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42화 (1,332/1,794)

템빨 67권 - 19화

파천(破天)은 검호 시절의 피아로가 만든 검술이다.

반격기라는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높긴 하지만 위력 자체는 뛰어나다고 보기 힘들었다.

엄밀히 말해서, 귀중한 검술 창조를 소모하면서까지 습득 할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피아로의 파천을 창조했다.

검성이 당신의 검술을 계승하노라.

이는 한때 검성을 꿈꿨던 검사이자 스승이 되어주었던 선배를 향한 예우이자 친애의 증표였다.

누군가에겐 삽질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랭킹 1위였던 사내다.

그가 지키는 도의에 NPC와 플레이어의 구분은 없다.

그는 Satisfy를, 이 세계 자체를 존중했다.

그렇기에 무수한 인연의 끈을 만들고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쩌적! 쩌저적!!

검기(또는 강기)의 파동을 일으켜 흐름을 뒤틀어 버리는 검술.

빗발치는 검기가 하늘을 부수는 것 같다고 해서 파천이라 이름 붙은 그것이 미르를 덮친다.

‘참수가 간파 당한 걸 눈치 챈 건가? 아니, 간파 당할 걸 예측 했다고 봐야하나.’

참수와 흡사한 기수식을 지닌 검술로 확신을 유도하고 변수를 유발해 전투를 통제하다니...

미르는 마치 낚시 바늘에 걸린 생선이 된 심정이었다.

크라우젤의 통찰력과 순발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무쌍검법이 아닌 검술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평범한 검술로는 내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단 사실을 여태껏 수도 없이 경험...

서걱!!

“...!”

미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백호검에 뒤얽힌 청룡도가 자신의 가슴을 찔렀기 때문.

강력한 위력이다.

지금의 파천은, 과거의 파천과 달랐다.

‘깊다.’

주룩, 입가를 피로 적신 미르가 왼쪽 팔에 백호의 기운을 두르고 청룡도와 교차시켰다.

까가강!!

새하얀 도포가 요란하게 펄럭인다. 협공을 막아낸 대가로 미르의 몸이 위로 붕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그를 뒤쫓아 도약해 검기를 흩뿌렸고 백호의 기운을 머금은 미르의 팔이 그것을 모조리 쳐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스킬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크라우젤이 기껏 만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고, <고결한 신념>의 상승효과를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크라우젤은 무쌍검법을 적극 사용했다. 방금 막 배운 13개의 스킬을 처음이라곤 믿기지 않게도 적재적소에 활용했다. 그의 검은 어느 때보다 섬세하고 예리했다. 하지만 파천 이후 이렇다 할 유효타를 넣진 못했다.

‘이자는 뮐러와 겨뤄봤다고 했지.’

예상대로다.

뮐러가 무쌍검법의 밑천을 다 드러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채챙! 채채챙!!

치열한 공방을 나누는 순간에도 크라우젤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내 무쌍검법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그가 검의 궤도를 꺾었다. 무쌍검법의 검로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바뀌었고 미르가 반응했다.

빠각!

미르의 장격이 크라우젤의 턱을 올려쳤다.

그리드가 당했던 카운터와 같은 묘리가 담긴 기술이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

아무리 뇌가 흔들렸다지만 ‘혼란’을 물리적인 상태 이상으로 판정 받을 줄이야.

미르가 지닌 격의 높이를 실감한 크라우젤이 휘청거리며 검을 놓쳤다.

혼란을 무시하고 억지로 몸을 제어하려다가 놓친 것으로 보였다.

“크라우젤!”

그리드가 다급히 순보를 썼지만 한 발 늦었다.

서걱!

그리드의 위치가 바뀌었을 땐 미르가 횡으로 휘두른 청룡도가 크라우젤의 가슴을 깊이 벤 뒤였다.

쩌저적! 파지직!!

크라우젤의 상처부위가 얼어붙고, 전류에 감전됐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놀랍게도 신속을 발휘해서 자리를 이탈했다.

<검의 시> 덕분이다.

불사를 소모한 상태인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빙결과 감전을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방금 입은 데미지를 보조 무기에 전이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유니크 등급의 검이 산산조각 났지만 목숨을 지킨 대가치곤 오히려 싸게 느껴졌다.

그리드는 초연화와 연살화극의 검무를 펼쳤다.

“흠.”

크라우젤의 숨통을 끊는데 실패한 미르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순보를 쓸까 고민도 했지만 푸른 검기의 꽃잎이 시야를 차단한 까닭에 무리수라고 판단했다.

-살려준다더니 네가 죽으려고 하면 어떡해?

검기의 꽃잎을 뇌전으로 불태우는 미르와 대치한 그리드가 갓 핸드들을 크라우젤의 호위로 붙이며 핀잔 줬다.

사실 양심 없는 태도라는 건 알고 있었다.

