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35화 (1,325/1,794)

템빨 67권 - 13화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30 상승하였습니다.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템빨신교 교인들과 세상 모든 대장장이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

심층에 가라앉았던 의식을 되찾은 그리드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전신의 근육이 경기를 일으켰고 양쪽 손목은 퉁퉁 부었다. 반사적으로 물약을 꺼내려는데 어깨가 올라가질 않는다.

‘이런 경험은... 몇 년 만에 처음이군.’

무아지경에 빠지면 육체의 안전핀이 제거된다. 스태미나가 전부 소모 되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 할 때까지 오직 눈앞의 결과물에만 집착하게 된다.

300레벨대의 그리드는 무아지경을 겪을 때마다 극한의 피로감을 겪었다. 하지만 400레벨에 진입한 이후부턴 괜찮았다. 체력이 워낙 좋아 녹초가 되기 전에 아이템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심지어 양손에 골절까지 당했다. 망치를 얼마나 열심히 휘둘렀으면...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무래도 근육과 뼈에 무리가 가는 각도로 망치질을 했나본데.’

등뼈검의 제작 난이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다. 오보라의 척추를 손상 없이 단접하려면 일반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했다.

“나중엔 아이템 만들다가 불사도 터지겠네...”

아이템을 만들 때마다 대장간을 폭발시키고, 목숨을 잃는 대장장이가 있다?

아무도 안 믿을 거다.

템빨콘을 소환한 그리드가 손을 털며 몸을 풀었다. 골절은 실시간으로 회복 중이다. 그리드의 재생력은 보스 몬스터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푸르릉!!

그리드의 뺨을 핥는 템빨콘의 콧바람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아리따운 처녀의 뺨을 핥아야 할 자신이 더러운 사내의 뺨이나 핥는 신세가 되었으니 화가 치미는 것이다. 이건 호감도와 별개의 본능이다. 템빨콘은 그리드를 나름 신뢰했지만 생리적으로 혐오했다.

푸르르릉!!

템빨콘의 투레질이 더욱 사나워졌다. 눈깔이 뒤집히기 직전이다. 부글부글 끓는 게거품을 보니 곧 토라도 쏟아낼 기세였다. 급기야 흥분해서 날개까지 퍼덕이기 시작한 녀석 때문에 모루 위 등뼈검이 흔들렸다.

끼긱, 끼기긱.

30개의 관절이 움직인다. 작고 미세한 동작이었지만 그리드가 등뼈검에 바랐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그리드의 머릿속에 등뼈검의 투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변만화(千變萬化).

템빨콘이 일으킨 소동 탓에 흔들린 등뼈검은, 그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드러냈다.

“....”

그리드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무리 강해지고 또 강해져도 도달할 거란 확신이 서질 않았던 동경의 대상.

검성 크라우젤의 감각적인 검로들을 일부나마, 강제적으로나마(템빨로나마) 체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봤기 때문이다.

‘크라우젤이 놀라 까무러치겠군.’

오직 천부적인 센스가 있기에 가능한 동작들. 범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번뜩이는 동작들을 기반으로 구사하는 크라우젤의 검술은 단순한 기술의 개념을 넘어선 상태다. 이질적이고 아름답다. 일평생 무술을 연마하며 이름을 날린 무도가들이 오죽하면 크라우젤의 검술을 예술이라고 표현하겠는가.

한데 그 예술을 따라할 수 있게 됐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등뼈검이 말하고 있었다.

고작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그리드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건방진 신참이군.

등뼈검과 교감하는 그리드의 모습에 질투를 느낀 걸까.

오래간만에 입을 연 염룡검의 음성이 차갑다. 혀가 있었으면 혀라도 찼을 기세다.

“그래도 동생인데 좀 살갑게 대해줘.”

-근원이 다르거늘 어찌 형제라 하겠는가.

염룡검은 화석과 탐욕의 결정체.

등뼈검에도 탐욕이 쓰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손잡이 부분에 한정된다.

염룡검의 자아는 대악마의 척추를 통째로 써서 만든 등뼈검을 저급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나마 낙월검에겐 이 정도로 쌀쌀맞지 않았는데...’

탐욕이라도 월야철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등뼈검을 손에 쥔 그리드가 상세 정보를 불러왔다.

<무형검>

등급:신화

내구력:1,100/1,100 공격력:2,790

★매 공격마다 형태 변환.

