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7권 - 18화
[그는, 고결한 신념을 목격하였다.]
[어리석은 아집에 불과하다는 질타와 조롱도, 지나친 욕심이라는 주의와 조언도 꺾지 못했던 신념.]
[그것은 때때로 독이었다.]
[독에 서서히 잠식당한 성인(聖人)은 나락의 근처를 헤맸다.]
천외천이라고 칭송 받았던 사내.
끝내 검성이 된 그가 보여준 행보는 사람들의 기대와 동떨어진 것이었다.
한창 성장해야 할 시기에 키리누스의 오두막에 틀어박혔고, 검성의 성명절기인 <무쌍검법>을 기껏 확보하고도 외면하였으며, 최근 1년 동안은 가야의 양반들과 무리해서 싸우며 죽음을 반복했다.
상식적이지 못한 모습이었다.
크라우젤의 근황을 아는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느끼거나 미쳤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깨달을 때가 됐다.
크라우젤의 고행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무려 천외천이었던 사내다.
그를 한낱 잣대로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오만이었다.
[하지만 성인의 신념은 부동했다. 의심을 검으로 떨치고, 시련을 검으로 베어 자신이 곧 검성(劍聖)임을 증명했다.]
“...”
긴 세월 외면해온 무쌍검법.
드디어 그것을 마주보고 있던 크라우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 눈앞에 떠오르는 월드 메시지. 그리드의 서사시가 자신을 서술하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챈 까닭이다.
‘...민망하군.’
나락을 헤맸던 게 사실이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까발리는 건 좀...
민망해서 귓불을 붉히는 크라우젤에게 그리드는 괜히 미안해졌다.
사실 그리드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었다.
서사시는 그리드의 직접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그리드의 감정이나 목격을 서술하기도 한다. 그리고 타인을 목격하고 타인을 서술할 때면 종종 그리드도 몰랐던 정보가 나열 됐다. 시스템의 보조쯤으로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결론은,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밑바닥을 기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생했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서사시의 내용은 그리드가 의도한 게 아니란 말이다.
[그는 성인을 통해서 깨우쳤다.]
[가장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여태껏 계승해온 위대한 힘도, 지혜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었다.]
[만인의 부정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
[고결한 성인의 신념을 그는 배웠고, 품었다.]
....
...
[템빨신 그리드가 서사시의 열두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길지 않아서 다행이네.’
내심 노심초사하던 그리드가 안도했다.
서사시로 인해서 과거나 속내가 밝혀진 경험이 있는 그의 입장에서 크라우젤과 얽힌 서사시는 꽤나 불편한 것이었다.
크라우젤에게 실례를 끼칠 수도 있는 거고, 크라우젤에게 품은 감정이 드러날 수도 있었으니까.
예를 들어 ‘그는 성인을 통해서 배웠다.’라는 문장에 ‘동경하는’이라는 말이 추가 됐을 수도 있는 거다.
크라우젤을 동경하고 존경하는 건 사실이고, 이 마음을 굳이 숨길 생각도 없지만, 당사자 앞에서 대놓고 고백하는 그림은 제법 부끄럽다.
[서사시의 열두 번째 페이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사시 완성 보상으로 당신의 격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최대 생명력이 5퍼센트 증가합니다.]
[상태이상을 반사 할 확률이 생깁니다.]
[당신이 보유 중인 <최초의 왕> 칭호에 상태이상을 반사 할 확률이 이미 존재합니다.]
[격 상승효과가 <최초의 왕> 칭호의 상태이상 반사 조건이 완화되는 것으로 변경 됩니다.]
[패시브 스킬 <고결한 신념>을 획득합니다.]
<고결한 신념>
패시브
힘든 상황일수록 본인의 저력을 믿습니다.
스킬이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릴 때마다 스탯 하나가 소폭 상승합니다. 상승하는 스탯은 무작위로 정해지며, 지속 시간은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과 비례합니다.
‘대박이네 이거.’
스킬의 소모는 곧 약화를 뜻한다.
스킬 하나가 쿨타임에 걸릴 때마다 전투력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고결한 신념은 그 이치를 어느 정도 부수는 효과를 발휘했다.
어이없게 전투와 관련 없는 스탯, 예를 들어 매력이나 정치력, 손재주 등의 스탯이 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리드가 보유하고 있는 스킬은 무려 수십 개다.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고결한 신념의 덕을 못 보는 경우는 거의 없을 터였다.
‘게다가 손재주는 꽤 좋아. 무형검의 컨트롤에 은근히 도움을 주니까.’
그리드가 짧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백호검을 휘둘러보는 크라우젤이 검풍을 일으킬 때마다 주변에 깔린 빙판이 쩌적, 쩌저적, 갈라지고 있었다.
‘...장난 아니군.’
검성의 자격을 얻었다고 자부하며 드디어 무쌍검법을 습득한 크라우젤.
과연 얼마나 강해졌을까?
꿀꺽, 그리드는 기대감에 마른 침을 삼켰고 점검을 마친 크라우젤은 묵묵히 새로운 기수식을 취했다.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미르가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 놀랍군요... 무쌍검법을 배운 사람은 크라우젤인데 템빨신께서도 덩달아 강해지신 겁니까?”
‘잠자코 기다려준다 싶더니.’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사시가 써지고 크라우젤이 비급을 익히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8초.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미르에겐 검을 수십 번도 더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데 미르는 두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 멀뚱멀뚱 구경만 했던 게 아니다. 동료들을 피신시켰고, 잘려나간 팔을 재생시킨 거로 모자라 완전히 회복시켰다.
