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54화 (1,344/1,794)

템빨 68권 - 08화

<파그마에게 안식을>

최종 전직 퀘스트

친구를 배신하고 전대 전설들의 유해를 파헤친 것으로 모자라 끝끝내 악마와 계약한 변절자.

파그마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고 들은 사람들은 그가 영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가 인류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도 바알과 계약했다는 이유로 업적을 폄훼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었을 거라는 음모를 제기하곤 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파그마는 단지 대장장이 파그마일 뿐입니다.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하며 발자취를 쫓은 당신이야말로 파그마의 삶을 이해하고 업적을 존중하는 유일한 목격자일 것입니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가여운 영웅의 영혼을 해방시켜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보상:파그마의 검무 <휘(輝)>와 <참(斬)> 개방. <천(天)>을 제외한 모든 검무를 제약 없이 융합 가능.

퀘스트 기간 제한:없음

최종 전직 퀘스트의 내용은 그리드에게 어떤 아련한 감정을 심어주었다.

동족을 배신하고 우리에 갇힌 영물을 빼돌린 파그마, 하나뿐인 친구의 등에 비수를 꽂고 수명을 빼앗은 파그마, 순진한 도플갱어를 꼬드겨 숲에 가둔 파그마, 대악마 바알과 결탁하여 전설들의 유해를 파헤친 파그마.

각종 퀘스트와 에피소드 속에서 등장했던 파그마는 분명히 인격적인 결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그마의 ‘행동’에 초점을 맞췄을 때 극대화되는 감상이었다.

우리에 갇힌 청호를 구출하기 위해 용기를 품고 뜻을 세웠던 파그마, 브라함을 죽이고 후회하며 슬피 울었던 파그마, 전쟁을 막기 위해 도플갱어의 순수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파그마, 서로 결탁해 인류를 위협한 악마와 신에게 대적하고자 바알과의 계약을 선택했던 파그마...

언젠가부터 그리드는 파그마의 선택에 숨은 속내와 감정들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파그마를 비난하지 못하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그마를 증오하거나 원한을 품은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그마가 영웅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했다.

홀로 세상을 위해서 싸웠고, 영혼을 바쳐 인류를 구원했으나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던 인물.

시스템의 표현대로 가여운 영웅이다.

“...미친놈들인가?”

잠시 감상에 젖었던 그리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욕이 절로 나왔다.

파그마의 영혼을 해방하라고?

바알에게 붙잡혀 있는 영혼을?

전직 퀘스트 주제에 난이도가 높아도 너무 높다. 이쯤 되면 S.A가 파그마의 후예를 싫어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드가 강한 이유는 파그마의 후예라서가 아니니까.

브라함, 피아로, 메르세데스, 사하란 제국, 지혜의 탑, 동대륙 등에서 끊임없이 기연을 쌓고, 탐식의 룬에 온갖 힘을 축적하고, 초월의 격과 신격을 이루는 등.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보다 개인의 노력과 행운으로 강해진 인물이다. 장담컨대 S.A그룹이 설계한 파그마의 후예의 궁극적인 모습보다 지금의 그리드가 최소 몇 배는 강할 것이다. 어쩌면 수십 배일 수도 있다.

심지어 그리드에겐 템빨국과 템빨단이라는 전력까지 있다.

그리드를 파그마의 후예라고 규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한데 그런 그리드에게조차 최종 퀘스트의 난이도가 하늘의 별처럼 다가왔다.

욕이 나올 수밖에.

‘내가 평범하게 성장한 파그마의 후예였으면 영원히 못 깼을 퀘스트다. 뭐 이딴 퀘스트를 전직 퀘스트라고 내놓은 거지?’

후로이의 표현을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완화해서 빌리자면 양심이 출타한 건지 의심이 생길 지경.

“...뭐, 됐다.”

그리드는 의외로 금방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직 퀘스트의 난이도가 애초에 높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재단 기술을 장인급으로 만드는데 걸린 세월만 해도 10년에 이르지 않나.

최종 퀘스트를 클리어하려면 20년, 30년 걸리려나보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지금 당장 심력을 낭비할 문제가 아니었다.

‘보상이 너무 좋아서 신경 써봤자 마음만 초조해지겠지. 한동안 신경을 끄자.’

바알은 어차피 쓰러뜨려야할 대상이다.

나중에 자연히 도달하게 될 퀘스트다.

아그너스와 만난 뒤부터 급격히 심계가 깊어진 그리드는 마음을 쉽게 다스릴 수 있었다.

‘정작 아쉬운 건 이거군.’

그리드가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의 정보를 다시 상세히 살펴보았다.

대장 기술과 재단 기술이 융합하여 진화한 기술.

두 가지 기술에 국한하지 않고 ‘제작’과 관련한 일이면 뭐든 일정 수준의 효과를 발휘한다고 한다.

