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04화
<살생부>
척살 대상을 지정합니다.
지정 가능 횟수는 <란스티어의 술법>스킬의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3개씩 추가됩니다.
*척살 대상이 감각 범위 내에 있을 경우 위치를 탐색하기 쉬워집니다. 척살 대상에 한하여 명중률과 약점 공격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대상에게 입히는 피해량이 3배 증가합니다. 이 효과는 대상이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척살 대상을 살해 시 대상은 영구히 소멸합니다. 단, 일부 특별한 존재에겐 적용되지 않는 효과입니다. 대상이 플레이어일 경우 사망 시 얻는 페널티를 최소 2배, 최대 3배 증가시킵니다.
현재 살생부 명단:8/9
현재 척살 대상 목록:파울드(플레이어 ‘아그너스’ 소유의 리치)
살생부는 그리드의 <아이템 창조>스킬과 동격에 놓인 스킬이다. 하지만 사용자에게 물질적 이득을 주지 않는다. 단지 누군가를 죽이고 함께 소멸하는 덧없는 스킬에 불과했다.
사용 가능 횟수가 비교적 많아봤자 위안이 되지 않는다. 절세의 도안(圖案)을 낳는 아이템 창조, 최강의 스킬을 빚는 검술 창조, 최악의 망자를 일으키는 사자 창조와 비교해서 불합리 할 정도로 초라했다.
하지만 페이커는 썩 마음에 들었다.
살생부는 어쌔신의 본분을 지적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강력하다. 쾌(快)와 살(殺)을 극대화하여 단기 결전하는 어쌔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스킬이었다.
대마법의 영역에 있는 파울드의 견고한 실드를 ‘평타’로 부수며 확신했다. 덧없이 지는 스킬이기에 더욱 더 찬란하다고.
푸우욱!
정령의 바람을 이용해 그림자 이동을 끊임없이 순환시킨 끝에.
대상을 명부(冥府)로 보낼 그림자 검이 드디어 파울드의 복부에 닿았다.
정확히 예상한 시간에 도착해준 폰의 지원을 발판 삼은 일격이었다.
[대상이 데미지를 무효화합니다.]
회심의 일격이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페이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죽음의 룬에 귀속 된 힘 중 하나인 <푸르푸의 권능>은 오래 전부터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소환수를 강화하는 것으로 모자라 지정한 소환수가 입는 데미지를 최대 2회 무효화시키는 권능.
수 년 전 그리드가 직접 싸우며 밝혀낸 아그너스의 한 수를 페이커가 잊을 리 없다.
푸욱!
페이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검을 우겨넣었다.
또 한 번 무효화되는 데미지를 확인하며 더욱 깊숙하게.
검날을 이루는 그림자를 진동시켜 다단 히트 공격을 유도했다.
그림자를 움직이는 <영륜> 스킬의 활용이었다.
그림자 이동을 쉼 없이 반복한 것으로 모자라 병사까지 일으킨 여파로 마나가 고갈된 상태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전설의 어쌔신은 생명력을 정신력으로 치환한다. 마나가 없으면 마나 대신 생명력을 소모해서 스킬을 사용하는 식이다.
일찍 사그라지기에 화려히 타오르는 불꽃.
그게 어쌔신이다.
페이커는 진즉에 살 생각을 버렸다. 종적이 묘연했던 세월 동안 더욱 더 강력해진 아그너스의 실력을 가늠한 시점부터였다.
“커억...!”
파울드가 드디어 날것이 됐다.
고강한 실드와 망자들의 장벽, 그리고 죽음의 룬의 권능.
살신(殺神)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모든 것이 이 순간 벗겨지고 죽음이 명멸한다.
진짜, 진짜로 죽는다...
육신을 이루고 영혼을 붙잡는 뼈대가 되어주었던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간 것을 느낀 파울드가 덜덜 몸을 떨었다. 겁에 질린 그의 눈동자가 페이커를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이토록 뚜렷하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보았다. 이미 한 번 죽은 경험이 있음에도 말이다.
콰직!
댐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무한한 마력을 생성하던 리치의 핵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절대 다시 잇지 못할 균열이었다.