크라우젤의 파천이 미르에게 적중했던 순간, 그리드에겐 잠시나마 퇴로가 열렸었으니까.

한데 그리드는 도망치지 않고 크라우젤과 함께 미르를 공격했다.

그리드 스스로 살 기회를 걷어 찬 셈이다.

크라우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극도로 집중한 그는 그리드가 보내온 귓속말을 눈치 채지 못했다.

“템빨신이시여. 저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즐겁습니다. 하지만 곧 저의 신들께서...”

그리드에게 정중히 말하던 미르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심장에 백호검이 꽂혀있었다.

크라우젤은 검을 놓쳤던 게 아니라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크라우젤과 함께 성장해온 백호검에는 <심검>의 특성이 개화 된 상태다. 크라우젤의 의지에 호응해 스스로 검술을 펼친다.

단 1회에 한해서, 백호검이 펼치는 검술의 위력과 효과는 크라우젤이 직접 펼치는 것과 일치했다.

츠카카칵!!

유성처럼 떨어져 미르의 심장을 찔렀던 백호검이 그대로 힘껏 하강해 미르의 심장과 늑골을 갈라놓았다.

집중한 채 기회를 엿보던 크라우젤이 미르에게 치명상을 입히는데 성공한 순간이었다. 그가 그리드에게 뒤늦게 대답했다.

-그냥 여기서 같이 죽지.

-그, 그래...

그리드가 활로를 외면하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부터 크라우젤의 목적도 바뀌었다.

그리드를 살리는 것에서, 미르와 후회 없이 싸우는 것으로.

어차피 그게 그리드의 목적인 이상 자신의 목적을 일치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목적이 일치해야만 협공에 세밀함이 더해졌기에.

“...크라우젤.”

주작의 불꽃에 휩싸인 미르의 눈동자. 검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그 눈에 크라우젤의 모습이 비친다.

“그대의 이름 또한 내 영혼에 새겼다.”

꺾이지 않기에 영원토록 존재할 영혼.

그 안에 새겨진 크라우젤의 이름은 불멸할 것이다.

뮐러의 이름처럼, 그리고 그리드의 이름처럼.

화르르륵!!

장엄하게 타오르는 주작의 불꽃이 미르의 상처를 회복시킨다. 하지만 상처의 흔적까지 지우진 않았다. 심장부터 허리까지 이어진 긴 검흔을, 미르는 지우지 않고 새겨두었다. 그리고 그리드에게 못했던 말을 마저 이었다.

“저의 신들께서 곧 이곳을 주시하실 겁니다. 그러니 오늘의 즐거움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미르는 두 사람과 정확히 89회의 공방을 교환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짧은 공방이었다. 하지만 도망친 동료들이 환국에 기별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연못’에 신들이 모일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지상으로 향할 테고 그리드를 훑을 것이다.

근래에 새롭게 탄생한 신.

저급한 토착신쯤으로 여겨온 그가 사실은 대단한 잠재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엿보고 경각심을 일깨우며 멸절을 선고하리라.

그리고 지금의 그리드는 신들의 질투를 감당할 수 없다.

권력 다툼에서 밀려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마저도 패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지에서 복수를 꿈꾸는 신들.

모든 걸 잃은 그들의 시기와 질투는 지독하다.

자신들을 위협할지도 모를 신의 탄생을 환영할 리 만무했다. 하물며 그 신이 사방신들의 봉인을 푼 당사자라면... 큰 희생을 치러서라도 그리드를 해칠 것이다. 갓 피어난 신화가 모조리 소멸할 때까지.

미르가 이 싸움을 서둘러 끝내겠다는 건 즉, 그리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개소리였고 말이다.

“즐겁다고 말하는 건 이해해.”

나도 즐거운 건 마찬가지니까.

전에 만났을 때는, 미르가 청룡도를 휘두를 때마다 쏘아지는 번개 하나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번개를 막고, 피하고, 흘림과 동시에 반격까지 가능해졌다. 청룡도가 쏘는 번개는 이제 전황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그 사실만으로 자신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리드는 미칠 듯이 기쁘고 즐거웠다.

“하지만 이 싸움을 언제라도 끝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용납하기 힘들군.”

촤르륵!!

무형검이 힘차게 뻗어나갔다. 미르가 청룡도로 쳐내자 휘며 미르의 몸을 감쌌다.

앞선 상황에선 미르가 여기서 순보를 썼다. 그리고 미르의 등장 지점을 귀신 같이 예측한 크라우젤에게 발목을 잡힌 까닭에 그리드가 연계해온 공격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푸욱!

미르는 무형검에 고스란히 찔려주었다. 육신에 박힌 무형검의 칼날을 맨손으로 잡아당겨 그리드를 코앞까지 끌고 왔다.

콰작!!

[25,0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꺽...!”

청룡도에 복부를 꿰뚫린 그리드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너무 빠르게 벌어진 일이라 백호 자세를 쓰지 못한 스스로를 질책하며.

