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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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68권 - 01화
위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꽤 오래 전부터, 후로이는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 한국, 미국, 러시아 3국의 국민들이 크라우젤의 국적을 놓고 다투듯, 후로이가 솔직해질 때마다 몽골 국민들이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게임 유전자가 또 한 번 사고를 내다!>
<대한의 자랑 크라우젤, 그리드의 서사시에서 완전한 검성으로 우뚝 서>
<한겨레의 아름다운 교감... 크라우젤의 고결한 신념이 그리드에게 깨달음을 주다>
그리드가 새로운 서사시를 쓴 날 세상이 들썩였다.
검성 크라우젤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은 서사시.
서사시의 내용 자체는 충격적일 게 없었다.
크라우젤을 믿고 있던 사람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크라우젤이 칭송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크라우젤의 소식을 전달한 화자(話者)가 시스템이 아닌 그리드라는 점이 다소 의외긴 했으나, 평소 두 사람의 교분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어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들썩였다.
발단은 한국의 3류 언론매체들이 인터넷에 퍼뜨리기 시작한 자극적인 기사들이었다.
미국인인 크라우젤을 한국의 자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모자라 크라우젤의 업적을 한국인 유전자 덕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부 자각 없는 언론들의 행태는 몇몇 과격한 미국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크라우젤이 고려인 출신이랍시고 한국의 자랑이라는 건가?
-소름 돋는 옐로 몽키들. 크라우젤이 여태껏 쌓아올린 업적을 유전자 공로로 돌리는 꼴 봐.
-퍽킹 게임 DNA. 도대체 게임 DNA가 뭔데? 전 세계 하이랭커 몸속에 한국인의 피라도 흐른다는 거야, 뭐야?
-크라우젤이 한국 국적이 아니라 미국 국적을 취득했던 이유가 이거였어. 한국에선 뭘 아무리 잘해봤자 결국 DNA 덕이라는 소리나 들었을 테니 눈앞이 깜깜했겠지. 하하하, 갑자기 그리드가 가여워지네.
-심지어 크라우젤은 한국계라고 보기도 애매해. 증조부 이전 세대부터 러시아 국적이었다는데 한국보단 러시아의 피가 더 짙을지도 모르잖아. 이미 몇 대 전부터 러시아에서 살아온 이상 조상 중에 분명히 러시안이 섞였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러시아는 엮지 마라. 오 마이 갓! 이것 봐. 소련 놈들이 벌써 소식 듣고 몰려왔잖아.
-크라우젤은 러시아가 낳고 러시아가 키운 러시아인이다! 물질만능주의가 낳은 미국인 날강도들아!
-말은 바로하자. 미국이 크라우젤을 빼앗은 게 아니라 크라우젤이 미국을 선택한 거잖아. 그리고 깽판 부리고 싶으면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한국 커뮤니티로 꺼져 소련 놈들아. 이건 한국 몽키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역겨운 레이시즘 놈들!
-누가 누구한테...
-코쟁이들이 끼리끼리 염병하고 앉았네. 크라우젤이 한국계가 아니라는 게 뭔 개소리냐 대체 ㅋㅋ 생긴 것부터가 딱 한국인인데ㅋㅋㅋ 두유 노우 크라우젤?
-이젠 한국 놈들도 유입됐네... 다 꺼져 제발.
...이렇듯 지금 인터넷은 난리다.
한국의 3류 언론사 몇 곳 때문에 3개 국가의 일부 과격한 집단들이 특정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었다.
후로이가 입 조심을 시작한 이유도 이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첫 번째 기사는 쥬드일지 몰라도 첫 번째 부하는 나 후로이다.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 몽골 국민들에게 대차게 까였었다.
단순히 욕만 먹었다면 후로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후로이를 몽골의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후로이에게 실망하고 슬퍼했다.
그리드가 필시 대단한 인물이 맞고, 그런 그를 후로이가 흠모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국을 대표하는 랭커가 타인의 종을 자처하는 태도는 몽골인 입장에서 괴로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쯤 라우엘의 조언이 있었다.
그리드님의 찬양 좀 자제하라는.
