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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36화 (1,326/1,794)

템빨 67권 - 14화

“자, 먹어. 꿀에 마늘을 곁들인 양념으로 버무려봤어.”

“맛있다흥.”

“....”

토끼가 내미는 당근 샐러드를 즐겁게 음미하는 호랑이.

그리드는 토끼가 요리를 만들었다는 부분에 대해선 딱히 태클 걸 생각이 없었다. 토순이는 옛 신의 백성 중에서도 특별하다. 십이지. 옛 신을 직접 섬겼던 신하 중 하나다. 뛰어난 지성을 지녔고, 이족 보행하며, 도구를 다룰 줄 안다. 체격도 인간과 비슷했다. 요리 만드는 게 대수겠는가?

호랑이가 당근을 먹는 광경도 납득했다. 청호는 백호의 자식이니까. 그래, 반신이다. 몸집은 보통의 호랑이보다 2배 이상 컸지만 꼭 육식만 고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혼란스러웠다.

노골적으로 애정행각을 벌이는 토순이와 청호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토순이가 보통의 토끼가 아니고, 청호가 보통의 호랑이가 아니라고 해도 어찌됐든 토끼와 호랑이기 때문에? 아니, 고작 종(種)의 문제를 논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청호는 반신이다. 청호가 토끼가 아닌 호랑이와 연애했어도 종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건 좀 더 단순한 문제다.

“성별이라도 맞추던가. 남자로 변신 할 수도 있잖아?”

토순이가 내어준 당근 샐러드를 예의상 한입 집어먹은 그리드가 드디어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리드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대화하기 위해 인간으로 둔갑한 청호는 늘씬한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순이는 암컷이다...

“신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야. 한없이 고독하며 위험에 노출되기 쉽지. 나는 자식을 낳지 않을 거야.”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하는 청호.

어린 시절의 그가 환국의 양반들에게 노리개 취급당했던 ‘파그마의 기억’을 떠올린 그리드가 어렴풋이나마 청호의 마음을 이해했다.

“플라토닉 러브라는 건가...”

“쪽.”

“...아닌가.”

성별이 같다고 해서 육체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당근을 집어먹다 말고 입맞춤하는 토순이와 청호의 모습을 보고 깨닫는 그리드의 귓가에 다양성을 존중해 달라는 소수 단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뭐가 됐든 행복하면 좋은 거지.’

조용히 미소 지은 그리드가 주변을 둘러봤다.

양반 가람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숲.

멸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었던 옛 신의 영토가 못 본 새 꽤 보기 좋게 회복되어 있었다.

토순이와 청호는 이 땅을 복구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고, 고난을 겪는 과정에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워나갔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며 차갑게 식은 차를 마시는 그리드의 팔뚝을 청호가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전에는 단순히 강철처럼 단단했는데 이제는 탄력이 더해졌구나.”

“호랑이 근육 같지?”

“어흥.”

초월의 격과 신위를 쌓아올린 그리드의 육체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탄력을 얻어 내구력이 오른 근육은 진화한 골격에 손쉽게 힘을 더해줬다. 강력한 힘을 순식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고 육체의 가동 범위도 커졌다. 맹수와 비교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이런 근육이 엉망이 됐다는 게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무형검을 만들고 얻었던 후유증을 떠올리고 헛웃음 흘리는 그리드에게 청호가 질문했다.

“서쪽에서 넘어오자마자 바로 우리를 만나러 온 거냐흥?”

“응. 왜?”

“어흥흥헷.”

“뭐야, 왜 웃어?”

“후후훗, 우리가 보고 싶었다는 거잖아. 기뻐서. 역시 덕신님은 상냥하다흥.”

“나 이제 덕신 아니다...”

애초에 덕신이 됐던 적이 없다.

토순이가 멋대로 덕신이라고 불렀던 것뿐이지.

오래간만에 덕신이라고 불리자 안 그래도 마음에 들던 템빨신이라는 이름이 더욱 더 멋지게 느껴졌다.

“은인! 왔느냐묘옹!”

“덕신니이임!!”

“움머어어어!!”

경자, 방울이, 흑우 등.

신을 잃고, 잊힌 땅의 망령이 되어 고통 받았던 십이지들.

그리드에게 구원 받아 삶을 되찾은 그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보고 싶었어!!”

