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38화 (1,328/1,794)

템빨 67권 - 16화

극상급 보석 4개와 최상급 보석 39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감히 가치를 논할 수 없는 보석들.

대국의 국보나 황제의 관을 장식했어야 할 진귀한 보물들이 엘리자베스의 공방에 널브러져 있다.

깨진 것은 비일비재하고 어떤 것은 심지어 가루가 된 상태다.

행정관 라빗이 목격했다간 기절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겐 죄의식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엔 오직 환희만이 가득했다.

‘이거...! 이거 어쩌면 성공할 수도...!’

두 번 다신 없을 기연.

어떤 수상한 천재 소년이 의뢰했던 부속품들.

고작 7개의 부속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떠올린 가정이 빚어낸 상상의 산물은, 황제의 관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엘리자베스 개인의 생각이었지만...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겁이 났지만, 이 순간 엘리자베스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냈다.

혹 그리드에게 피해를 끼치면 어쩌나 내심 불안했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럴 수밖에.

그녀는 대기의 마나를 흡수해 에너지로 치환하는 영구기관(永久機關)의 편린을 창조해냈다.

아직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설령 완성할지라도 기관의 크기가 너무 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기엔 충분했다.

템빨국의 하늘을 누빌 초대형 비행선과 대양을 장악할 군함들, 그리고 대륙 지배의 기반을 다질 마장기의 태동을, 엘리자베스는 감지했다.

전율하는 그녀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은 ‘부조리한 아티팩트’의 창조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아직 결과를 빚어내진 못했으나, 이론을 정립했다는 사실만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에 마땅합니다.]

[대마법사 ‘파울드’ 이후 수백 년 만에 처음 세운 업적을 인정받아 당신의 <세공 기술>이 장인 마스터 레벨로 상승합니다.]

“...!!”

장인 기술 마스터.

당장 제작 중인 영구기관의 제작 성공률이 올라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기뻐해야 할 부분은 눈앞의 성과가 아니라 잠재력의 상승에 있었다.

장인 기술의 레벨을 마스터까지 달성했다는 건 즉, 전설이 될 자격을 얻었다는 것.

설레발이 아니다.

위대한 대장장이 칸이 실제로 증명했었다.

“꺄, 꺄아악!! 대박... 어, 어라?”

흥분해서 어찌할 바 모르던 엘리자베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파울드 이후 내가 처음으로 세운 업적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구기관의 이론을 정립시킨 인물은 내가 아니라 얼마 전에 만났던 그 천재 소년 아닌가.

“...설마?”

엘리자베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날.

템빨그림자단에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인페르노를 주시하느라 상당수의 어쌔신을 투입한 상태였는데 파울드로 추정되는 리치를 수색하라는 명령까지 받게 됐다.

“임무 우선순위를 파울드 추적으로 바꾼다.”

파울드가 아그너스의 리치로 부활했다는 정보.

과거에 크라우젤이 그리드를 통해서 전달해줬었다.

아그너스가 영구기관을 얻었거나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페이커와 템빨그림자단은 그것을 반드시 찾아내 파괴해야했다.

***

양반들은 인지하지 못했다. 아니, 인지했을지언정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검을 찌르는 미친놈을 보며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힘차게 허공을 관통한 검이 쭉 늘어나 자신의 몸을, 혹은 동료의 몸을 감싸고 조인 순간에야 비로소 ‘어...?’ 피부 위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늦어도 한참 늦은 이해.

이 순간 불가해에 노출 된 양반들은 본인들이 혐오해온 범부(凡夫)와 다름없었다.

촤르르륵!!

채찍처럼 휘어 양반들의 몸을 감싸는 냉병기.

저게 정녕 검이란 말인가, 크라우젤이 의문을 품는 그때.

끼리릭!!

무형검의 작은 칼날들이 뒤틀렸다.

30개의 관절이 역방향으로 움직여 칼날의 각도를 바꾼 것이다.

톱날처럼, 혹은 가시처럼 뾰족하게 솟아오른 칼날들이 무형검에 붙들린 양반들의 살갗을 찢고, 조각냈다.

[양반 ‘새싹’을 해치웠습니다.]

[양반 ‘물결’을 해치웠습니다.]

이미 크라우젤에게 중상을 입었던 양반들이다.

그들이 맥없이 잿빛으로 산화하자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동시에 경험치를 획득했다.

크라우젤의 레벨이 올랐다. 덩달아 기세도 올랐다.

레이단의 연금술이 빚어낸 비약을 먹고 회복한 그가 벼락처럼 쏘아졌다.

츠━

벽력과 광란의 연계.

━카카카칵!!

허망하게 죽어나간 동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반들의 몸이 난도 당한다.

양반들은 자신들의 몸에서 튀어 오른 선혈을 한 발 늦게 자각했다.

이미 그들의 등 뒤에 선 크라우젤은 모래 깊숙이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천지파열무.

레전드리 초월 등급으로 승격한 대단위 검술이 대지를 무너뜨렸고, 갈라진 대지의 틈새로부터 분출 된 검기가 양반들을 휩쓸었다.

“와우.”

그리드의 탄성은 양반들 사이에서 터졌다. 크라우젤이 헤집어 놓은 적진에 순보로 진입한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여전히 무형검이었다.

낙월검으로 무패왕의 검술을 쓰면 양반들의 목을 간단히 벨 수 있겠지만, 그리드가 원하는 건 무형검의 성능 테스트다.

촤르르르륵!!

30개의 관절을 비틀고, 펼치고, 뒤집으며 양반들의 몸을 감싸는 무형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로가 크라우젤에게 영감(靈感)을 줬다.