그편이 당신에게도, 템빨단에게도 좋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그리드의 충복이라는 사실을 세상천지가 다 아는데 굳이 직접 입으로 떠들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며 라우엘은 후로이를 설득했다.
그리고 설득은 먹혔다.
그날부터 후로이는 입을 조심했다.
사견을 봉한 채 그리드 개인이 아닌 자신이 소속 된 집단 즉, 템빨단과 템빨국을 위한 나팔수의 역할에 충실했다.
답답했다.
뚫린 주둥이로 함부로 떠들지 못하는 스스로의 신세를 처량하게 느꼈다.
그러던 차에 스킨제작자를 만난 것이다.
구세하에게 새로운 외모를 얻고, 위조자에게 의뢰해 ‘정의의사도’라는 가명까지 만든 그는 이제 여유가 생길 때마다 신분을 숨기고 세계를 유람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지껄이며 다녔다.
세컨드 클래스와 비룡의 힘으로 수월하게 사냥하며 논리를 묵살하는 욕설과 독설을 쌓아올린 그의 말빨을 세상은 감당하지 못했다.
최근 랑디 상단이 ‘정의의사도’ 앞으로 의뢰를 보내온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정의의사도의 명성도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물론 후로이는 정의의사도 앞으로 들어온 의뢰를 수락할 생각이 없었다. 정의의사도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 만든 일종의 부캐 아닌가. 부캐로까지 일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랑디 상단의 상대라는 라이온 상단의 이름이 거슬렸다.
최근 템빨단 내부에서 언급되었던 조직.
서리여왕의 심장을 노렸다는... 한 번쯤은 혼내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설마 당신...”
빈츠라고 했나.
후로이는 맥없이 쓰러져있는 라이온 상단의 논객에게 주의를 줬다.
“그 이상 말씀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예.”
후로이의 정체를 확신한 빈츠가 입을 꾹 닫았다.
템빨단이 무서운 점은 첫째가 무력이요, 둘째가 패드립이다. 권력은 세 번째에 불과하다.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 높은 후로이와 굳이 척을 질 생각이 빈츠에겐 없었다. 라이온 상단과는 단순한 고용관계이기 때문에 지킬 의리도 없었고 말이다.
“뭐야 빈츠! 설마 지금 진 거야?”
“빈츠가 왜 진 거지?”
설전이 끝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관중들이 술렁이고 있었다.
헛소리만 지껄이는 놈에게 빈츠가 패배한 이유가 뭔지 그들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단 한 명은 예외였다.
관중들 틈에 섞여있는 라이온 상단의 부단주, 섬예다.
-빈츠님, 지금 상대하신 분의 정체가 혹시 후로이님이십니까?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흐음...”
스킨 제작자의 신변을 확보한 템빨단이 한동안 라이온 상단을 주시했다는 사실을 섬예는 눈치 채고 있었다.
템빨단의 감시가 허술해서가 아니라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범위였고, 의식하고 있다 보니 눈치 챌 수 있었다.
스킨 제작자로부터 서리여왕의 심장을 빼앗기 위해 움직인 표면적인 조직이 바로 라이온 상단이었으니까.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조사해보면 라이온 상단도 누군가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쯤 금세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템빨단의 감시는 금방 풀렸었다.
‘한데 이제 와서 저런 거물을 보냈다는 건... 우리의 배후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밝혀내지 못한 건가.’
라이온 상단은 인페르노 휘하의 수십 개 점조직 중 하나다. 인페르노 또한 어떤 세력의 수많은 가지 중 하나에 불과했고 말이다.
섬예는 이 거대한 집단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라이온님, 저희 지부에 지금 후로이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네, 정체를 숨기셨지만 템빨단의 후로이님이 확실합니다. 템빨단이 여전히 저희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데 어찌할까요?
-정체까지 숨겨가며 접근해오셨으니 그냥 모르는 척 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유도 심문을 하던 넘어가주세요. 원하는 정보는 다 넘겨드리라는 뜻입니다. 상단의 정보라고 해봤자 템빨단에겐 별 가치도 없겠지만.
-...저희의 배후를 캐려고 해도 말씀이십니까?
