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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46화 (1,336/1,794)

템빨 68권 - 02화

Satisfy는 지구보다 큰 세계다. 규모를 서대륙으로 한정해도 마찬가지다. 숨어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클립스를 흡수한 템빨그림자단의 추적술은 인외의 경지에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게 가능할 정도. 굳이 비유하자면 대규모 금속 탐지기와 인공위성을 갖춘 격이다.

대상의 외모, 성격, 성향, 배경 등을 낱낱이 파헤쳐서 경로를 파악하고 탐색하는 기본적인 추적술을 마스터했을뿐더러 이클립스의 독문술법과 추혼향까지 적극 활용하는 템빨그림자단의 솜씨에서 자유로울 상대는 세상에 몇 없었다.

게다가 서대륙 국가 상당수가 템빨국에게 호의적인 상황이다.

제국을 필두로 수많은 국가들이 탐색에 공조해주고 있었다.

페이커는 아그너스가 지옥에 틀어박히지 않은 이상 금방 찾아낼 거라고 보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찾았습니다.

-대기해라.

전음.

플레이어들은 귓속말이라고 부르는 시스템. 모든 플레이어는 이 시스템을 당연하게 누리는 반면 NPC는 다르다. 특정 경지에 오르거나 따로 기술을 배우지 않는 이상 전음을 쓰지 못했다.

템빨그림자단은 전원 습득했다. 이 또한 이클립스를 흡수하며 얻은 혜택이다. 대륙에서 가장 은밀했다는 조직답게 전음을 다루는 공능을 보유했던 것이다.

단원들의 전음을 받고 목적지에 도착한 페이커가 지도를 펼쳤다.

스컹크가 직접 만든 지도였다. 방위, 지형, 구조물과 구조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다. 비록 종이 한 장이지만 정보의 보고(寶庫)라고 할 만 했다.

“...”

복잡한 내용이 페이커의 뇌리에 순식간에 각인된다.

에치란 도시.

머나먼 공국의 외진 땅에 위치한 중소도시의 모든 정보를 페이커는 명로하게 파악하고 기억해냈다. 처음 온 도시가 고향땅처럼 익숙해졌다.

천재의 영역이다.

템빨국 이면(裏面)의 지배자는 그런 존재였다.

-각 조장은 들어라.

페이커가 그림자단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나의 명령을 내릴 때마다 에치란 도시의 출입구가 하나씩 봉쇄되었고 거리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스스슥...

도시의 그림자가 한 저택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 도시에서 유일하게 불 켜진 건물이다.

-모든 퇴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주민들의 피신이 끝났습니다.

-시장이 병사들을 물렸습니다.

일처리가 빠른 이유는 그림자단의 실력에 더불어 시장의 협조 덕분이었다.

헤밀턴 공국은 템빨국과의 우호를 선택한 바.

공국 전역에 템빨국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시장은 한술 더 떠서 군대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마음이 감사하긴 했지만, 페이커는 당연히 거절했다.

아그너스를 상대로 군대를 쓰는 건 하책 중의 하책이었으니까.

아그너스의 근본은 네크로맨서.

전투가 지속될수록, 시체가 늘어날수록 강해진다.

그가 있는 전장에는 사람이 최대한 없는 편이 좋았다.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하다만.’

아그너스의 전투는 네크로맨서와 궤가 달랐다.

그리드의 전투를 대장장이의 전투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충분한 준비와 절차를 통해 전장을 서서히 지배해나가는 네크로맨서와 달리 아그너스는 대부분 순식간에 전장을 압도했다.

검사 랭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검술로 적을 직접 베었고,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동시에 운영해 대마법사급의 순간 화력을 뽐냈으며, 다쳐도 금세 회복하고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등.

‘전투 초반에 약하다.’는 네크로맨서의 약점이 그에겐 없다. 후반으로 갈수록 강하다는 강점은 고스란히 적용됐다.

룬, 업적, 칭호, 직업 등으로 온갖 한계를 극복해왔으니 당연했다.