좋다.

시스템이 ‘완성 됐다’고 표현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좋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잠재력 개방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

제작하는 아이템의 등급을 최소 유니크로 보정 받고(성장형이 아닌 이상) 아이템 능력치를 40퍼센트 증폭시키던 효과가 적용되지 않게 됐다.

둘째, 에고 부여 기능이 없다는 점.

대신 자아 부여 스킬을 제약 없이 쓰게 됐지만... 타인의 자아를 아이템에 가둔다는 건 그리드의 성격상 내키지가 않았다.

‘에고 부여는 아이템에 생명을 주는 거라 오히려 자부심이 느껴지는데 이건 영 꺼림칙하단 말이지.’

자아 부여는 영체로 존재하는 자아 즉, 이야루그트 같은 존재들의 영혼을 아이템에 귀속시키는 스킬이다.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자아 부여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리드와 대상 자아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어야한다.

2. 대상 자아가 그리드의 부름에 응해야만 자아 부여가 발동한다.

3. 대상 자아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부름에 응하는 순간 강제력이 발생, 반드시 대상 아이템에 귀속 된다.

차라리 몬스터를 죽이고 그 몬스터의 자아를 흡수하는 방식이면 부담 없이 유용하게 써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자아 부여 스킬은 그리드가 알고 있는 상대(불렀을 때 응답해줄 정도의 친분이 있는)를 대상으로 지정한 뒤 아이템에 가둬버린다. 인성을 의심 받을만한 짓거리였다.

‘음... 횟수제한이 사라진 만큼 너무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자아 부여를 써서 자아를 귀속시킨 아이템이 파괴될 경우 대상 자아는 본래 있던 자리로 회귀한다.’는 규칙이 존재한다.

이 규칙을 이용하면 용건이 끝난 후 아이템을 파괴해서 자아를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부담을 줄일 수가 있다.

대표적인 활용 방법이 <아이템 합체> 스킬을 이용하는 것이다. 합체시킨 아이템에 자아를 부여하면 합체가 풀리는 순간 자아도 해방된다.

‘물론 아이템 합체를 매번 사용하긴 힘들지만... 잠깐, 혹시?’

문득 어떤 가설을 떠올린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꺼내 자아 부여를 시도했다.

대상은 헬가오로 삼았다. 육신을 잃고 마물의 몸이나 빼앗고 다니는 그 제9위 대악마의 영혼 말이다.

[<헬가오의 영혼>이 당신의 부름을 감지하였습니다. 잠시 흥미를 보였지만 콧방귀를 뀌며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게 되네?”

자아 부여의 전제 조건은 그리드와 대상 자아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꼭 호감이 있을 필요는 없다.

검공 리미트와의 결전 당시 그리드에게 별 호감이 없던 이야루그트가 자아 부여에 호응했던 것처럼 말이다.

[<헬가오의 영혼>이 당신의 부름을 감지하였습니다. 어이없어 하다가 콧방귀를 뀌며 응답하지 않습니다.]

“호오...”

악연에게도 쓸 수 있는 스킬이라.

[<헬가오의 영혼>이 당신의 부름을 감지하였습니다. 적당히 하라며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거 계속하면 귀찮아서라도 한 번쯤은 응답해주지 않을까? 욕하고 싶어서라도.’

애초에 응답하는 순간 자신의 자아가 빼앗길 거란 사실도 모를 텐데.

‘...헉? 설마 파그마의 영혼도 부를 수 있나?’

내가 이런 천재적인 발상을 떠올리다니?

흥분한 그리드가 조심스럽게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실패했다.

파그마의 영혼이 이지를 상실한 상태라 당신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가 흩어질 뿐이었다.

“쩝, 이게 될 리가 없지.”

그런 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면 자아 부여가 너무 사기 스킬이 된다. 밸런스에 집착하는 S.A가 그런 허점을 드러낼 리가 없다.

역시 안 되지 않을까... 그리드는 생각하면서도 자아 부여 스킬을 계속 사용했다. 대상은 당연히 헬가오였다. 횟수 제한이 사라진 대가로 쿨타임이 생기긴 했지만 장소가 산이었고 신격도 있었기 때문에 몇 번쯤은 연속으로 사용해도 지장이 없었다.

‘어쨌든 결론은 좋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

완성된 스킬이라는 이유로 잠재력 개방 적용 불가라는 페널티를 얻게 됐지만 이 정도면 납득할 정도의 밸런스 조정이다.

아이템을 공장마냥 찍어낼 수 있게 됐고(손재주 계수가 적용된 덕분에 자동 제작 속도가 기존보다 2배 가까이 빨라졌다), 무조건으로 신화 등급 아이템을 노릴 수 있게 됐으며, 마법 부여와 자아 부여가 가능해졌다. 속성 부여에 강점도 생겼다.

