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 03화
플레이어의 소유가 된 리치나 데스나이트는 보통의 방법으로 소멸시키지 못한다. 펫과 같은 것이다. 계정에 귀속된 것을 타인이 무슨 수로 침범한단 말인가.
한데 페이커는 파울드의 제거를 논했다.
허세일까? 역겨운 가식이 없는 성정을 보아 허세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나.’
단도를 길게 감싸 검으로 빚어낸 그림자.
저것엔 저택을 먹어치워 소멸시킨 반구보다 훨씬 더 심오한 기운이 응집되어 있었다.
‘이래서야 바알의 계약자가 무적이 맞나 의문인데.’
검성이 최고이나 바알의 계약자는 무적이라 했다.
인류를 적대하는 역할이니만큼 독보적인 면이 있어야 이치에 맞았다. 실제로도 터무니없이 강했다. 사람들은 아그너스를 혐오하는 것과 별개로 바알의 계약자의 잠재력을 두려워했다.
아그너스 본인도 자신의 한계를 짐작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을 당시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거부했던 바알의 퀘스트들. ‘민간을 학살하는’ 내용을 담았던 그 퀘스트들만 충실히 이행했어도 지금보다 몇 배 이상 강해졌을 거다.
한데 극상성이 너무 많다.
신성과 데빌 슬레이어에 이어서 이제는 그림자술법까지 카운터였다고?
이래서야 대적할 존재가 없게 될 거라던 바알의 확언이 실없는 개소리가 되지 않나.
‘...아니.’
아그너스가 페이커의 그림자 검에 담긴 기운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궁구했다.
멸(滅)의 기운.
효용에 제약이 없다.
저 힘은 죽은 자들에 한해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무엇이든 멸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가히 살수의 비기라 할 만 했다.
바알의 계약자의 <사자 창조>와 검성의 <검술 창조>에 횟수 제한이라는 제약이 있듯, 저 스킬에도 동급의 제약이 있을 터였다.
‘많은 걸 걸었군.’
전설들의 횟수 제한 스킬은 순전히 제 자신을 위해서 쓰인다. 한데 페이커는 파울드를 제거하는데 쓰려고 한다. 전설이 되고 얻은 특혜를 템빨단의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희생하겠다는 태도였다.
보통 마음가짐이 아니다. 죽음까지 불사할 공산이 크다.
검을 뽑아 쥔 아그너스가 마계 귀족의 권한을 행사했다. 3마리의 악마를 소환했다. 작위가 올랐음을 증명하는 숫자다.
“권리를 행사한다 했지. 그럼 알겠군. 강자가 권리를 행사할 때마다 권리를 잃는 약자들이 있음을.”
내가 그랬다.
마치 그리 말하는 듯한 아그너스의 눈빛을 읽은 페이커가 확신했다.
‘달라졌다.’
아그너스의 상징과도 같던 광기가 없다. 악의는 남았는가? 확신하지 못하겠다. 광기와 함께 털어냈을 수도 있고 심상에 가라앉혀 벼리고 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지금의 아그너스는 앞뒤 분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파울드와 함께 데스나이트까지 멸하겠다던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아그너스의 몇 안 되는 약점이 바로 광기였는데 그것이 사라졌으니 각오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되리라.
저벅.
아그너스가 한 걸음 움직였다. 페이커에게 섣불리 다가가진 않았다. 그의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다한들 페이커에겐 미치지 못했다. 페이커는 하이랭커보다 강력한 데스나이트 2마리의 협공을 유려하게 흘려내지 않았나.
그림자단의 포위망 뒤로 펼쳐진 도시의 풍경을 쓱 훑어 본 아그너스가 양팔을 펼치며 말했다.
“이 찬란한 도시의 뒷골목에도 권리를 잃은 약자들이 즐비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미약한 이들이었지.”
“...”
페이커가 불안을 감지했다. 아무런 정황도, 물증도 없이 아그너스의 말 몇 마디로 불길한 예감을 도출했다. 예지에 가까운 그것은 명백히 천재의 감각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치를 주었다.”
쿵.
아그너스가 딛고 선 땅을 발로 가볍게 때렸다.
여파는 컸다.
일대의 땅이 들썩이기 시작하더니 지하에서 망자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그너스의 저택 부지는 이미 묘지가 되어있던 것이다.
이 넓은 땅의 지하에 수백 구의 시체가 묻혀있었다.
끄억... 꺼어어...
죽을 때의 고통어린 표정이 그대로 각인된 채 사이한 안광을 빛내는 구울 무리. 족히 400에 이르는 숫자가 아그너스의 손짓 한 번에 마치 군대처럼 진형을 갖췄다. 왕을 보위하는 근위대가 따로 없었다.
페이커가 깨달았다.
아그너스의 광기와 악의는 사라진 게 아니라 정돈됐을 뿐이다. 광견이 광인이 되었다.
“동료들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습격해온 심중은 이해가 간다. 내가 이변을 눈치 채고 지옥으로 도망치기라도 할까봐 발을 묶어놓으려던 거겠지. 하지만... 감당할 수 있나?”