‘내 모든 걸 끄집어내야한다. 밑바닥까지.’

페이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담기는 광경은 우뚝 선 괴물의 저택이었지만 실상 그가 돌아보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깊이, 더 깊이 침잠한다.

홀로 7대 길드의 일각을 궤멸시켰던 살신의 살기를 벼렸다. 제국의 기둥 행세를 하느라 안 그래도 반쪽짜리에 불과했던 기술의 연마를 등한시한 전대 란스티어를 반면교사 삼아 기술을 되새겼다. 위대한 대장장이를 지키지 못한 후회를 곱씹으며 마음을 단단히 만들었고, 그림자 속에서 지켜온 왕국을 떠올리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하늘에 닿을 재능.

템빨국을 ‘지키는’ 역할 탓에 긴 세월 드러내지 못했던 고귀한 재능이 이 순간 태동한다.

스아아악!

단원들을 뒤로 물린 페이커가 땅 위에 손을 얹자 파도를 이룬 수천 개의 그림자가 저택을 향해 굽이굽이 뻗어나갔다. 붉은 벽돌과 투명한 창문들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림자에 침식 된 저택.

그것은 이미 페이커의 소유라고 봐도 무방했다.

콰득! 콰자자자자작!!

저택을 침식한 그림자가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신화 속 괴수의 입이 저리 거대할까. 저택을 통째로 물어뜯고 집어삼킨다.

‘어마어마하군.’

‘그새 더 강해지셨어.’

그림자단이라고 해서 전부 NPC는 아니었다. 템빨단에 오랫동안 몸담고 신뢰와 실력을 쌓은 플레이어도 소수 소속되어 있었다.

어쌔신 랭커인 그들에겐 페이커가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번 임무의 표적인 파울드와 임무 중 충돌할 수밖에 없는 아그너스. 두 사람 모두 저택과 함께 그림자에 통째로 집어삼켜졌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순간.

저택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응축되어가던 그림자의 반구가 크게 출렁였다.

그 안에서 튀어나온 건 누군가의 손.

거죽이 들러붙어 골격의 형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비쩍 마른 손이었다. 창백한 피부 위에 도드라진 혈관들이 시체를 떠올리게 했다.

“산개.”

페이커가 짧게 명령함과 동시에.

스파파파파팟!!

저택을 둘러싸고 있던 300명의 그림자단원들이 일제히 모습을 감췄다.

물론 현장을 이탈한 건 아니다. 그림자나 지물 뒤에 모습과 기척을 숨겼을 뿐, 포위망은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했다.

콰드득!

그림자를 젖히고 나온 시체의 손이 갑자기 확대됐다. 어느새 페이커의 코앞까지 날아온 것이다. 허리를 뒤로 젖혀 피한 페이커가 발을 올려 찼다. 부츠 끝에서 솟아나온 날카로운 칼날이 상대의 복부를 꿰뚫었다.

한데 기세가 죽질 않는다.

물리 내성이 굉장히 높은 상대였다.

서걱!

적의 복부에 꽂아놓은 발을 축으로 회전, 단도를 휘둘러 울대를 벤 페이커가 몇 번의 검광을 더 그린 뒤 뒤로 물러섰다.

크르르...

짐승 같은 숨소리를 토하는 상대.

목과 가슴에 깊숙한 칼자국을 새기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창백한 피부에 새겨진 혈관들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죽은 자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아그너스의 사자’라는 이름을 머리 위에 달고 있는 놈이 다시 한 번 거리를 좁혀왔다. 진각의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돌진력이 무시무시하다. 속도만 놓고 보면 그리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페이커가 아슬아슬하게 피할 정도였다.

“기관(機關)의 출력을 더 높여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사자로는 저 이상의 출력을 견디지 못한다.”

“더 나은 놈을 만들지 못한 네 잘못이란 거군.”

“마땅한 재료를 구하지 못한 탓이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의 반구를 가볍게 헤치고 나오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정체, 아그너스와 파울드였다.