무엇보다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가장 큰 진화다.

그리드는 재료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발생하는 아이템 성능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을 구상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검을 만들 때 아티팩트 기술을 도입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마법만 부여해도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테지만.’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제작하는 아이템들은 기존에 제작했던 아이템과 비교해서 훨씬 더 강력할 것이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은 궁극의 기술이니까.

“슬슬 돌아가자.”

그리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템빨골들이 분주히 화로의 불을 끄고 주변을 정리했다. 랜디는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파그마의 검무가 그리드의 검무로 진화함에 따라 자연히 강력해진 녀석은 잡몹 정도야 그리드가 나설 필요 없이 자신이 처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표출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노에야 항상 태평했다. 느긋하게 하늘로 떠오르더니 젤리 같은 분홍색 발바닥을 활짝 펼치고 번개를 일으켰다. 그러자 주위의 나무가 타오르며 그리드가 밟을 길을 열어주었다.

“어차피 날아갈 건데 뭘 굳이 산불을 지르고 그러냐.”

“멋있으라고 그랬다냥...”

“멋은 개뿔. 안 그래도 브라함이 산을 수십 개를 부숴놨는데 목재값 더 오를까봐 걱정이다.”

“...”

쯧쯧, 혀를 차며 핀잔을 주는 그리드 곁에 잠자코 따라붙는 노에였다.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가.

그리드가 뭐라고 말하든 노에는 마냥 좋았다. 그건 랜디도, 템빨골들도 마찬가지였다.

아, 템빨콘은 빼고.

***

“핵에 남은 마력의 파장을 보니 갈구노스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되는군... 너희들 이놈을 무슨 수로 죽였지?”

“지슈카 언니의 화살이...”

대장간에 들러서 기술을 이것저것 시험해본 뒤 성에 돌아온 그리드가 다소 의외의 조합을 목격했다.

브라함과 지슈카, 그리고 유페미나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드는 처음 보았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평소 얼음처럼 차가운 브라함의 눈빛에 조금이나마 온기가 감돌았고 태도에서도 호의가 느껴졌다.

유페미나가 무무드의 힘을 계승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함은 무무드에게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아마 그 반동으로 유페미나에게 호의적인 게 아닐까 싶었다.

지슈카야 뭐... 사람인 이상 누구나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생긴 게 너무 예쁘다느니 하는 이유 따위가 아니다.

자의식이 뚜렷하고 공과 사가 확실한데다 성격까지 활달한 그녀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했다. 천하의 브라함이라도 그녀를 상대로는 냉담하지 못했다.

“셋이 뭐해?”

열띤 대화중인 세 사람 사이로 그리드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지슈카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녀는 의외로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

걱정과 달리 너무 태연한 태도. 예전 같았으면 오히려 그리드가 당황해서 어버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마음의 세계를 확장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리고 마음이란 정신과 닮은 듯 다른 개념이다.

그리드는 지슈카 앞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응, 거의 4개월 만이네. 너무 오래 못 봐서 보고 싶었어.”

“어?”

오히려 지슈카가 당황했다. 평소엔 고양이처럼 치켜뜨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얼굴을 삽시간에 당근처럼 붉혔다.

이미 유페미나에게 시선을 돌린 그리드는 그 반응을 보지 못했다.

“활약상이 끊임없이 들려오더라?”

무무드의 후예로 전직한 유페미나는 이제 ‘조건부 최강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인의 역량만으로 에픽 클래스를 얻고 세이렌과 무무드를 최초로 밝혀내는 등 활약했던 그녀다. 무무드의 힘을 계승한 뒤부터 그녀가 쌓은 업적들은 아직 서사시를 쓰기 전의 그리드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유페미나가 빙그레 웃었다.

“길드의 배려와 지원 덕분이죠.”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한때 장난기 가득했던 유페미나의 미소에서 이제는 인자함마저 느껴졌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리드가 왠지 자신을 탐탁찮게 쳐다보는 브라함에게 용건을 꺼냈다.

“마법 좀 가르쳐줘요.”

성에 오기 전 대장간에 들러서 실험해봤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로 ‘제작 중’인 아이템엔 마법 부여가 가능하다. 1개의 마법을 부여하는 건 100퍼센트 확률로 성공하는 반면 부여하는 마법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실패 확률이 생겼다. 그리드는 되도록 위력이 큰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기왕이면 검무에 귀속 된 마법들과 겹치지 않게 완전히 새로운 마법으로.

예전 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마나가 순환해야할 혈맥마다 투기가 함께 순환하는’ 그리드의 육신은 마법을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을 아예 못 배운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디코이를 배우지 않았나. 그때 이후로 레벨도 많이 올리고 성장했으니 슬슬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리드의 몸을 빤히 살펴 본 브라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마침 네가 배우기에 좋은 마법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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