냉소를 흘린 아그너스가 손가락을 퉁기자 놈의 악마들이 입에서 섬광을 쏘았다. 표적은 페이커가 아닌 그림자단원들.
아그너스는 사자의 발을 묶는 그림자단원들의 숫자를 줄이고 자신의 군대를 늘릴 생각이었다.
이제부터 진짜였다.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페이커는 최대한 빠르게 목적을 달성해야했다.
스륵.
그림자에 잠긴 페이커가 아그너스 군단의 기감을 모조리 속였다. 처음부터 파울드의 그림자로 이동하는 악수는 두지 않았다. 뻔히 경계하고 있을 터였기에. 페이커는 오히려 아그너스의 그림자에서 나타났다. 허를 찌름과 동시에 악마의 화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페이커가 상정하지 못한 위험이 아그너스의 품에 도사리고 있었다.
개골.
작은 개구리였다.
페이커의 무표정이 깨졌다.
벌레 잡듯 긴 혀를 쏘는 놈의 머리 위에 떠있는 ‘체파르데아’라는 이름이 범상치 않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흑적색.
지옥에서도 위계가 대단히 높은 네임드라는 뜻이었다.
푸화학!!
작은 혓바닥이 페이커에게 도달하며 확장된다. 크기가 변할 때마다 속도가 더해졌고 궤도가 달라졌다. 환술로 느껴질 지경이었지만 개구리는 단지 혀를 뻗었을 뿐이다.
‘다행히 깊진 않다.’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허리가 뜯겨나간 페이커가 오히려 평정을 되찾았다.
입은 데미지는 고작 4천. 물리적인 상태이상도 없다. 중독이 발생했지만 전설의 권능으로 저항했다.
체파르데아는 염려와 달리 약했다. 인계에 오른 악마가 약해지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염려보다 훨씬 더 약했다.
본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한손에 꼽히는 고위 대악마와 천사들은 인계에 섣불리 강림하지 못한다더니, 이 개구리도 그런 듯했다.
터텅, 텅!!
체파르데아의 혀가 애꿎은 지면을 연속해서 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페이커가 서있던 자리였는데 그림자로 숨어든 탓이다.
-개고올!! 이 몸의 공격을 맞고도 살아남다니잇!
“네가 약해서 그렇다. 쯧.”
아그너스는 체파르데아의 개입이 달갑지 않았다.
인계에서 체파르데아의 능력치는 형편없을 정도로 격하된다. 하지만 페이커는 눈치 챘을 것이다. 체파르데아의 혀는 녹록치 않다. 빠르게 쏘아져 아그너스에게 접근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견제한다. 체파르데아가 있는 이상 어지간한 칼날은 아그너스의 몸에 닿지도 못했다.
‘이젠 미끼 노릇도 못하겠군.’
어쌔신은 화려하게 타오르되 빨리 꺼지는 불꽃이다.
지금부터 페이커는 집요하게 파울드만 노릴 것이다.
스파앗!
페이커의 신형이 파울드의 그림자를 타고 나타났다.
당연히 대비하고 있었다. 2마리 데스나이트가 일제히 검을 내리꽂았고 파울드의 반지가 빛을 뿜으며 냉기를 퍼뜨렸다.
페이커가 곧장 사라졌다가 바로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아직 냉기가 닿지 않은 위치였다.
파울드가 만든 인영(人影)은 하나가 아니다. 태양의 각도와 구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희미한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너울지고 있었다.
그 모든 그림자를, 페이커는 쉴 틈 없이 넘나들며 파울드를 공격했다.
<그림자 이동>이 ‘시야에 보이는 그림자 중 하나를 표적으로 지정한 뒤’ 전개하는 스킬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 순간 페이커의 모습에 넋을 잃었을 것이다.
움직이고, 쪼개지고, 점멸하는 그림자를 시시각각 포착하고 지정해서 스킬을 연계하는 솜씨는 차라리 기적이었으니까.
쩌정!
텅!
쩌정!!
텅!
페이커가 파울드의 측면에서, 후위에서, 정면에서, 또 같은 자리에서, 심지어 발밑에서 나타날 때마다 데스나이트들의 검이 땅을 때렸고 파울드가 몸에 겹겹이 두른 실드가 몇 장씩 깨어졌다.
마나핵이 손상 됐을 뿐더러 높이 뜬 태양 탓에 마법의 운영이 신속하지 않다. 란스티어의 움직임을 제약할 대마법을 쓰기 힘들다.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파울드가 다급히 소리쳤다.
“도와라!”
비록 바알의 계약자에게 붙잡힌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힘겹게 얻은 새 삶이다. 수백 년의 노역 끝에 이룬 부활이었다. 이딴 곳에서 허무히 죽고 싶지 않았다.
아그너스는 이미 수를 썼다. 그의 명령을 받든 수백 마리의 구울이 파울드에게 몰려가고 있었다.
‘단주님을 지원해야 한다!’
