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07화
바알의 계약자는 강점이 많은 클래스지만 만능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결함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부활 포인트를 지정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죽으면 무조건 지옥에서 부활했다. 전설 등급을 달성한 시점부터 마기가 너무 강해졌느니 뭐니 어쩌구 지랄하며 생긴 제약이다. 이게 아주 골치가 아팠다. 다시 인계에 올라 목적지까지 이동하는데 한세월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으니.
게다가 자력으로는 지옥문을 열지 못한다는 점도 큰 제약이었다.
지금만 해도 보라.
어서 빨리 지옥문을 열라니까 체파르데아 개자식이 절차를 운운하며 거부한다. 이렇게 된 이상 꼼짝없이 지옥에 발이 묶여있어야 했다.
-파그마의 후예가 너무 강했다. 이 소식을 어서 알려야해. 개골. 신격까지 쌓은 초월자라는 사실이야 내 익히 알고 있었다만 벌써부터 뮐러와 비슷하거나 강한 건 뭐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된 거지.
“XX 그놈의 뮐러, 뮐러. 별 업적도 남기지 못하고 뒤진 놈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매번 비교하고 기준으로 삼는 거냐?”
인간들은 여러 대악마를 봉인했던 뮐러를 역사상 최고의 대영웅인양 칭송한다. 웃기는 일이었다. 뮐러가 봉인한 대악마들은 대부분 순위가 낮았고 그나마 순위가 높았던 헬가오도 ‘인계에서’ 당했을 뿐이지 않나. 그 외에 뮐러의 업적이라곤 마물로부터 어느 도시를 지켰다느니, 어떤 사람을 구했다느니 하는 시시한 것들밖에 없다.
그리드와 비교하면 개허접 병신인 셈이다. 한데 바알의 권속이라는 체파르데아가 다른 양민들처럼 뮐러를 대단한 듯 추켜세우자 아그너스는 짜증이 치솟았다.
체파르데아가 핵심을 찔렀다.
-파그마의 후예가 나타난 건 채 20년도 안 된 일이지 않느냐. 그에 반해 전대 전설들은 평균 100년을 활동했고 내가 알기론 그중에서 뮐러가 최강이었다. 기준으로 삼고 비교하는 게 당연하지. 개골. 파그마의 후예가 벌써부터 뮐러와 비견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거다.
“뭐가 비정상이지? 그냥 전설도 아니고 신인데?”
-개골골골!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신이라고 해봤자 흔한 인신 중 하나일 뿐이다. 인신은 예로부터 범람해왔다. ‘오래 쓴 물건’에도 신이 깃든다며 숭배하는 인간들이 있는 마당에 인신 따위가 뭐 별거라고... 신격이라는 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야. 네놈 의외로 순진하구나.
“...”
개구리가 웃을 땐 개골골골 했었나... 처음 알게 된 사실에 약간의 흥미를 느낀 아그너스가 짜증을 접었다. 어떤 개수작을 부린 페이커 탓에 경험치를 3배로 잃어 화가 들끓었지만 어차피 당장 인계로 가봤자 복수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냥 순순히 체파르데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여긴 뭐지?”
절차와 보고를 운운하기에 당연히 바알을 만나러 갈 줄 알았다. 체파르데아는 바알의 부하니까. 한데 체파르데아가 찾아온 곳은 바알의 탑이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장소였다. 구역 자체가 1지옥이 아닌 다른 곳이었는데 느낌이 묘했다.
마기와 살의가 요동치고 마물들의 비명소리가 쉬지 않고 메아리치는 다른 지옥들과 달리 고요하다.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가 자리 잡은 장소였다.
“설마 중립 지역인가?”
-그렇다. 개골.
“고작 저택 하나 달랑 있는 해안가의 절벽이 어떻게 중립 지역 취급을 받는 거지? 다른 악마들이 좌시하지 않을 텐데.”
