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37화 (1,327/1,794)

템빨 67권 - 15화

크라우젤과 양반들의 관계는 서서히 역전 되고 있었다.

지금의 크라우젤은 도망치기 바쁜 사냥감이 아니다. 자신을 찾아 사막과 협곡을 수색하는 양반들을 숨죽인 채 지켜보다가 역으로 기습해 물어뜯는 노련한 맹수였다.

물론 양반을 죽이는 건 쉽지 않다.

설령 기습에 성공할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피해를 입히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점이 문제였다. 양반은 반신. 하나하나가 네임드다. 크라우젤보다 수십 배 높은 생명력과 강력한 스탯을 지녔으니 쉽게 죽어줄 리 만무했다.

크라우젤이 표적의 숨통을 끊기 전에 달려온 양반들이 동료를 구출하고, 크라우젤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도망치는,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이 지난 1년 동안 몇 번이나 연출됐다.

다만 항상 똑같진 않았다. 종종 운이 좋은 날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며칠 전 미르에게 목숨을 바친 대가로 4개나 오른 초감각 스탯이 오늘따라 유독 빛을 발휘됐다.

이쯤 되면 오만한 수준을 넘어서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또 제각각 흩어져 협곡을 수색하기 시작한 3명의 양반 중 하나를 기습하자 약점 공격과 크리티컬이 연달아 터지는 게 아닌가?

백호검의 숙련도도 올릴 겸 적당히 손을 봐주다가 후퇴하려던 크라우젤의 생각이 바뀌었다.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양반들의 모습을 보고도 스킬을 쏟아 부어 콤보를 연계했다.

딜 계산은 완벽했다.

“끄륵...!”

모든 양반은 강하다. 하지만 신격을 쌓은 양반은 일곱뿐이다.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양반들은 1대1로 크라우젤을 감당하지 못한다.

정신없이 난도질당한 끝에 세상을 양단하는 우주 검마저 허용한 양반이 결국 잿빛으로 산화했다.

[반신을 해치웠습니다.]

[다시 한 번 놀라운 업적을 세웠습니다.]

[신화 <가야의 굴욕>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반신, 혹은 신과 싸울 때 모든 능력치가 10퍼센트 상승하고 검술의 위력이 추가로 20퍼센트 상승합니다.]

[당신은 <전설>과 <초월자>, 그리고 <격>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으며 <심기체>의 조화를 이룬 상태입니다.]

[계기를 만나지 못해 억눌려 있던 초월의 격이 개화합니다.]

[...!]

[...!!]

[!!!]

“허억... 허억...?”

놀라운 보상의 연속.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전율하던 크라우젤이 당황했다.

갑자기 느낌표만 반복하는 알림창.

에러? 그럴 리가...

콰앙!!

크라우젤이 역수로 쥔 검을 측면으로 세우자 양반의 무형지기가 검날과 충돌하며 흩어졌다.

현장에 도착한 양반들이 귀기서린 얼굴로 소리쳤다.

“크라우제엘!!”

크라우젤이라는 이름 넉 자는, 이제 양반들에게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미르도 인정하는 전(前) 검성의 힘을 계승하고도 단 한 번의 무쌍도 논하지 못한 머저리━ 하찮은 사냥감, 같잖은 인간 따위가 아닌.

무쌍을 논하지 않고도 능히 인간을 초월하고, 검 한 자루로 반신을 살해하며, 만인적(萬人敵)의 편린을 보인 재능의 화신.

상식적이지 못한 저놈을... 풍사와 우사가 친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명의 동료가 살해당했다.

동료의 죽음을 애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 또한 죽을 수 있단 사실을 자각하고 경각심을 느낄 뿐.

저놈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영원불멸 전승되는 구전의 힘 덕에 죽지 않는 전설이라 해도, 결국 죽고 또 죽이다 보면 나약해지고 소멸하게 마련.

채챙! 채채채채챙!!

이를 악 문 양반들이 크라우젤을 맹렬히 몰아붙였다. 명예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온힘을 다해서 협격을 펼쳤다.

방금 막 한 명의 양반을 죽이느라 대부분의 공격 스킬이 쿨타임에 걸린 크라우젤은 반격의 기회를 엿보기 힘들었다.

공격을 막고, 피하고, 금나수로 시간을 버는 등 철저히 방어 전술을 구사해 목숨을 부지했다.

“검성이라는 놈이 검을 장식취급 하는 거냐!”

싸우지 않고 도망만 다니는 크라우젤을 양반들이 조롱했다.

잔뜩 흥분해 얼굴까지 붉힌 주제에 도발해봤자 먹힐 리 만무하다.

무언으로 응수한 크라우젤이 전신의 감각을 살폈다.