꽈앙!!

무형검을 회수하려다가 발에 턱을 걷어차이고, 다시 또 청룡도에 베여 바닥에 쓰러진 그리드가 이번엔 비명을 참았다. 이번엔 백호 자세를 발동한 상태였기 때문에 꽤 견딜만 했다.

‘백호자세의 발동 속도를 연마할 필요가 있겠어.’

핑핑 도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천(天)의 검무를 펼쳤다. 자신이 쓰러진 그 잠깐 사이에 크라우젤이 수세에 몰렸으니 미르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천의 검무는 미르도 좌시하지 못했다.

천은 그리드가 습득하고 있는 단일 검무를 순차적으로, 딜레이 없이 연계하는 검무다.

몇 번이나 중상을 입고도 어느새 다시 ‘최대치’에 가까운 생명력을 유지 중인 미르의 스팩이 제아무리 바알급이라고 해도 기술의 극한엔 압박을 느끼게 마련이다.

물론 바알이었다면 그리드가 어떤 공격을 하던 맞아주고 대신 파리채 휘두르듯 손을 휘둘러 그리드를 묵사발 냈겠지만, 미르는 바알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심기체 중 ‘기’에 집착하는 유형. 자신도 모르게 호승심을 일으켜 천을 분석하려고 애쓴다.

덕분에 그리드는 5회 이상의 콤보를 달성했고, 무형검의 <사각 공격>이 활성화됐다.

순간.

천의 검무에 매료되어 있던 미르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신들의 시선이 곧 이곳에 닿을 거란 사실을 상기했다.

‘너무 심취했군. 어서 끝을 내야한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

미르가 모든 사방신의 힘을 해방했다.

그러자 그나마 흠집은 나있던 생명력 게이지가 가득 차는 것을 넘어 색깔을 바꿨다. 생명력이 종전보다 ‘최소’ 2배 이상 늘어났다는 표시였다.

속도도, 공격력도 그만큼 강해졌다.

[50,4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9,6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호 자세를 운운할 여력조차 없다.

초월경에 의지해서 베기를 회피했다가 목덜미를 붙잡히고 찌르기를 연속으로 허용한 그리드.

그 모든 일이 하나의 호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어졌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찔린 그리드가 바로 불사 상태에 돌입했다.

여전히 그리드의 목덜미를 붙잡은 미르가 이번엔 크라우젤에게 시선을 돌렸다.

세상을 양단하는 우주 검을 코앞에서 슬쩍 고개만 비틀어 피한 후 크라우젤의 목을 잘라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푸화하하학!!

“...!!”

미르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는,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진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곧 착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울어지는 시야에 보이는 광경.

자신의 ‘하반신’이 홀로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

쿠우웅!!

지면에 얼굴을 처박은 미르가 입에서 대량의 피를 토했다.

몸이 두 동강 나는 경험.

태어나고 처음 겪은 일인지라 사고가 잠시 멈췄다.

그러자 여태껏 이성에 억눌려있던 ‘본능’이 발현됐다.

생존 본능이다.

하나로 융합한 사방신의 힘이 인공적인 천사 날개의 형상을 갖추더니 회전하며 일대의 모든 것을 베어나갔다.

그 대상엔 당연히 그리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끝인가.’

순보를 쓸 시야를 확보하는 것도 힘들었다.

‘한쪽 팔을 잃은 게 너무 컸다.’

전투 내내 공방 밸런스가 무너졌다.

그나마 화신의 폭풍을 사용하고 유지했다면 팔이 재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미르를 상대로 화신의 폭풍은 카운터를 당하기 십상이라 시도조차 못했다.

이게 문제다.

미르와 싸울 땐 사신의 힘을 제대로 써먹기 힘들다.

‘이제부턴 써도 되지만.’

그리드가 화신의 폭풍을 일으켰다. 어차피 불사 상태라 무서울 게 없었다.

<사각 공격>에 무패왕의 검술을 연계할 때 낙월검과 합체시켰던 무형검을 회수한 그가 염룡검으로 스왑했다.

그리고 잠재력 개방을 전개, 아직 못 썼던 융합 검무와 무패왕의 검술을 모조리 퍼붓기 시작했다. 인공의 날개에 계속해서 몸을 베였지만 무시했다.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둘렀다.

죽을 땐 죽더라도 의미 없이 죽어선 안 된다. 완전 해방 상태의 미르의 방어력과 생명력을 가늠해야했다.

[사망하였습니다.]

최후의 사투 끝에 그리드가 죽었고.

“음.”

환국의 신들이 때마침 연못에 도착했다.

“문제가 있다더니... 정리 됐군.”

“애초에 사소한 문제였다.”

지상의 풍경을 확인한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들이 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사막에서 발견한 존재는 오직 미르뿐이었기에.

환국의 신들은 위풍당당하게 선 그의 몸에 가득 새겨진 상처까진 살피지 못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