“끄아아악...!”
회광반조.
끝을 직감한 파울드가 하늘 위 태양의 방해를 극복했다. 거칠게 흔들리는 핵의 단말마를 외면하고 복잡한 대마법의 수식을 짰다.
한 시대를 풍미한 것으로 모자라 후대까지 이름을 남긴 종사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자 발악하는 것이다. 그는 혼자 죽을 생각이 없었다. 눈앞의 사신과 동귀어진 할 각오였다.
하지만 그의 결심보다 아그너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콰앙!
그림자에서 솟구친 새로운 데스나이트가 페이커의 목덜미를 붙잡아 땅에 메쳤다. 산산조각나기 직전이던 파울드의 핵이 간신히 지켜졌다.
푸욱!
페이커의 몸 위에 올라타 단도를 쑤셔 박는 데스나이트.
삐걱거리는 백골 위로 그림자의 잔영을 넘실거리는 놈의 기운이 파울드에게도 낯익었다.
“25대...”
“저항이 과하다.”
아그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음성은 차분한데 발걸음이 거칠다. 분노를 애써 삭이는 눈치였다.
“알고 있나? 너를 깔아뭉갠 그놈은 본디 반푼이였다. 한때 전설이었던 놈치고 할 줄 아는 게 적었지. 그래서 내개 패배했고 내 종이 되었다. 아, 말해봤자 실감이 나지 않으려나. 너희가 번헨 열도에 막 발을 들였을 때는 이미 그놈이 사라진 뒤였을 테니.”
명백한 도발이었다.
너희가 번헨 열도를 알기 전부터 나는 이미 그곳을 공략했고, 성취했다. 전설? 살신? 네깟 놈이 날뛰어봤자 나와 비교하면 애송이다. 그런 뜻이 담긴 언사였다.
“...”
페이커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과 그림자를 압박하고 있는 25대 란스티어의 텅 빈 눈을 말없이 응시했다.
표정이 있을 리 없는 백골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애원으로 화하는 슬픔이었다.
죽여다오.
마치 그런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눈앞에 너무나도 또렷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25대 란스티어를 살생부 명단에 올려 멸하라는 내용이었다.
선대를 향한 예우가 아니다. 편히 쉬게 해주라는 배려도 아니었다.
전직 퀘스트가 발생한 이유는 단지 란스티어의 술법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함이다. 시스템은 25대 란스티어를 외인(外人)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지하에 묻힌 채 사라졌어야 할 시신이 파헤쳐진 것으로 모자라 바알의 계약자의 수족이 됐으니 경계하는 것이다.
“망자가 생전의 지식과 기술을 되찾기 위해선 온갖 공을 들여야 한다. 그 반푼이를 여기까지 육성하느라 몇 년을 개고생 했다는 말이다. 고작 이딴 곳에서 꺼낼 패가 아니었는데. 쯧.”
아그너스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그는 그리드와 비슷한 시간에 번헨 열도를 공략한 거물 중의 거물이다. 그리드와 달리 마지막 섬까지 도달하진 못했지만 란스티어가 지켰던 61번째 섬은 그리드보다 먼저 공략했다.
Satisfy 시간으로 족히 10년은 더 된 일이다. 2차 국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제32위 대악마 벨리알이 막 인세에 등장했을 시기였다.
그 긴 세월 동안 아그너스는 란스티어를 성장시키기 위해 제법 노력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던 광견 시절에도 전대 전설의 데스나이트가 지닌 가치를 알아보긴 했던 것이다.
다만 절박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흘러간 세월에 비하면 크게 성장시키지 못했다. 광견 시절의 자신은 지금에 이르러 봤을 때 혐오스러울 정도로 무능했다.
그 탓에 최근에 더욱 고생했다.
옛 연인을 향한 미련을 버리고 이성을 되찾은 아그너스. 광기를 정돈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란스티어의 육성에 집중하는 일이었다.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던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스티어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실전에 기용할만한 패가 아니었다.