‘조금 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육체가 변했다. 정확히는 능력치가 바뀌었다. 신화의 주역이자 초월자가 되면서 스탯이 상승하고 새로운 패시브 스킬을 얻은 여파다.

초감각 스탯이 초월자의 상위 개념-초월자의 감각이 초감각의 하위버전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던 크라우젤 입장에선 꽤나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한 술 더 떠서 시스템이 이상하다.

새롭게 얻은 능력치와 스킬의 정보를 나열하기는커녕 여전히 느낌표만 연발 중이다.

크라우젤에게는 변화를 파악하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강해진 힘, 빨라진 속도에 무작정 몸을 맡기고 검을 휘두르기보단 스스로를 정확히 관조하고 통제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승기를 노릴 수 있었으니까.

“쥐새끼 놈!”

양반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저러다가 뇌출혈로 죽는 게 아닐까 의문이 생길 지경.

검막을 펼쳐 장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턱을 돌려 도를 흘리고, 눈앞으로 스쳐지나가는 코등이를 칼집으로 낚은 크라우젤이 자진모리를 전개했다.

쩌정-!

미약한 신음을 흘린 양반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그의 얼굴이 잔뜩 구겨진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다. 도를, 무기를 빼앗겼다. 양반에게 무인(武人)의 자각이 있을 리 만무하다만, 무기를 빼앗겼다는 게 얼마나 큰 굴욕인지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도검 뺏기>에 성공하여 <양반의 참마도>를 손에 넣었습니다.]

휘리릭, 철컥!

회전하는 칼집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도가 크라우젤의 손에 정확히 떨어져 쥐어진다.

도검 뺏기의 지속 시간은 5초.

5초 후엔 손에서 놓치게 된다.

무기를 회수하려는 적을 방해 할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보통의 전투였다면 전황이 완전히 뒤집혔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양반.

대부분의 양반은 무기를 쥐었을 때와 쥐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없다. 모든 무술에 통달해서? 아니, 오히려 모든 무술의 깊이가 얕기 때문이다. 양반이 강한 건 단지 타고난 신체능력과 사신의 힘 덕분이지 무기술 때문이 아니다. 물론 미르 패거리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노오오옴!!”

무기를 뺏긴 양반이 청룡의 숨결을 운영해서 쇄도해왔다.

나부끼는 전격이 사막의 모래를 어지럽히며 폭풍을 일으켰다.

반면 다른 양반은 은밀하게 행동했다. 소리 없이 크라우젤의 등 뒤에 나타나 검을 꽂았다.

채앵!

양반의 참마도로 기습을 방어한 크라우젤이 오른손에 잠자코 쥐고 있던 백호검을 휘둘렀다.

상승한 능력치와 새로 생긴 스킬들.

그로 인해 발생한 변화를 드디어 정확히 파악하고 적응한 것이다.

서걱━!

크라우젤의 검이 가볍게 움직였다. 전보다 작은 움직임으로 전보다 더 강력한 위력의 검술을 펼쳤다.

“윽...!”

기습했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한 양반의 도포가 피에 붉게 젖는다. 어느새 검을 회수한 크라우젤이 뒤로 한 보 물러나며 회전했다.

쩌정!!

청룡의 기운을 두른 채 접근해온 양반의 수도가 백호검의 투명한 칼날과 맞부딪쳤다.

주륵.

“...!?”

크라우젤의 검과 대가리를 통째로 박살낼 심산이었던 양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비록 두터운 중검이긴 하나 유리처럼 투명해 연약해 보이는 검. 손쉽게 부서질 줄 알았던 그것이 청룡의 기운을 덧씌운 장격을 막아낸 것으로 모자라 내 피부를, 살을, 뼈를...!

“끄아아아아악!!”

손 절반이 싹둑 잘려나간 양반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토했다.

신격을 쌓은 양반이라면 또 모를까, 주작의 봉인이 풀린 상황에서 육체가 훼손 된 건 최악의 사태다. 미약하게 남은 주작의 기운을 끌어올려 어떻게든 상처를 재생시켜보려는 그의 목덜미를 동료가 붙잡아 당겼다.

덕분에 크라우젤의 검이 허공을 벤다.

동료를 살린 양반이 뇌전을 일으키며 말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 이상이구나.”

크라우젤의 검에 백호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정보쯤이야 사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만큼 강력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저건 보통의 검이 아니라 신물이라고 표현해야 옳은 수준 아닌가?

게다가 크라우젤의 잠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뀔 일은 없다.

크라우젤은 한계였다. 한동안 잘도 버텼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상처도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주마.”

파지직!

쿠오오!

두 양반이 백호의 기운과 청룡의 기운을 동시에 일으켰다. 신격을 쌓지 못한 그들의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들은 이 폭발적인 힘을 통제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끌어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채챙! 채채채챙!!