사자의 발을 묶어놓고 있던 그림자단원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악마들이 쏘는 광선에 기습당해 중상을 입거나 죽은 단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의 목숨 따위 하찮다는 사실을. 그림자를 ‘심는’ 란스티어의 술법은 어쌔신을 빠르게 육성하므로 자신들은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애썼다.
이유는 단 하나. 적이 아그너스였기 때문이다. 죽으면 도리어 단주의 발목을 잡게 된다.
“쯧.”
템빨그림자단의 분전이 아그너스의 인내심을 긁었다.
망자의 군대를 돌파하며 검광을 흩뿌리는 한편 함정을 설치하고 단도를 투척하는 식으로 사자의 추적을 늦추는 그림자단의 솜씨는 적의 짜증을 부추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명성이 과하다 싶었는데 오히려 반대였나.’
이참에 모조리 죽여 놓는 편이 낫겠다.
악마들의 제어에 집중하던 아그너스가 악마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직접 전장에 뛰어들었다. 페이커에게 달려드는 구울들을 홀로 등지고 서 마주 오는 템빨그림자단에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보통의 검사는 스킬을 쓸 때를 제외하면 평소 단련해온 검로로 검을 휘두른다. 그것이 스스로 연구한 것이든, 타인의 것을 베낀 것이든, 어찌됐든 검술(劍術)이었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검로는 순전히 룬의 힘에 기인했다. 그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룬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식이었다.
대장장이들이 오토(auto)로 아이템을 만들 듯, 자동으로 검술을 쓴다는 뜻이다. 모든 상황에서 최선의 검로를 자동으로 그렸다.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검사에겐 무력하게 패배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건 드문 경우고 대부분 상대를 손쉽게 압도했다.
“아그너스...!”
그림자단에 속한 플레이어들이 사납게 이를 갈았다.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동료들의 목을 여러 개씩 떨구는 아그너스의 모습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었다.
죽인 그림자단원들을 보란 듯이 언데드로 일으킨 아그너스가 피식 웃었다.
“날강도 새끼들이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거냐.”
서걱!
아그너스의 손속이 더욱 잔인해졌다. 어떻게든 페이커에게 다가가 운신을 도우려는 템빨그림자단을 참살하며, 그들의 죽은 동료를 일으켜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400마리에 가까운 구울떼는 파울드에게 밀집해 있었다. 파울드 주변의 그림자를 모조리 몸으로 덮고 페이커가 나타날 때마다 공격했다.
하지만 페이커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피칠갑을 하면서도 널뛰기를 반복해 파울드의 실드를 계속 파괴했다.
“뭐 이런 집요한 놈이...”
안 그래도 새하얀 파울드의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해졌다. 어느새 또 눈앞에 나타난 페이커의 서슬 퍼런 안광을 마주하고 거의 질색했다.
그러다가 기회가 도래했음을 깨달았다.
구울과 구울 틈새에 있는 아주 작은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온 페이커가 구울들에게 옷깃을 붙잡힌 것이다. 초조해져서 무리한 눈치였다.
못미더워도 명색이 데스나이트인 놈들의 검이 페이커의 등에 박혀 들어가는 광경도 시야에 스쳐지나갔다.
역공의 적기였다.
하지만 파울드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전설은 쉽게 죽지 않는다. 브라함과 같은 시대를 살았기에 안다.
지금 페이커를 노려봤자 놈은 몇 초간을 살아남을 테고 그 틈에 저 불길한 검이 내 핵을 관통하는 수가 있다.
지잉-
파울드의 반지 중 2개만 빛을 뿜었다. 마법의 위력을 강화시키고 시전 속도를 높이는 아티팩트였다. 그의 몸 위로 다시 실드가 씌워졌다. 한 겹, 두 겹, 세 겹... 평소보다 시전 속도가 확연히 느리긴 했지만 견고하게 덧씌워지길 반복했다.
페이커가 그토록 고생해서 파괴한 중첩 실드가 부활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페이커는 동요하지 않았다.
데스나이트들의 검에 꼬챙이처럼 꿰여 울컥 피를 토하고, 구울들의 썩은 손에 사지를 붙잡혀 끌려가면서도 그는 기어코 한 발을 더 내딛었다.
일직선으로 검을 꽂아 넣었다.
캬악!
선두의 구울이 그림자 검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크어억!!
그 뒤에 겹쳐있던 구울 세 마리도 단말마를 토했고.
캬악!!
파울드의 코앞에 장벽처럼 섰던 구울까지 잿빛으로 산화했다.
단 한 번 우겨넣은 검이 파울드를 지키기 위한 모든 안배를 무참히 격살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파울드의 얼굴엔 환희가 찼다.
“늦었다!”
수많은 아티팩트를 창조해 역사에 이름을 새긴 종사(宗師).
리치로 부활하지만 않았어도 위인으로 길이 남았을 인물이 고작 실드 몇 장을 겹쳐 세웠다고 희열마저 드러낸다.
그만큼 페이커에게 큰 위협을 느꼈었다는 뜻이다.
페이커가 활로를 포기하면서까지 꽂아 넣은 회심의 일격. 아니, 차라리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그 공격이 코앞에 당도하고 있음에도 파울드는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