.

‘실팬가?’

그리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유페미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템빨골이 베리아체의 작품이라고 해도 갈구노스 같은 초네임드급 리치의 힘을 흡수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아!!

고개를 번쩍 치켜든 템빨골2가 포효했다. 그리드 앞에선 항상 웃던 두 눈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광망을 내뿜었다.

뚜둑! 뚜두둑!!

템빨골2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팔다리를 강제로 움직일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장내에 메아리쳤다. 이대로는 산산조각 나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섣불리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마력의 폭주를 멈추겠답시고 템빨골을 후려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역소환을 하자니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네크로맨서 분야에 문외한이었다. 지식이 적고 관련 기술이 전무했다. 템빨골들이 주인을 잘못 만난 셈이다.

“불렛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유페미나가 안절부절 못하는 그리드의 옷깃을 붙잡았다.

“불렛 님이라고 해서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겠어요? 템빨골은 보통의 언데드하고 완전히 다르잖아요. 지금은 템빨골을 믿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어요.”

그때였다.

[새로운 육신과 결합 된 건가...! 꿈에 그리던 완전체로다! 실로 흡족하구나!]

그리드의 손에 쥐어져있던 갈구노스의 핵이 소리치며 멋대로 날아올랐다.

“뭣...!”

유페미나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갈구노스의 자아가 소멸한 줄로만 알았었다. 설마 핵에 숨어 죽은 척하고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브라함조차 눈치 채지 못했을 정도이니 그녀라고 오죽하겠는가.

“안 돼!!”

템빨골2에게 쇄도하는 갈구노스의 핵을 향해 유페미나가 발악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갈구노스의 공포적인 힘을 직접 체험해본 사람이다. 베리아체의 유산인 템빨골과 갈구노스가 결합할 경우 감당하기 힘든 적이 탄생할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늦었다.

캬아아아아아!!

갈구노스의 핵이 템빨골2에가 빨려 들어가자 템빨골2의 포효가 더욱 더 커졌다.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한데 그리드의 표정엔 도리어 안도가 스쳤다.

이제야 비로소 템빨골을 도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자아 부여.”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