“다시 찾아와주셔서 너무너무 기쁩니다!!”

“움머어어어!!”

“자, 잠깐! 진정해!!”

와락 안겨오는 십이지들에게 떠밀려 바닥에 깔린 그리드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문득 십이지들의 저고리와 갑옷이 흙과 땀에 찌들어 있음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을지 엿볼 수 있었으니까.

근데 좀 냄새난다...

끈질기게 몸을 비비는 십이지들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그리드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왕 온 김에 옷이나 몇 벌 만들어줘야겠네.”

“우리도 도와줄게!”

“저는 술과 음식을 준비할게요.”

“움머어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십이지들 사이에서 그리드는 실감했다.

저들의 미소를, 삶을 자신이 되찾아주었다는 사실을.

기분이 너무 좋다.

***

드르렁. 크르렁. 코오오...

깊은 밤.

십이지들과 옛 신의 백성들이 술에 취해 깊이 잠들었다.

혹 그들이 깨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그리드의 시야를 은은한 빛이 밝혀주었다.

빛돌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그리드를 돕는 빛의 상급 정령이 발하는 빛이다.

빠직, 서걱.

손에 묠니르와 검을 쥔 10개의 갓 핸드는 경로상의 바위와 나뭇가지를 부수고, 자르며 그리드가 이동하기 쉽게 도와주었다.

“...”

숲의 안쪽.

달빛을 머금고 빛나는 호수 앞에 선 그리드가 평화라는 단어에 담긴 깊은 울림을 음미해보았다.

환국과 쫓겨난 신, 지옥과 대악마, 아스가르드와 주신.

평화의 가치를 되새길수록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들에게 품어온 적의가 범람하는 것을 느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엔딩은 빨리 보는 편이 좋을 듯하다.

확신을 품는 그리드의 뇌리에 미르의 존재가 스쳤다.

청룡도의 주인.

한울이 환국의 대천사장으로 삼고자 친히 설계한 존재.

그 무력이 ‘최소’ 한 자릿수 대악마와 비견될 거라는 최강의 양반이다.

그리드는 그와 싸워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몇 달 전엔 대응조차 제대로 못했던 번개들을 단신으로 돌파하고, 미르에게 도달해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그것도 크라우젤의 도움 없이?

‘호각은 바라지 못해도 위협을 줄 수준은 돼야 하는데.’

미르는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미르를 쓰러뜨려야만 백호와 청룡을 해방시켜 동대륙의 잊힌 신화를 온전히 되찾을 수 있다.

그만큼 강력했고, ‘기준’으로 삼기에 적합했다.

한때 가람을 강함의 척도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미르를 위협할 수준은 되어야 20번 지옥을 돌파할 수 있다.’

개의 아가리를 지키던 흑기사의 존재감이 얼마나 거대했던가.

마주보고 섰을 땐 눈치 채지도 못했다.

한 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돌이켜 봤을 때 비로소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자들이 헬가오를 레이드하고 지옥에서의 페널티를 없앤다고 해도 흑기사를 압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신화급 괴수’ 켈베로스의 보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한몫 했다. 놈들과 싸우게 되면 사리엘은 반드시 폭주할 터라 사리엘은 전력에서 배제해야했다.

‘내 역할이 중요해.’

미르와 싸우고 실력을 점검 해볼 필요가 있다. 미르여야만 한다.

판단한 그리드가 등 뒤로 다가오는 기척에게 질문했다.

“혹시 오작교를 부수는 방법은 없나?”

오작교로 연결 된 가야와 파국.

두 국가 모두 미르의 영향력에 놓인 상태다.

오작교를 부순다는 건, 동대륙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작교는... 수만 마리의 까마귀와 까치를 희생시켜서 놓은 다리야. 결속 된 영혼이 일으킨 현상을 부수는 개념은 흔치 않아.”

다가오는 기척은 청호의 것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의 형상이 점차 인간에서 호랑이로 변해갔다.

“백호 신과 청룡 신을 아직도 포기 못한 거야? 어흥... 나는 포기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 이런 말하기 힘들지만... 가야는 청룡 신의 저주를 받아 만년설에 뒤덮인 까닭에 많은 사람이 죽어 사라졌고, 파국은 원래부터 작은 나라였어. 두 신을 해방시킨다고 해도 구원 받는 사람은 적어.”

“...”