다른 중립 구역엔 야탄의 성상이 즐비하게 들어서있다.
야탄이 지켜보는 곳에선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악마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웃기는 일이었다.
폭력을 법칙으로, 악행을 명예로 삼는 놈들이 정작 야탄 앞에선 폭력을 지양하다니. 야탄을 악신이 아닌 평화의 신마냥 취급하는 분위기인데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어찌됐든 이곳엔 야탄의 성상이 없다.
한데 어떻게 중립 지역으로 존재한단 말인가.
합당한 의문을 품는 아그너스에게 체파르데에가 설명했다.
-무력이 만든 결과다. 이 저택의 주인이 너무 강해서 아무도 덤비지 못했고, 그래서 자연스레 중립 지역이 됐을 뿐이야.
“...?”
대악마조차 다른 악마들에게 도전받게 마련이다. 한데 대악마도 아닌 존재가 도전을 억제할 정도의 무력을 지녔다고?
“설마... 제파르냐?”
악마가 아닌 하급마족 출신임에도 타고난 검의 재능을 갈고닦아 여러 대악마의 목을 베었다는 검마 혹은 검귀, 무념의 검 등 온갖 칭호로 불리는 존재.
이야루그트라는 또 다른 검귀를 상대로 일주일 동안의 혈전을 벌였다는 일화가 특히 유명한 놈의 이야기는 아그너스도 수차례 들어 알고 있었다.
-맞다, 개골. 출신성분이 너무 하찮아 타고난 마기가 적어서 그런지 인계에서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놈이지. 심지어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른지라 무저갱에서도 자유롭다.
체파르데아의 툭 튀어나온 두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무저갱의 문을 벨 수 있는 놈이라는 게지.
“호오...”
아그너스의 입 꼬리가 귀 끝에 걸렸다.
무저갱은 세계의 중심이다. 시작이자 끝이다. 지옥과 지상을 잇는 것으로 모자라 천상과도 통하는 문이었다.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아그너스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들은 마음대로 지상을 오갈 수 있게 된다. 마물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나는 먼 과거 번헨 열도에서 열렸던 인마대전을 재현할 생각이다. 개골. 대전의 칼이 될 제파르와 영혼의 왕 가미긴을 내가 설득할 수만 있다면 바알 전하께서도 당연히 허가해주실 테지. 개골.
사실 체파르데아는 그리드뿐만 아니라 페이커에게도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죽지 않는 자를 죽게 하는 그림자의 힘에서 굉장히 큰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인마대전이다.
그리드와 페이커를 비롯한 당대 전설들을 죽이고 또 죽여 인류를 약화시켜놓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꽤 골치 아플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가미긴? 그놈은 뭐하는 놈이지?”
-제4위 군주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유령으로 일으켜 종으로 부리지. 죽은 자의 시신을 종으로 삼는 너와 닮은 듯 다른 힘을 지닌 게다. 개골.
“영혼을...”
아그너스의 뇌리에 스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파그마.
그의 영혼이 바알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파그마의 힘을 볼 수 있는 거냐...?”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바알의 계약자.
자신이 일으킨 언데드 군단에게 자신이 만든 무기와 갑옷을 입혀 지옥의 대군과 맞서 싸웠다는... 말년의 그는 아그너스가 인정하는 진정한 최강자였다.
체파르데아가 개골골골 웃었다.
-당연하다. 다른 군주들은 파그마와 계약했던 바알 전하를 이해하지 못하고 짓궂은 변덕이라고 손가락질 했었지만 나는 진즉부터 알아봤다. 바알 전하께선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그마와 계약하고 파그마의 영혼을 취하셨음을 말이야. 개골골골.
“그게 진짜냐?”
그 바알이 의외로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고?
귀를 의심하는 아그너스에게 체파르데아가 다소 기 죽은 음성으로 답했다. 슬금슬금 시선도 피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개골...
“...”
