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7권 - 17화
미르의 출현이 전장의 분위기를 바꿨다.
“미르!!”
좌절하던 양반들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리드가 그들을 동정했다.
가람을 비롯한 수많은 양반들을 겪어온 그리드는 양반의 본질을 알고 있다.
저들은 미르가 자신들을 구해줄 거라고 믿는 눈치지만, 죽을 거다.
환국을 망신시켰다느니, 양반의 수치라느니.
미르가 저들에게 뒤집어씌울 죄목은 차고 넘쳤다.
가람이었다면 욕 한 마디 지껄이며 죽였을 테고.
-곧 소동이 일어날 거야. 너는 그 틈에 도망쳐.
그리드가 가야를 방문한 목적은 실력 점검이다.
죽을 걸 뻔히 알고도 미르에게 도전하기 위해서 이 땅을 다시 밟았다.
패배가 당연한 대결에 굳이 크라우젤의 도움을 받았다가 둘 다 죽으면 그건 막말로 개죽음이다.
“...”
크라우젤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말하는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르는 양반들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감싸주었다.
“템빨신이여. 신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천사의 역할을 대행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천사와 달리 죽어도 윤회하지 못하고 영혼이 지옥에 갇혀 영원히 고통 받지요. 우리의 신은 지옥에 떨칠 위세를 잃었고, 지옥의 악마들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어 이들을 살려주실 순 없겠습니까?”
“...굳이 부탁할 필요가 있나? 우리를 죽이면 그만이잖아?”
“신께서 제 동료들을 해치고자 마음먹으시면 제가 지킬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그리드의 정체를 한 눈에 간파했던 미르.
그의 안목은 과연 탁월했다.
지옥에서 급격히 성장하고 돌아온 그리드의 현재 실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드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양반의 씨를 말리고 싶은데.”
허풍도, 도발도 아닌 진심이다.
인간보다 강한 힘을 지녔으나 인간을 멸시하는 족속들.
저들을 살려둬 봤자 득 될 건 하나도 없다.
“저놈들을 죽이고 나도 죽을 거다.”
선언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양반들이 마른 침을 삼켰고 미르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십니까. 더 나은 제안으로 신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게 저의 솔직한 심정이지만... 아쉽게도 제게는 그럴 권한이 없군요.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지키는 수밖에.”
미르의 오른쪽 팔이 형태를 잃고 흐릿해졌다.
청룡도가 휘둘러진 것이다.
그리드의 초월경이 발동했다.
콰콰쾅!!
미르가 등장하자 즉시 방패를 꺼내 쥐었던 갓 핸드들이 번개를 막았다. 보고 막은 게 아니다. 번개가 운 좋게 갓 핸드가 이동하는 경로로 떨어졌을 뿐이다. 갓 핸드의 공전(公轉)이 불규칙한 덕분에 발생한 행운이었다.
채앵━!
검을 들어 올린 그리드가 섬전같이 날아온 미르의 참격을 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노에와 랜디, 템빨골들이 미르를 좌우에서 덮쳤고,
끼릭!
청룡도와 맞물린 무형검이 관절을 비틀었다. 넝쿨처럼 청룡도를 타고 올라 도신을 붙잡고 늘어졌다.
퍼퍼퍼퍼퍼펑!!
하늘에선 무구의 비가 떨어졌다.
오래간만의 부름이 반가운 건지 소환에 응한 무구의 개수가 평소보다 많았다.
하지만 다 부질 없었다.
노에, 랜디, 템빨골의 기습은 미르가 두르고 있는 기의 장막을 관통하지 못해 수포로 돌아갔다.
청룡도는 무형검을 손쉽게 떨쳐냈으며, 하늘에서 쏟아진 수천 개의 무구는 미르가 일으킨 두터운 대지의 장벽에 가로막히거나 뇌전의 파도에 휩쓸려나갔다.
유니크 등급 이상의 무구들은 대부분 대지의 장벽을 꿰뚫었고, 일부는 뇌전의 파도마저 헤치고 나아갔지만 백호 자세를 펼친 미르의 단단한 육신에 이렇다 할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사신의 힘을 완벽하게 다룬다는 점이 볼수록 사기다.’
사신의 힘을 이미 오래 전에 체득한 미르는 해방 된 주작과 현무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네임드 NPC의 성장속도는 하이랭커의 성장속도를 초월한다.
하물며 미르는 신살을 꿈꾸는 초네임드급 NPC다. 그리드가 성장하는 동안 그 또한 당연히 성장했다.
물론, 그리드의 성장 속도가 훨씬 더 우세했지만 말이다.
“...!”
백호 자세를 풀고 청룡도를 휘둘러 그리드의 가슴을 벤 미르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왼손에 새로운 검을 뽑아 쥔 그리드.
어설픈 동작으로 쌍수검을 휘두르기에 뭔가 싶었는데 허리를 베였다.
삼십만대군 잠행검.
현존 최고위의 암수가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내가 잠시나마 검로를 놓치다니. 놀라운 검술이군.’
미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얕았다.’
이도류 마스터리를 수준급으로 익히지 못한 이상 쌍수검은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무기가 보조무기 취급을 받게 되어 위력이 반감된다. 스킬의 위력에도 페널티가 생겼다. 그래서 잠행검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거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다.
순간적으로 쌍수검을 써서 교란을 유도하지 않았다면 잠행검이 미르를 스치지도 못했을 거란 사실을.