페이커의 시선이 파울드에게 꽂혔다.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더니 엘리자베스의 제보가 정확히 맞았다.

페이커가 용건을 밝혔다.

“아그너스, 위험성을 고려해 리치 파울드를 제거하겠다. 협조해도 좋고 저항해도 좋다.”

“무슨 권리로?”

“강자의 권리.”

피식 웃으며 반문하던 아그너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비난 받아 마땅할 부당한 권리를 대놓고 주장하는 페이커의 당당한 태도에 잠시 당황한 것이다.

“과연 페이커다.”

아그너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같잖은 대의나 논리를 핑계로 내세우지 않고 본질을 파고드는 페이커에게 그는 호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강함과 약함이란 상대적인 법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아그너스.

이미 파울드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내가 그리 만만한가? 이 시대에선 내 명성이 형편없나보군. 브라함 놈이 내 업적들을 폄하한 게 분명해.”

불쾌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파울드를 페이커가 빠르게 관찰했다.

혈색이 창백할 뿐 사람과 똑같은 생김새. 여태껏 만나온 리치는 백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전혀 달랐다.

무심한 얼굴에 표출되는 것은 자신감. 작고 왜소한 체구가 형편없이 약해보이지만 마법을 펼치는데 있어서 육체의 강건함은 무의미하다.

‘전부 다 직접 만든 아티팩트인가?’

목걸이와 2개의 팔찌, 그리고 10개의 반지. 파울드는 액세서리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바지 밑단에 가려져서 그렇지 발찌까지 찼을 것이다. 어쩌면 저 머리끈도 아티팩트일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보다 강하겠군.’

엘리자베스의 추측이 맞다면 파울드는 아티팩트를 제조할 수 있다. 크라우젤이 그리드를 통해서 제보한 파울드의 부활 시기가 한참 전이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파울드가 장비하고 있는 액세서리는 대부분 파울드가 직접 만든 아티팩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아그너스의 사자가 무척 강했다. 상정 외의 전력이다.

빠르게 판단한 페이커가 단원들이 볼 수 있게끔 그림자에 글씨를 새겼다. 란스티어의 권능이다. 사자의 발을 묶으라는 내용이었고 무리하지 말라는 당부를 더했다.

스팟!

페이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아그너스의 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신속한 은신이었다.

푸화학!!

파울드의 발아래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온 페이커가 파울드의 단전을 단도로 깊숙이 찔렀다. 리치의 핵이 있는 위치. 스팩과 관계없이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론 그랬다.

[대상이 데미지를 무효화시켰습니다.]

파울드가 차고 있는 목걸이가 파랗게 빛났다. 내리쬐는 햇볕에 섞이지 않고 존재감을 발휘하는 차가운 빛이었다.

“실력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란스티어였나. 심지어 25대와 같군.”

25대 란스티어.

란스티어 중 유일하게 전설을 썼던 존재.

활동 연대가 파울드와 일부 겹친다.

투두둑, 대량의 피해를 흡수한 대가로 빛을 잃은 목걸이를 신경질적으로 뜯어낸 파울드가 대단위 마법을 전개했다.

공격성은 없었다. 라이트 마법을 수백 배 크기로 늘린 것처럼 거대한 빛의 구체를 소환해 일대를 환하게 밝히는 마법이었다.

페이커에겐 어지간한 공격 마법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내가 25대한테 죽을 뻔했던 경험이 많아서 잘 알지.”

스파아아아앗!!

리치의 무한한 마력을 양분 삼은 빛의 구체가 빠르게 확장되며 반경 50미터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웠다. 은밀하게 움직여 사자에게 혼선을 주던 그림자단원 수십 명의 모습이 명확하게 드러났고 ‘가장 가까운 그림자’로 연결됐던 페이커의 <그림자 이동>은 잠시 먹통이 됐다.

키야아아아!!

아그너스의 사자가 포효했다.

은신이 불가능해진 그림자단원들을 향해 짐승처럼 달려들더니 난폭하게 날뛰었다. 생전에 무도가였는지 구사하는 무술의 종류와 깊이가 상당했다.

