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06화
“독한 놈.”
설마 자신의 손으로 직접 파울드를 죽일 줄이야.
분위기상 이런 흐름이 될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다.
아그너스는 페이커로부터 파울드를 구출한 이후부터 계속 파울드의 곁을 지켰다. 템빨단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등 뒤로 숨겼을 정도다. 급기야 파울드를 마주보고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의 표정은... 연기라고 믿기지 않게도 쓸쓸하고 안타까워보였다. 마치 친구를 떠나보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구도와 분위기를 놓고 봤을 때, 아그너스가 파울드를 공격할 거라고 예측하는 건 사실상 힘들었다.
“하긴 그 미친놈이 그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지. 파울드를 회복시키지 않고 개피로 놔뒀을 때부터 의도를 눈치 챘어야했는데.”
“회복시키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걸 거다. 부서진 핵을 수복하기 전까진 재생력이 거의 봉쇄 되니.”
“그래...? 더 아깝네. 아쉬운 마음이야 페이커 네가 훨씬 더 크겠지만...”
“...”
플레이어 중에 아그너스를 이해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아그너스의 과거를 알고 있는 템빨단 또한 마찬가지다. 아그너스의 과거사를 동정하긴 했지만 어쨌든 적이다.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아그너스는 템빨단의 영토를 침범한 전력이 있다. 그의 손에 죽은 템빨단원과 템빨국 병사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특히 폰이 아그너스를 혐오했다. 체다카 길드 시절부터 당한 게 많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동료들과 함께 아그너스를 도와준 적이 있긴 하지만 좋아서 했던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대놓고 무시까지 당했으니 더욱 마음에 안 들었다.
“...”
폰은 입만 산 스타일이 아니다. 아그너스를 욕하면서도 주변을 제대로 살폈다. 상처 입은 그림자단원들과 마창단원들에게 물약을 챙겨주고 붕대도 감아줬다.
그리드도 묵묵히 할 일을 했다. 휴대용 용광로와 모루를 꺼내 단원들의 깨진 무기와 갑옷을 수리해줬다. 이럴 땐 템빨골과 갓 핸드가 상당히 도움이 된다. 양산형 아이템은 녀석들도 곧잘 수리했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마음을 추스른 그가 입을 뗐다.
“몇 명이나 죽었지?”
부상자까지 전부 헤아릴 필요는 없다. 템빨국엔 성녀가 있다. 설령 팔다리가 잘려나갔어도 일단 살아남은 이상 완치시킬 수 있었다.
“그림자단의 사망자는 175명이다...”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심지어 그림자를 이식해 키운 최상급 전력을. 그런데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페이커와 그림자단원들을 그리드가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 명, 한 명 모두와 일일이 마주치는 눈빛이 깊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그림자단 덕분에 파울드를 소멸시키고 아그너스를 죽일 수 있었어. 고생 많았다.”
템빨단이 리치 파울드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한 가장 큰 이유는 아티팩트 제작 능력 때문이었다. 특히 ‘부조리’라는 수식언을 단 아티팩트들과 영구기관. 그것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아그너스와 아그너스의 언데드들에게 쥐어질 경우 감당하기 어려워질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비록 아그너스가 파울드의 힘을 흡수하긴 했지만. 그래서 아티팩트 제작 스킬이 생겼을 가능성이 높지만 괜찮다. 아그너스 혼자서 부조리 시리즈와 영구기관을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템빨그림자단이 없었으면 이루기 힘들었을 업적이었다.
그림자단의 실력을 알고 있던 그리드조차 그림자단이 설마 이 정도로 잘해줄 줄은 몰랐다.
상대가 대륙 어디에 숨어도 반드시 찾아내고 멸하는 어쌔신 집단...
템빨그림자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유능하고, 강하고, 멋지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부터 그림자단에 지급하는 장비의 질을 한 등급 높이도록 하지.”
템빨국 산하의 모든 군대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병사들에게 보급하고 있다.