실력을 완전히 성장시키지 못했다는 점은 부차적인 문제다. 란스티어의 자아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소환할 때마다 전생의 기억과 자아를 조금씩 되찾는 까닭에 지배력 소모가 급격히 늘어났다. 앞으로 최소 반년은 더 가둬놓고 사육해야 했을 놈이다. 마음 같아선 지금도 당장 역소환 시키고 싶었다. 소환 유지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항이 거세졌으니까.
‘조금만 더.’
페이커의 불사가 아직 유지 중이다. 그 전에 란스티어를 회수하면 제압이 풀릴 공산이 크다.
‘3초.’
불사의 남은 시간을 잰 아그너스가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자의 군단을 돌파하며 달려오는 폰과 기사들이 보였다.
준마를 수족처럼 부리며 창을 휘두르는 50명의 집단.
템빨그림자단과 비교해서 소수지만 종합적인 무력 면에선 뒤처지지 않아보였다. 기사란 그런 존재다. 어쌔신과 다른 고결함이 있어 단단하다. 하지만 정작 폰은 페이커보다 한 수 아래였다.
구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페이커를 마무리하고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아그너스으!!”
죽음을 앞둔 페이커를 보고 눈이 뒤집힌 폰이 살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그너스 입장에선 우스울 따름이다. 바알의 계약자인 그가 경계하는 플레이어는 한 손에 꼽는다. 폰의 위명이 꽤 대단할지언정 거기엔 끼지 못했다.
격이 다른 것이다.
“불합리하다고 느끼겠지. 분해도 어쩌겠나. 너희가 약자인 걸.”
단단히 미쳐있던 시절엔 중요한 순간마다 강자의 권리를 외면했었다. 발아래 약자들의 모습에서 종종 과거의 자신을 투영했던 까닭이다.
몇 번을 곱씹어 봐도 병신이었다.
나름 보람 있는 일들도 있었지만... 타인을 위해서 싸우기보단 순전히 자신의 만족을 우선시 했어야했다.
나도 한 번쯤은 행복을 논해봐야 하지 않겠나.
“죽여.”
란스티어에게 명령을 내리는 순간 지배력이 또 한 움큼 빠져나갔다.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지는 망자들의 모습이 눈에 띌 지경이다.
하지만 괜찮다.
페이커만 없애면 수월해진다.
끼긱.
그림자 압박에 저항하는 페이커 탓에 움직임이 다소 느려진 란스티어가 머리 위로 단도를 치켜세운다. 그대로 내리꽂아 페이커를 격살하기 직전이었다.
스륵...
아그너스의 시야에 붉은 천이 흩날렸다.
길디 긴 천이었다. 몸에 두르면 바닥에 끌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하지만 사내는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아그너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난 사내.
요란하게 펄럭이는 망토가 아니었다면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을 그가 새까만 눈동자로 아그너스를 응시한다.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건한 눈빛이었다. 제왕의 품격마저 느껴졌다.
키야악!
란스티어의 단도가 페이커가 아닌 사내를 찔렀다.
아그너스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다. 명령에 소모한 지배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다. 사내의 존재감에 집어삼켜져 본능을 드러냈을 뿐이다. 놈의 감각이 사내를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공격했다. 기껏 다잡으려던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채.
스아악!
단도에 가장 먼저 닿은 붉은 망토가 그림자로 화하여 분열한다. 흩어진 그림자가 수십 마리의 박쥐로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마침 사내가 몰고 온 광풍이 멈췄다. 단이 조금 짧아진 망토가 그의 종아리 근처에 차분히 자리 잡았다.
“네 입장에선 우리가 악당이겠지. 미안하다.”
씁쓸하게 말한 사내가 검을 꺼내 휘둘렀다. 사선으로 솟구치는 검격. 아그너스의 동체시력(민첩성에 의한)에는 형태만 어렴풋이 스칠 뿐이었다. 아그너스가 똑똑히 본 건 과정이 아닌 결과였다. 박쥐에 둘러싸인 란스티어의 두개골이 박살나는 광경. 브레스를 연상시키는 기파의 위력이 무지막지했다.
“...큭큭!”
아그너스가 실소하고 말았다.
페이커와 폰에게 논했던 불합리를 이 순간 자신이 체험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