“...!”

숙련된 어쌔신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드레이크의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가죽갑옷을 찢고, 꿰뚫는 사자의 공격에 처참하게 죽어나가면서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살이 뭉개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전장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서걱!

페이커가 속도를 높였다. 한 번의 호흡마다 마법을 피하고 검의 궤적을 그리며 파울드를 베어나갔다. 하지만 파울드의 생명력 게이지보다 페이커의 생명력 게이지가 조금 더 빠르게 소모됐다.

마법을 허용한 건 아니었다. 그림자술이 없다고 해도 페이커는 정점의 어쌔신이다. 상성상 우위에 있는 마법사를 상대로 틈을 쉽게 내줄 리 없다.

다만 파울드가 양손에 낀 10개의 반지가 매번 다른 빛을 뿜어내며 페이커의 공격을 막고, 반사했다. 게다가 아그너스가 소환한 두 마리의 데스나이트가 페이커를 협공하고 있었다.

챙!

두 자루의 검과 충돌한 단검이 한 번의 비명을 토한다. 각기 다른 궤도에서 시간차를 두고 쏘아진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을 한 번의 동작으로 동시에 막아냈다는 뜻이다.

‘검성이 됐어도 대단했겠군.’

신속을 완벽하게 제어하며 무수한 검광을 그리는 페이커의 솜씨가 아그너스를 감탄시켰다.

네임드급 데스나이트 2마리와 리치를 동시에 상대하는 페이커의 실력은 차갑게 식은 아그너스의 심장에 열기를 품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촤하학!!

빠르게 누적되는 데미지를 감당 못하고 2개의 반지를 잃은 파울드의 상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페이커의 가장 큰 강점은 속도가 아니라 은밀함에 있다.

은밀함은 혼란을 유발한다.

파울드는 실드를 압축하지 못하고 전신에 얇게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페이커의 공격이 어디서부터 날아올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림자술을 봉했는데 이 정도라니?’

‘지금.’

오른손의 단도로 데스나이트의 검을 막고, 이때의 충돌 여파로 펄럭이는 망토 뒤로 숨긴 왼손에 새로운 단도를 꺼내 쥔 페이커의 표정은 처음과 같이 무심했다. 표정이 없으니 심중을 읽히지 않고 의도를 들키지 않는다.

푸우욱!!

아그너스와 두 마리의 데스나이트, 그리고 파울드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적들의 눈과 기감을 모조리 속인 페이커의 허초가 살초로 변해 파울드의 단전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울컥!

헛구역질한 파울드가 대량의 마력을 쏟아냈다. 그가 허공에 띄워놓았던 거대한 빛의 구체가 깨진 유리처럼 조각나 흩어지자 일대의 그림자가 수복됐다.

전황이 바뀌었다.

폭발적인 돌파력을 자랑하는 대시 스킬을 제약 없이 사용하며 그림자단을 헤집던 아그너스의 사자가 처음으로 주춤거렸다. 그림자단원들이 은신 능력을 되찾자마자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니 높은 전투력에 비해 기감이 발달하지 못한 듯했다.

“...”

템빨단을 상징하는 무력 단체에게 포위당하고도 여유롭던 아그너스가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드디어 자신의 신세를 자각한 듯한 그에게 페이커가 재차 말했다.

“리치 파울드를 제거하겠다.”

태양이 높아지고 있었다. 전장을 비추는 햇살이 더욱 강해지자 아그너스의 사자와 데스나이트들의 기세가 조금 더 약해졌다.

낮과 어둠을 구분하지 않고 지배하는 템빨그림자단과 비교해서 밤의 주민들은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마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낸 페이커가 주변의 그림자를 흡수해 단도에 응집시켰다. 파울드를 삼키고 소멸시킬 그림자 검이다. 이참에 데스나이트까지 없애도 좋겠지.

“저항해도 좋다.”

어쌔신은 단기 결전용 병기. 페이커는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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