현란한 검과 도의 합격이 크라우젤의 몸에 상처를 늘려갔다. 하지만 크라우젤의 저항은 도리어 더 거세졌다.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있던 검술들이 하나, 둘씩 해방되고 있었으니까.

“끄윽...!”

“멈추지 말고 몰아붙여!!”

손을 잃은 양반의 출혈이 심해진다. 그가 휘두르는 도가 점차 무뎌졌다.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는 크라우젤의 검술이 전에 봤을 때완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가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공포는 분노로 변했다. 내가. 신이 될 자격을 지닌 내가 고작 인간을 두려워한다고?

“우오오오오!!”

까창!!

“...!”

죽음을 각오한 상대는 까다로운 법이다.

손을 잃은 양반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수를 뿌리기 시작하자 크라우젤의 기세가 급격히 약해졌다.

‘살아남기 힘들겠군.’

동귀어진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한 명이라도 저승길 길동무로 삼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알면서도, 크라우젤은 망설였다.

만에 하나 백호검을 떨구게 될까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템을 잃고 싶지 않아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줄이야.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낀 크라우젤이 쓰게 웃었다.

푸욱!!

심장을 찔러오는 검을 흘려 어깨를 내줬다. 적이 검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검날을 맨손으로 힘껏 쥐었다. 도검불침의 신체 덕분에 손이 잘려나가진 않았지만 고통은 생생했고 선혈이 난무했다.

푸우욱.

검날을 손에서 놓으며 허리를 숙이자 어깨에 박혔던 검이 쇄골을 부수고, 가르며 허공으로 솟구친다. 꼼짝도 않던 검이 갑자기 위로 솟구치자 당황한 양반이 잠시 균형을 잃는 모습이 보였다.

크라우젤은 놈의 심장에 백호검을 쑤셔 넣었다.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온 묵직한 도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지만 버텼다.

“이...! 이 지독한 놈...!”

한쪽 팔을 검에 베여 잃고, 참마도에 허리를 반쯤 잘려 내장을 쏟아내면서도 기어코 동료의 심장에 검을 우겨넣는 크라우젤의 모습에 양반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크라우젤은 검성이 아닌 검귀였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느낌표만 띄우던 알림창이 드디어 한 줄의 문장을 나열한다.

썩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동요하지 않았다. 곧 다가올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마지막 남은 검기를 쥐어짜 검술을 전개했다.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무쌍검법>들이 울부짖는 듯한 환청이 들렸지만 끝까지 외면하고 자신이 창조한 검술로 양반의 심장을 박살냈다.

양반은 죽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 데미지가 부족했다. 한 명이라도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후회하지 않았다.

신체가 크게 훼손 된 탓에 손끝에 힘이 덜 실렸을 뿐.

양반을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자신의 검술이 약해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라.

시스템도 인정하지 않나.

[검성이 된 이후 당신이 이뤄온 모든 업적에 <무쌍검법>이 관여한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6명의 반신을 살해하고 신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사용해온 기술, 당신이 창조한 검술의 잠재력이 무쌍검법을 초월한다고 판단, 당신이 보유 중인 모든 스킬의 등급을 레전드리(초월)로 상향 조정합니다.]

“하하...”

피칠갑한 크라우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미친놈!”

양반들은 질색했다.

한 명은 손을 잃고, 한 명은 심장이 부서진 상황.

자신들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대가로 곧 죽게 될 놈이 웃고 앉았으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꽈아아아앙!!

양반들의 장격에 얻어맞은 크라우젤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맥없이 사막을 뒹구는 그의 시야에 최후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불사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여기까지군.’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백호검이 무사하길 비는 것뿐이다.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의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크, 크라우젤?”

흠칫!

크라우젤의 몸이 떨렸다.

슬며시 시선을 들어 그리드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 잘못 봤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리드에게 패배의 순간을 목격 당하다니.

크라우젤의 입장에선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이었다.

“너는 또 뭐냐?”

양반들이 그리드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중상까지 입은 그들은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드가 품고 있는 기운을 읽을 여력이 없었고, 그러므로 그리드의 정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설령 그리드를 알아봤다고 해도 태도를 바꾸진 않았을 것이다.

새로운 동료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니까.

다섯 명의 양반과 대치하게 된 그리드가 크라우젤에게 물약을 던져주었다.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제조한 아주 비싼 비약이었다.

“혼자선 조금 빡셀 것 같거든?”

“도와드리겠소.”

“그건 대체 무슨 컨셉이야...”

“....”

“이익...! 인간 따위가...! 우리를 무시하느냐!!”

저 새끼들은 대사가 바뀌지를 않네.

쯧, 혀를 찬 그리드가 무형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자 채찍처럼 뻗어나간 검이 상처 입은 양반들의 몸을 감싸고, 조이고, 조각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