과거에 그리드가 직접 만들었던 양산형 세트. 사용 조건이 낮고 단점이 적은 그 아이템들을 라인하르트의 대장장이들이 도안화해 대량 생산하는 것이었다.
꽤 쓸 만한 아이템이었다.
능력치를 저하시키는 부정 옵션이 없고 동급 아이템보다 뛰어난 내구도와 위력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형태’가 이상적인지라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똑같은 도안으로 만든 똑같은 아이템이라도 등급이 나뉘는 법이다.
예를 들어 가장 많은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양산형 그리드의 검’만 해도 노말부터 유니크까지 등급이 다양했다. 물론 고등급일수록 희귀하기 때문에 군대의 수준에 따라서, 병사의 직급에 따라서 각기 다른 등급의 아이템이 지급됐다.
그중 템빨그림자단은 비록 숫자가 적지만 템빨국 내에서 상(上)급으로 분류되는 조직이었다. 모든 단원에게 에픽 등급의 아이템을 보장했고 조장급 이상의 인사에겐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보급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마저도 부족하다고 느꼈다.
모든 단원에게 유니크 등급의 양산형 세트를 무장시키고 조장급 이상의 단원은 일류 기사급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라인하르트의 몇 안 되는 장인들이 혼신을 다해 만든 작품을 하사할 거란 뜻이다.
그림자단의 가치를 특상급으로 규정하는 격이었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활약한 그림자단에겐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차고도 넘쳤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당연히 페이커다.
감격해서 몸을 떠는 그림자단원들을 자랑스레 바라보는 페이커.
그리드의 넓은 시야를 이 순간 그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크라우젤에게 품어온 경외. 그것과 똑같은 감정이 페이커에게도 향하기 시작했다.
“살생부에 아그너스의 이름을 적었나?”
마지막에 아그너스의 숨통을 끊었던 페이커의 일격을 떠올린 그리드가 질문하자 페이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드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살생부의 위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플레이어를 상대로는 효율이 비교적 나빴기 때문이다. 사망 페널티를 2~3배 늘린다는 건 필시 무서운 기능이고 당하는 입장에선 치명적일 수밖에 없지만(레벨이 높을수록 더욱 더) 아무리 그대로 일회성이다. 사용하는 입장에선 네임드급 NPC나 몬스터를 대상으로 삼는 게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페이커는 기어코 아그너스를 명부에 올렸다. 템빨국에 위협이 될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숭고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기묘한 마력의 돌이라는 게 있어.”
<기묘한 마력의 돌>
등급:신화
종류:소모품
대상 아이템의 등급을 돌의 등급과 동일하게 성장시킵니다.
그리드가 아끼고 아껴온 아이템.
설사 무형검이 전설 이하의 등급으로 판정됐을지언정 사용하지 않았을, 정말로 귀중한 아이템이다.
“이걸 너를 위해 쓸 거다.”
숭고한 의지에 숭고한 의지로 보답한다.
뜨거운 감정이 깃든 그리드의 눈빛을 마주한 페이커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생전 처음 보여주는 미소였다.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건만 태양처럼 밝고 찬란한 미소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축하한다!!”
고맙다는 말조차 실례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페이커를 폰이 얼싸안으며 축하해주었다. 폰 또한 오늘 본 페이커와 그림자단의 활약에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덕분에 마창단원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옥 같은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
에치란 도시에 공왕이 직접 찾아왔다.
공국 각지의 마법 좌표를 확보하고 싶다는 그리드의 요구를 감당하기엔 시장의 권한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까닭이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국가의 좌표를 공개하고, 마법적 용도로 사용하게끔 허가한다는 것.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좌표를 이용해 텔레포트를 타는 등 기습적인 전술을 경계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수고가 들었다.
하지만 시젤 헤밀턴 공왕은 그리드와 템빨국을 신뢰하고 있었다.
세상을 몇 번이나 구해왔다는 그들을 의심하기엔, 지난 수백 년 동안 변방에 갇힌 채 살아왔던 헤밀턴 왕가가 너무 순수했다.(공녀를 치료해준 은인에게 서리여왕의 심장을 선물해줬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게다가 그리드의 제안이 너무 달콤하기도 했다.