-네, 어차피 감추고 싶다고 해서 감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템빨단은 이미 인페르노 산하 조직 26개 중 절반 이상과 접촉했어요. 어차피 곧 밝혀질 사실을 저희가 먼저 알려준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죠.
-이참에 템빨단과 직접적으로 교류하실 생각이신 건지...?
-아니요. 상부에서는 템빨단과의 교류를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서리여왕의 심장을 노렸단 점 때문에 자칫 오해를 살 경우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만약 템빨단이 저희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한다면 저희 상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될 겁니다.
-설령 멸망해도 괜찮습니다.
-...라이온 상단은 저의 전부입니다. 라이온님껜 아닌 겁니까?
-섬예, 훗날 때가 오면 우리의 목적이 뭔지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그날 오늘의 대화를 돌이켜보세요. 아마 재미있으실 걸요.
섬예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라이온의 능력과 인성에 감복했던 그는 다만 믿고 따를 뿐이었다.
저벅. 저벅.
어느새 관중들이 떠난 콜로세움.
텅 빈 관중석에 홀로 앉아있는 섬예에게 후로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다가온다는 표현은 잘못 됐다.
섬예는 4개의 출입구 중 하나를 등진 위치에 앉아있었고, 후로이는단지 그곳을 통해 떠나려는 것이었으니까.
후로이는 섬예가 누군지도 몰랐다. 라이온 상단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이미 템빨단 내부에선 라이온 상단의 위험도가 낮다고 판단한 상태. 상단을 감시하던 그림자단을 철수시켜 아스모펠 추적으로 돌렸을 정도인데 후로이가 왜 라이온 상단에게 관심을 갖겠나. 이번 설전에 개입한 것도 단순히 한 번 혼내주려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섬예는 속사정을 모른다.
“과연, 제게 용건이 있으셨던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섬예가 다가오는 후로이를 정중히 맞이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라이온 상단의 부단주이자 동부 지부장인 섬예라고 합니다.”
“...정의의사도입니다.”
“실로 대단한 논객이시더군요. 빈츠님과의 설전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억만금을 줘서라도 섭외하고 싶을 정도로요.”
“억만금이라... 마침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던 차인데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
예의상 한 말이었다.
한데 바로 덥썩 물 줄이야.
섬예는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라이온의 경고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상단은 분쟁을 달고 살게 마련. 유능한 논객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죠. 정의의사도님의 실력을 고려해서 업계 최고 몸값의 10배를 제시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
이날.
라우엘에게 귓속말 한 통이 날아왔다.
-라이온 상단에 잠입 완료. 아무도 내 정체를 모름.
“...?”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거지?
라우엘은 황당했으나 상황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라이온 상단의 배후를 거의 다 밝혀가고 있는 상황.
라이온 상단 자체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위험도가 낮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곁에 두고 정보를 캘 수 있으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게다가 후로이는 십공신 중 가장 한가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림자단과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 중인 페이커, 아수라단과 수련을 다니는 레가스, 각각 마창단과 쾌검단을 이끌며 각지의 분쟁을 해결 중인 폰과 극검 등.
전속 부대를 거느린 십공신들과 달리 후로이의 역할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유페미나나 지슈카과에 속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잠입에 성공하셨다니, 과연 제가 인정하는 사내답게 유능하시군요.
-유능하지 않으면 그리드님의 첫 번째 부하가 되지 못했겠죠.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장부입니다. 장부를 확보해주세요. 장부를 보면 라이온 상단과 얽힌 세력들을 밝혀낼 수 있을 테니까요.
-네.
-조급해 하지 마세요. 일반 상단원은 장부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들 테니까요.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냥 포기하셔도 좋아요.
20분 후.
-장부를 확보했습니다.
-네? 벌써요?
-마침 부단주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걸 발견했어요.
-...
아니 그게 그렇게 대놓고 있을 물건이 아닌데.
당황하는 라우엘이었지만, 누구에게나 운수가 따르는 순간이 있음을 상기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빨리 내용을 캡처하고 장부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세요. 캡처한 사진은 나중에 제 이메일로 보내주시고요.
-그러죠.
후로이는 오래간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해서 기분이 들떴다.
입을 봉인당한 뒤부터 무료했던 삶에 활력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접대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