그리드가 만들어낸,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검의 움직임이 양반들을 농락하는 광경이 크라우젤의 재능을 범람(氾濫)시켰다.

콰자자자작!!

크라우젤의 검기가 회전을 반복했다.

무형검의 검로를 따라가며 얽히되 훼방 놓지 않았고, 점차 더 가속하며 양반들을 베었다.

기적 같은 재능을 현현시킨 그의 협공이 이번엔 그리드에게 영감을 줬다.

회전 후 사선을 긋고, 다시 또 회전하길 반복하며 가속을 더하는 크라우젤의 검기.

그것은 무형검에게 더 나은, 더 많은 검로를 제시하고 있었다.

파창!

그리드는 어떤 환청을 들었다.

상상력의 한계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콰드드드득!!

“꺽...!”

“크아악!!”

지독한 중상을 입었던 새싹, 물결과 달리 뒤늦게 합류한 3명의 양반은 멀쩡한 상태였다.

크라우젤의 벽력과 광란 검을 허용하긴 했지만 즉시 백호의 기운을 둘러 천지파열무의 데미지는 최소화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에겐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괴상한 검으로 새싹과 물결을 죽인 놈이 ‘순보’를 써서 바로 곁에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이놈, 소문의...!’

‘치우의 시련을 통과했다는...!’

양반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산산조각이 나서 죽은 동료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방심한다면 그건 닭대가리다.

그들은 처음부터 경각심을 품었고, 크라우젤의 기습을 허용한 시점부턴 전력을 끌어올렸으며, 그리드가 순보를 써서 난입해왔을 땐 사력을 다해 저항하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는 그리드와 크라우젤이 소문보다 더 강하다는 점이었다.

크라우젤의 검로가 갑자기 복잡해져서 대응하기 힘들었고, 안 그래도 복잡했던 그리드의 검로는 한층 더 빨라져서 반응하기 힘들었다.

‘이놈들...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다.’

양반들이 연검(軟劍)을 애용하는 이유는 학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대상에게 공격을 적중시키는 순간 무조건 죽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그들 입장에서 연검의 가벼움은 단점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싸울 때는 연검을 사용하지 말라는 미르의 지시가 있었다.

가벼움과 탄성을 장점으로 삼는 연검의 빠르기와 변칙성. 두 가지 모두 크라우젤에겐 통하지 않으니 차라리 무거운 무기를 써서 힘으로 제압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양반들에게 미르는 각별한 존재였다.

우상이랄까.

미르를 상대로 오기를 부리는 양반은 가람 정도밖에 없었다. 그 가람도 죽은 지 오래지만.

어찌됐든, 양반들은 미르의 조언을 잘 새겨 들었다.

크라우젤과의 전투에 대비해서 중검과 참마도를 준비해왔다.

한데 지금 이곳에 있는 건 크라우젤뿐만이 아니지 않나.

“제길...!”

속도전에서 자꾸 밀리자 몸에 상처가 늘어난다.

양반들은 무거운 무기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무기를 버리고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던 연검을 풀었다.

속도를 끌어올린다. 타고난 육체의 이점을 살려 공격에 변칙을 싣는다.

양반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집중했다. 마치 치우의 시련에 도전할 때처럼.

하지만 집중한다고 해서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면 그건 반신이 아니라 신이다.

쩌저정!!

“...!?”

크라우젤의 검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회전을 버리고 내리꽂힌 순간의 기세가 벼락같았다.

출렁!

연검의 탄성이 위력을 발휘했다. 맞부딪친 백호검의 힘을 반감시키며 튕겨냈다.

양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 일검을 막아낸 걸로 십년감수 하는 신세라니.

“...?”

공격을 가로막힌 대가로 동료에게 추적당하는 크라우젤에게 따라붙어 반격하려던 양반의 시야가 기울었다.

목이 뜨겁다 싶더니 그리드의 채찍 같은 검에 베인 상태였다.

“이런 빌어먹을...”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크라우젤, 변해봤자 뭐가 달라지냐고 묻듯 전법을 고수하는 그리드.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건만 궁합이 너무 좋다.

그들의 협공은 마치 쉬지 않고 맞물리는 톱니바퀴 같았다. 빨려 들어가는 순간 분쇄 당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톱니바퀴.

일평생 함께 사선을 넘어온 전우라도 되는 건가?

욕설을 삼킨 양반들이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았다.

혹시 평소와 다른 점이 있지 않았을까? 옷을 입을 때 소매를 좀 늦게 찾았다던가, 길을 걷다가 더러운 것을 밟았다거나, 그런 사소한 부분들까지 포함해서.

아마 오늘따라 유난히 운수가 나빴을 것이다. 그러니까 두 명의 괴물을 나란히 만난 거겠지.

의욕이 꺾인 양반들이 뒷걸음질 치는 그때였다.

쏴아아...

뜨거운 사막에 어울리지 않는 한기가 밀려왔다. 태양에 달아올랐던 모래들이 빠르게 얼어붙으며 사막의 일부가 빙판으로 변했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없습니다.]

알림창이 떴을 땐 이미.

“큭...!”

그리드가 사력을 다해서 허리를 비틀고 있었다.

퍼엉!!

그리드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태운 번개 한 줄기가 사막 한쪽에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은 크라우젤이 서있던 장소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당했나?

질색하던 그리드가 이내 안도했다. 뿌연 먼지 너머에서 크라우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성장하셨군요.”

하늘에서는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냉기와 전격을 용의 꼬리처럼 흩뿌리는 도를 손에 쥔 사내.

새하얀 도포를 흩날리며 표표히 강림하는 그의 정체는 미르였다.

그리드를 ‘도전자’로 만드는, 환국의 마지막 문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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