좌표 등록을 허가해주면 공국과 템빨국을 오가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워프 게이트.
강철로 만든 거인들이 대륙을 누비던 고대에 존재했다는 마법공학의 산물...
스틱세이가 템빨국의 자본과 기술을 등에 업고 재현해낸 그 고절한 이동수단은 앞으로 공국과 템빨국을 공생시키고 발전시키는 교류의 핵심이 될 것이다.
‘됐다.’
기왕 먼 길 가신 김에 협상해 보라던 라우엘의 심부름을 잘 수행해낸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 소환으로 브라함을 불러 좌표를 찍으면 그만이었던 그가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인 이유는 동맹국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지만 템빨국의 발전을 위함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워프 게이트를 설치하는 게 목적이었다.
오랜 세월 고립돼 있었던 탓에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한 헤밀턴 공국은 매우 좋은 교류 상대였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교환하며 서로가 큰 도움을 받으리라.
‘다만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인데... 혹시라도 게이트 설치에 실패하면 낭패군.’
워프 게이트 기술이 아직 완전치 않다던 스틱세이의 염려를 떠올린 그리드가 걱정하는 그때였다.
“...그게 정녕인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리드와 나란히 앉아 식사하던 공왕의 푸른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조용히 다가온 기사가 속삭여 전해온 소식 때문이었다.
“귀하신 분의 방문이 공국에 커다란 축복을 안겨주는군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공왕에게 그리드가 질문하자 공왕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동쪽 해역에 귀신고래라는 괴물이 있었습니다. 성채만큼 거대한 몸집을 지닌 녀석이었죠. 해면을 넘나들며 움직이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놈 탓에 공국은 동쪽에서의 활동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눈앞에 바다가 있음에도 어업조차 나가지 못했을 지경이었죠. 한데 죽었다는군요.”
“그것 참 기쁜 일이군요.”
내가 죽인 녀석 같은데... 그리드는 입이 근질거렸지만 자칫 생색내는 꼴로 보일까봐 섣불리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침묵이 득이 되는 법이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대륙인들은 그리드 전하를 신이라고 숭배한다지요. 전하께서 이루신 업적들을 전해 듣고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공감하진 못했었죠. 솔직히 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을 신이라고 숭배하는데 어찌 공감하겠습니까? 저와 공국은 전하를 단지 영웅으로 보았지요. 하지만 오늘 생각이 바뀌는군요.”
“...?”
“이곳에 오는 동안 전하께서 동쪽에서부터 ‘나타나셨다’는 목격담을 수차례 전해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귀신고래를 토벌하신 거겠지요. 그것이 설령 우연이었을지언정... 아니, 도리어 우연이었기에 더더욱 큰 운명을 느낍니다.”
공왕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해졌다. 헤밀턴 공국측의 인사들이었다.
“공국은 폐쇄적입니다. 제국의 경계를 두려워하셨던 선조들께서 감히 대륙을 바라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켰죠. 그렇게 우리만의 문화를 구축했습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죠. 우리는 빛의 신을 믿지 않습니다. 바다의 신을 섬기며 언젠가 그분께서 귀신고래를 멸하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어왔지요. 저희가 섬겨온 바다의 신이 그리드 전하가 아니었을까요?”
귀빈을 뛰어주기 위한 실없는 농담 같지만 아니었다. 깊은 호감과 신뢰가 깃든 말이었다.
[아스가르드의 신앙이 침범하지 못했던 외딴 나라에 당신의 신화가 움트기 시작합니다.]
[신위 스탯이 1 상승하였습니다.]
“...”
아그너스에게 죽고 더럽혀진 뒷골목의 백성들과 175명의 그림자단원들이 잿빛으로 흩어진 다음날.
뒤늦게 그들을 애도하듯 쏟아지는 유성우 아래에서 그리드는 실감했다.
아직은 미약하여 때때로 의심받는 자신의 신화가 세상에 분명히 새겨지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