반면 그리드는 여전히 한쪽 팔을 잃은 상태다.
플레이어가 절단 된 신체를 복구하기 위해선 특정 조건들을 충족해야하는데 전투 중에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이제 더 빡세겠네.’
강해졌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나쁘다.
동료들을 지키며 싸워야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해방 된 미르는 기세를 본격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반면 나는 한쪽 팔을 잃은 신세. 실력 점검은커녕 개죽음을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아졌다.
-크라우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빠지는 게 좋아 보인다.
-이야기는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
고결한 신념은 개뿔, 똥고집이다. 이 벽창호 같은 놈.
-그래 네 맘대로 하세요.
사실 고마운 마음이 크다.
지금 상태로 혼자서 미르와 싸워봤자 실력을 제대로 시험해 보기도 전에 죽을 확률이 높으니까. 크라우젤이 함께 싸워준다면 조금이나마 여력이 생길 테고, 더 많은 시도들을 해볼 수 있을 거다.
‘벗이자 경쟁자라...’
미르는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동료들을 피신시킨 시점부터 그에겐 조급해 할 이유가 사라졌다.
마음먹는 즉시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죽이고 이 싸움을 끝낼 수 있었으니까.
그는 이 흥미로운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드는 신.
정신적인 면에는 아직 인간 시절의 잔재가 남아있을 테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에게 숭배 받고 있는 존재다.
한데 그가 한낱 인간을 보고 영감을 얻었고, 깨달음을 얻어서 강해졌다.
미르가 방금 직접 목도했다.
‘다행이구나.’
미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가 뮐러와 그리드에게 입었던 상처들을 지우지 않은 이유.
상처 입은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미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볼 때마다 그날의 전투를 복기했다. 그것이 보다 강해지는 동력이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확신하지는 못했다.
환국의 신들은 뭔가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준 바가 없었으니까.
신이란 이미 무결하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신이 되기 위해선 그들처럼 오만해야하는가? 나의 방식은 틀린 건가?
미르가 늘 고민해왔던 문제다.
하지만 이 순간 고민이 끝났다.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존재.
템빨신 그리드가 크라우젤로부터 배우는 모습을 보고 미르는 자신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서, 미르는 그리드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길을 앞서 걷고 있는 존재였으니 본받고 싶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사방신의 해방을 노리는 이상 미르는 그리드와 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룡과 백호의 봉인마저 풀리게 되면 환국은 많은 걸 잃게 된다.
미르를 제외한 모든 양반들은 아스가르드의 천사들과 대적할 힘을 잃게 되며, 환국의 신들은 아스가르드에게 복수 할 기반을 다지지 못한다.
물론 미르는 신들의 복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전쟁 따위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한울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그건 한울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의 숙명이다.
숙명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한울과 동격을 이루는 신 즉, 무신이 되는 거고.
물론 그런 거창한 이유가 없더라도 미르는 무신이 되고 싶었다.
호연지기였다.
미르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빙판을 미끄러지듯 달려온 크라우젤의 검이 이전과 달리 제법 빨랐기 때문.
청룡도를 들어 공격을 막은 미르가 허리를 돌려 발차기를 날렸다.
퍼억!!
청룡도의 검로를 따라 만들어진 빙벽을 뚫은 미르의 발이 크라우젤의 명치에 꽂혔다. 완벽하게 들어갔다. 곧바로 허리를 펼치며 검을 휘두른 미르는 크라우젤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크라우젤의 목을 베지 못했다. 몸이 뒤로 붕 뜬 까닭에 검이 닿질 않았다.
‘막았었다고?’
발을 밀치는 크라우젤의 검이 미르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 짧은 틈에 검을 회수했다니.’
검술이 제법 빨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제법이 아니라 배는 빨라진 듯하다.
파파팟!!
크라우젤의 검이 환영을 만들었다.
역시나 감탄이 나오는 속도다.
방어나 회피는 쉽게 가능하지만 반격 타이밍을 잡기가 조금 까다로운 수준이었다.
스팟!
부채처럼 펼쳐져 압박해오는 검로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청룡도가 크라우젤의 심장을 노렸다.
꽈창!!
청룡도가 기울었다.
도신을 내리친 백호검에 깃든 무게가 상당했던 까닭.
속도뿐만 아니라 위력도 배는 오른 느낌이었다.
‘이 검술.’
빠르고 강하되 공방의 균형이 완벽하다.
속도와 위력을 억제하지 않고도 완전하게 통제한다는 뜻.
바로 이게 무쌍검법이다.
수백 년 전 뮐러가 미르에게 상처를 입혔던 지고의 검술.
오싹...
크라우젤로부터 뮐러의 그림자를 엿본 미르가 전율했다. 크라우젤이 언젠간 자신의 호적수로 성장해줄 거라고 생각하자 기뻤다.
그래, 훗날의 이야기다.
‘아직 부족하다.’
일단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미르는 뮐러의 검술을 이미 여러 번 겪어봤다.
크라우젤의 검술이 뮐러의 검술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미르의 손바닥 위에 있는 셈이다.
검막을 펼쳐 반격을 막아낸 크라우젤이 취하는 동작과 이동 경로를 보며, 미르는 곧 크라우젤이 어떤 검술을 사용할지 뻔히 예측했다.
검을 찌르듯 쇄도해오다가 도달 직전 검을 역수로 쥐고 3개의 변수를 창조하는 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