-어찌됐든 볼만 할 게다. 지난 세월 동안 지옥이 축적한 전설의 영혼은 파그마의 영혼뿐만이 아니니까.
***
헤밀턴 공국을 다녀온 후 3개월이 지났다.
스틱세이와 마탑의 마법사들, 그리고 레이단의 연금술사들이 템빨국과 공국을 오가며 워프 게이트 설치에 힘썼다. 예상대로 꽤 힘든 작업이었다. 잦은 사고와 실패가 반복되며 투자비용이 늘어났다. 하지만 일은 분명히 진척되고 있었고 도중에 좋은 소식도 들려왔다.
작업을 돕던 제드노스와 라엘라 커플(비밀 연애를 하다가 반트너에게 들키고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이 고대 마법의 술식에서 기연을 얻고 히든 스킬을 얻은 것이다.
클래스 전직도 가능했다는데 일부러 노말 클래스를 유지했다고 한다. 4차 전직부터 드러난 노말 클래스의 잠재력은 어중간한 히든 클래스와 비교해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선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특히 제드노스와 라엘라처럼 한 가지 속성에 특화 된 마법사들은 <속성 강화> 패시브 스킬의 영향을 크게 받는지라 5차 전직부턴 굉장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는 게 제드노스와 라엘라 커플의 확신이었다.
템빨그림자단은 더욱 더 정예로 거듭났다.
그리드가 공들여 만들어준 성장형 무기와 신화급 갑옷을 무장한 페이커가 직접 단원들을 이끌고 대륙 각지를 누볐다. 페이커의 요청을 받은 라우엘이 되도록 많은 임무를 그림자단에게 할당한 덕분에 훈련을 빙자한 실전 경험을 끊임없이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드는 페이커의 갑옷을 만들어줄 때 기묘한 마력의 돌을 사용했다.
무기가 아닌 갑옷에 돌을 쓴 이유는 페이커가 어쌔신이기 때문이다.
회피력이 높은 어쌔신은 타격을 받는 횟수가 다른 딜러에 비해 현격히 적은 탓에 성장형 갑옷을 레전드리 등급 이상까지 육성하려면 한세월이 걸린다. 반면 무기는 비교적 빠른 육성이 가능하므로, 그리드는 성장형으로 만들어진 페이커의 무기와 갑옷 중 당연히 갑옷에 돌을 썼다.
성장형 무기와 갑옷을 만들기 위해 장장 보름을 대장일만 했지만... 그리드는 그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페이커의 활약상을 듣고 자극을 받은 십공신들 또한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중 돋보이는 건 지슈카와 유페미나였다. <갈구노스의 사원>에서 우연히 만나 팀플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그대로 리치 갈구노스를 레이드하는데 성공했다.
무무드의 힘을 계승한 유페미나가 대단위 마법을 무려 콤보로 연계하자 언데드 군단이 모조리 갈려나갔고 지슈카의 <파마의 화살>이 갈구노스에게 안식을 선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이 세운 공은 무척 컸다. 파울드를 잃은 아그너스가 갈구노스를 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전히 소멸시켜버렸으니 근심의 싹을 뽑아낸 셈이었다.
갈구노스의 사원이라는 아주 좋은 사냥터 하나가 사라져서 다소 난감하긴 했지만 각지에 흩어진 십공신들이 새로운 사냥터를 속속들이 발견하는 중이라 별 탈은 없어보였다.
한편 그리드의 사자들은 제2차 헬가오 레이드를 수월하게 성공했다. 이번에는 브라함도 협력했다고 한다. 불을 차갑게 만드는 마법을 창조했다며 시험해 보겠다는 이유였다. 서리여왕의 심장에서 어떤 영감을 얻은 눈치였다.