잠행검이 필중하는 대상은 ‘일정 경지 이하의 대상’으로 한정되니까.
끼릭!
“윽...!”
그리드가 비명을 삼켰다. 흉갑을 파고 들며 밀어붙인 청룡도가 궤도를 바꿔 사선을 그리자 허벅지를 크게 베인 탓이다.
무려 2만이 넘는 데미지를 입은 것으로 모자라 상처 부위가 동결되며 물리적인 상태이상에 걸렸다. 움직임이 굼떠졌다.
일전에 싸웠을 때는 사신의 힘만으로 그리드를 압도했던 미르가 지금은 청룡도의 무기 효과까지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수확이라면 수확인데.’
초반부터 미르가 진심을 내게 만들었고, 작게나마 상처를 입혔다.
처음에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성장했음을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이쪽은 목숨을 걸었다고.’
팔 하나 정돈 가져가야 수지가 맞지 않겠는가.
스릉━
무형검과 무아검을 회수하고 새로운 검을 뽑아 쥔 그리드.
그의 손끝에서 차가운 달빛이 출렁였다.
낙월검의 출현이다.
“락(落).”
꼭 화려하고 계수가 높은 스킬만 강한 건 아니다.
때로는 단순한 스킬일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초근접 거리에서 쓰는 즉발(에 가까운) 검무.
심지어 ‘대상을 반드시 베는’ 낙월검으로 쓰는 검무다.
이건 미르가 아니라 무신이 와도 피하지 못할 일격이라고, 그리드는 자신했다.
실제로 미르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서걱!
팔이 떨어져나갔다.
미르의 팔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리드의 팔도 잘려나갔다는 점이다.
‘XX 카운터...’
상황이 생각보다 더 나쁘다.
미르는 청룡도를 쥔 오른 팔이 아닌 왼쪽 팔을 내주고 반격을 해온 반면, 그 반격에 당한 그리드는 하필 검을 쥐고 있던 오른쪽 팔을 잃었다.
그 탓에 바닥에 떨어진 낙월검.
지금 그리드에겐 무기가 없다.
쩌저정!!
다행히 염룡검이 활약해줬다.
방패를 쥔 갓 핸드들과 함께 스스로 움직이며 그리드를 보좌하던 염룡검이 빠르게 판단, 그리드에게 후속타를 연결하는 미르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충돌의 반동을 이용해 그리드의 왼 손에 빨려 들어가듯 안착했다.
“놀라운 신물을 많이 갖고 계시는군요.”
“허억, 허억... 팔을 잃은 건 훈장으로 삼을 생각이 없나보지?”
주작의 기운을 운영해서 팔을 재생시키는 미르의 모습을 그리드가 조롱했다. 미르의 얼굴엔 몇 달 전 그리드에게 베였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해해주십시오.”
챙!
크라우젤의 기습을 가볍게 막아낸 미르가 대답한다.
“한쪽 팔로 제 비원을 이루는 건 불가능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크라우젤! 너 안 도망치고 뭐 했냐!!”
최선을 다해서 발악하다가 슬슬 죽음을 받아들일 요량이었다.
한데 빌어먹을, 크라우젤이 도망치기는커녕 전투에 난입해버렸다.
이래서야 둘 다 죽는다. 취지에 맞지 않다.
그리드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전면에 선 크라우젤이 태연히 말했다.
“나는 후퇴를 모른다.”
사실, 이곳 가야에서만 해도 도망 다닌 횟수가 수백 번이지만... 그리드 앞에서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다.
하물며 그리드를 남겨 두고 혼자 도망치라고?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이건 효율이나 의리보다 자존심의 문제다.
속마음을 삼키며 결사 항전을 각오하는 크라우젤과 그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그리드.
한바탕 희극에 미르가 흥미를 보였다.
“전부터 느끼는 건데 두 분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군요. 신께서는 천하의 검성을 사자로 두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게 아니고 우리는.”
진저리 친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동시에 대답했다.
“친구다.”
“경쟁자다.”
“...?”
각기 다른 대답.
여전히 미소 지은 미르의 고개가 갸웃거렸고,
“그리고.”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또 동시에 말을 이었다.
“라이벌이지.”
“벗이다.”
“...하하, 그렇습니까.”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미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어서 아쉬움을 느꼈다.
만약 가람의 욕심이 적었다면.
만약 파그마가 여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이 내 곁에서 저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예우로써 두 분을 사이좋게 보내드리지요.”
파지직!
미르가 뇌기를 일으켰다. 전에 없이 강력한 기운이 해방되며 얼어붙은 사막을 진동시켰다.
-지금이라도 빨리 도망치라니까?
-내가 적을 앞에 두고 등을 돌릴 것 같나?
-아니, 어차피 못 이기는데 한 명이라도 살아야 될 거 아니야.
-그래, 못 이기지.
고개를 끄덕인 크라우젤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한 권의 낡은 책자.
전대 검성들의 공부가 담긴 <무쌍검법>의 기서였다.
-하지만 살아남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다, 그리드.
나 또한 그리드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큰 은혜를 입은 게 사실이다.
이 손에 쥐어진 백호검이 증거다.
“크라우젤...?”
“내 검술이 검성의 이름에 걸맞지 않다면, 검성이 되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두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차라리 검성의 자리를 내려놓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서사의 시작은, 저 멀리 만년설로 뒤덮인 도시가 보이는 사막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이제 자격을 증명했으니 전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는, 고결한 신념을 목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