“그리드 네가 주작 신과 현무 신을 부활시킨 덕분에 대륙은 사실상 평화를 되찾았다고 봐도 무방한 거야. 내 생각은 그래... 어흥...”

“평생 두려움에 떨며 갇혀 지내는 게 어딜 봐서 평화라는 거지?”

초국과 씽의 백성들은 나라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주작과 현무의 가호에서 벗어나는 순간 환국의 신들에게 포착당하고 가야나 파국으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기껏 되찾은 옛 신을 다시 한 번 망각하고 양반들의 거짓 신화를 찬양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도, 아빠를 보고 싶잖아.”

“그리드...”

청호의 커다란 눈이 동그래지더니 촉촉해졌다.

王 무늬가 새겨진 녀석의 이마를 그리드가 툭툭 두드려주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 나중엔 너도 나처럼 할 수 있는 일을 해줘. 그거면 돼.”

개인의 힘이 영원불멸하리라 믿는 건 지독한 오만이다.

Satisfy에 엔딩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언젠간 반드시 ‘그리드가 없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벌써부터 그때를 염려하고 대비할 정도로 그리드는 근심이 많지도, 철두철미 하지도 않았지만, 다만 오늘 날의 내 행동이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 좋겠다는 바람 정돈 있었다.

혹시 아나?

조만간 템빨단원들이 현실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Satisfy를 접하게 됐을 때.

청호 같은 존재들이 그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지.

물론 꼭 그런 보답을 바라고 사람들을 돕겠다는 게 아니다.

기왕지사 선순환을 노린다는 거지.

“잠시 이것 좀 잠시 맡기자.”

“이건...?”

“서리여왕의 심장이라는 건데 내가 잠시 다녀올 곳이 있거든. 거기서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간 난감하니까 몇 시간만 맡아줘.”

미르와 싸우면 높은 확률로 죽는다.

미르를 만나는데 서리여왕의 심장을 들고 가는 건 미친 짓이다.

그리고 청호와 십이지에겐 서리여왕의 심장을 지킬 힘이 있었다.

신화를 일부나마 되찾은 청호와 십이지는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나게 강해졌다. 이곳은 환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고.

“어흥... 이거 왠지... 청룡 신의 저주와 닮았다.”

“그렇긴 한데 연관성은 없을 거야. 서리여왕은 서대륙에서도 고립 된 땅의 지배자였거든. 동대륙하고 접점이 있을 리가 없지.”

“응...”

“그럼, 다녀올게.”

그리드가 숲을 떠났다.

옛 신들의 가호에서 벗어나자마자 끈적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꼈지만 잠시뿐이다.

환국의 ‘연못’을 통해 지상을 감시하는 존재가 신이 아닌 이상에야 그리드의 신속하고 은밀한 움직임을 언제까지고 쫓을 순 없다. 그리고 감시 같은 잡일은 당연히 양반들이 도맡았다.

그리드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가야에 진입 할 수 있었다.

순간.

[검성의 강력한 검기가 세계를 가릅니다!!!]

“...!”

그리드의 시야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가 밟고 선 사막이 무너지며 드러난 깜깜한 지하 아래로 모래가 폭포처럼 떨어졌다.

[대지의 신 가리온이 권능을 발휘합니다. 반으로 쪼개졌던 모든 만물이 거짓말처럼 수복됩니다.]

“...”

방금 본 광경이 꿈처럼 느껴진다.

미친 듯이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던 사막이 다시 적막해졌다.

이어지는 월드 메시지에 그리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검성 ‘크라우젤’이 반신을 살해하였습니다.]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크라우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가야에 머물며 싸워왔다면...

레벨은 둘째 치고 백호검을 거의 신화 등급까지 성장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반신 살해 업적을 몇 번이나 달성했으니 신격을 쌓았을 수도 있다.

앞으로 감당해야 할 강적들을 떠올릴 때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그리드의 긴장감이 한층 누그러졌다.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렇다.

크라우젤은 그리드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천외천에게 품었던 동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우당탕탕!!

“...?”

과거의 크라우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던 그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온몸에 피칠갑 한 사내가 어디선가 날아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뒹굴고, 뒹굴고, 대자로 뻗은 끝에 그리드의 발치에 멈췄다.

크라우젤이었다...

“크, 크라우젤?”

“...사람 잘못 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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