어찌됐든 사자들은 그리드의 의도대로 <제9위 대악마도 알아보는>칭호를 얻었다. 지옥에서 발생하는 페널티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사리엘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새로 얻은 칭호 또한 그녀(?)의 폭주 현상을 억누르진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지옥에서 폭주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건 꽤 주의 깊게 취급해야 할 문제였다.
“...자꾸 졸리네.”
그리드는 지옥 원정을 재개하지 않고 있었다.
쇠사슬을 질질 끌며 외딴 산에 올라 끊임없이 속옷을 만들었다...
경험치 획득률을 높여주는 삼제 이정의 수련도구 세트를 무장한 채, 저번 지옥 원정에서 얻은 24위 대악마 <네비로스의 힘>까지 이용해 재단 기술 연마에 집중했다.
<네비로스의 힘>
일부 자연에서 집중력이 상승합니다.
장소가 숲, 산, 논, 광산일 경우 스킬 시전 속도가 소폭 상승하고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소폭 감소합니다.
바위와 식물을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던 대악마.
피아로에게 카운터를 맞아 다소 허무하게 죽은 감이 있던 네비로스의 권능이 탐식의 룬에 귀속되어 그리드의 작업 능률을 높였다.
그리드는 산속 도인이 된 심정이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쇠사슬 소리를 들으며 온종일 팬티만 만들다 보니 정신병이 걸릴 것만 같았다.
그나마 노에가 재잘재잘 떠들고 랜디와 템빨골들이 사냥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적적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
도대체 이게 몇 장째 만드는 속옷일까.
이러다가 현실에서 속옷 디자이너가 되도 명성을 얻을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많은 속옷을 만든 어느 날.
죽은 생선의 눈처럼 빛을 잃었던 그리드의 두 눈에서 강렬한 빛이 샘솟았다.
[<화려한 꽃무늬 사이로 속살이 은근히 비치는 아름다운 남성용 속옷>의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굉장히 긴 수식언을 지닌 속옷이 탄생했다.
[획일화된 남성 속옷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놀라운 업적입니다. 수많은 재단사가 당신의 업적을 우러러 볼 것입니다.]
[<고급 재단 기술>스킬이 마스터 레벨이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경험치가 꽤 누적되어 있던 재단 기술이 즉각 반응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았던 전직 퀘스트가 드디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전직 퀘스트 <재단 기술 단련>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장인급 재단 기술>이 개방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레벨이 6 상승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과 장인급 재단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기술로 진화합...]
[...!]
[...!!]
[당신의 대장장이 기술은 파그마의 수준을 능히 초월하며 신과 필적합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 기술과 장인급 재단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으로 진화합니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
궁극의 대장기술과 재단기술을 완성하고 결합하였습니다.
모든 종류의 금속, 가죽, 천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고 그것이 ‘손으로 만드는 일’인 이상 뭐든 적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신의 권능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제작> 버튼이 활성화되며 아이템 제작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손재주 스탯에 비례하여 효과가 상승합니다.
*최소 에픽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매우 높은 확률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조건 없이 낮은 확률로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제작 아이템의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모든 능력치가 20,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오릅니다.
★아이템을 연속해서 만들 때마다 다음 아이템을 만들 때 소요되는 자원과 시간이 감소합니다. 최대 10회 중첩.
★아이템 자아 부여가 횟수 제한 없이 가능합니다.
★성장형 아이템을 의도적으로 제작할 수 있습니다.
★별도의 재료 없이 제작 아이템에 <마법>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습득하고 있는 마법만 가능합니다.
★특정 재료로 아이템에 <속성 부여>시 속성의 위력이 극대화 됩니다.
★신의 권능으로 자신이 만든 아이템에 한해서 일정한 권리를 행사합니다. 소유자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더 이상 발전의 여지없이 완성 된 스킬입니다. 잠재력 개방 스킬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
완성됐다.
템빨신 그리드의 기술을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 그리드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지난 모든 노력을 드디어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감격하는 그리드의 눈앞에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파그마에게 안식을>
최후의 전직 퀘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