★형태 변환 시마다 공격 대상의 회피력 대폭 저하, 약점 노출.

★일반 공격 시 무조건 2연격 발생.

-베기 공격 시 찌르기 연계.

-찌르기 공격 시 베기 연계.

★5회 이상 콤보 달성 시, 매 콤보 달성마다 대상에게 무작위 상태이상 유발. 매우 낮은 확률로 ‘사각 공격’ 발생.

★12회 이상 콤보 달성 시, 매 공격마다 ‘사각 공격’ 발생.

템빨신 그리드의 이상(理想)이 담긴 검입니다.

22위 대악마 오보라의 척추로 만들었으며, 30개의 관절을 고스란히 유지하여 형태와 길이가 천변만화합니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니 무형(無形)이라 합니다.

*뼈날검의 특성상 훼손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내구력이 하락합니다.

무게:900

착용 조건:그리드

‘오보라의 척추로 만든 거 뻔히 알고도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니 무형 이러네.’

...하긴, 상대방은 모르겠지.

이름이 영 시답지 않아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무형검을 휘둘러보았다.

촤르륵!!

그리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표적으로 삼은 무형검의 길이가 늘어난다. 최대 길이는 무려 3미터. 어지간한 창보다 길었다.

“흠.”

재미있다는 듯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린 그리드가 무형검을 회수하며 횡으로 휘둘렀다.

촤르륵!

당겨지며 1미터까지 줄어든 검신이 다시 늘어나 채찍처럼 휘몰아쳤다.

이건... 그리드도 한 발 늦게 반응했을 일격이다. 그나마 초월경이 발동하며 반응했을 거다. 그만큼 변칙적이다.

‘미쳤다.’

사실 형태가 변환한다기에 세심한 컨트롤이 필요한 건 아닐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채찍처럼 쓰기 쉬웠다. 코등이가 없다는 점이 거리감을 더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게끔 돕기도 했다.

‘낮은 공격력은 콤보로 커버할 수 있고.’

내구력 문제는 수리 스킬로 해결할 수 있다.

사각 공격이 발동하는 타이밍에 낙월검과 합체시키면 극강의 효과를 발휘할 테고.

‘기대 이상이군.’

왜 신화 등급 판정을 받은 건지 납득 될 정도다.

촤르륵! 촤르르륵!!

재미 들린 그리드가 무형검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그때마다 무형검은 채찍처럼 굽고, 창처럼 뻗고, 칼처럼 날카로워지며 사선과 원을 그리길 반복했다. 대장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의 틈새를 자유롭게 누비는 모습은 작은 용의 유영을 보는 듯했다.

-용은커녕 지렁이 같은데.

“하하.”

염룡검이 아무리 떠들어봤자 그리드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몇 분 동안 신명나게 휘둘러본 결과, 손재주 스탯이 무형검의 움직임을 더욱 빛나게 해주고 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행복하다.’

신검을 추가하는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다.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된다.

‘언젠가 헥세타이아를 구출하게 되면...’

헥세타이아의 도움을 받아 탐욕으로 무형검을 만들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때 사용할 탐욕은 당연히 지금보다 업그레이드 된 그라비늄일 거고.

‘그땐 지옥이고 천상이고 나발이고 다 뒤집어엎어야지.’

MMORPG에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세계관이 안배한 스토리가 전부 끝나더라도 세계는 유지되며, 앞으로의 이야기는 플레이어들 스스로가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리드는 어서 그날이 오기를 바랐다.

자신이 이룩한 것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모조리 말살한 뒤 평화를 만끽하며 느긋하게 이 세계를 즐기고 싶었다.

은퇴 후 속세를 떠나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고 싶다는 그리드의 꿈은 여전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그러다가 가끔 뉴비들을 도우며 보람을 느끼고.

‘...흐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만든 아이템을 구매했다가 경악할 뉴비들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이게 참 재밌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대장간을 나섰다.

“고생하셨습니다.”

철컥!

메르세데스와 수십 명의 왕실근위대가 일제히 군례를 올리며 길을 열었다.

왜 죄다 모였나 했더니 주변에 인파가 장난 아니다. 템빨신의 신물이 출현했다는 월드 메시지를 본 플레이어들이 구경하려고 달려온 눈치였다.

“그리드 형 잘생겼다아!!”

“SNS에 올리게 신상 구경 좀 시켜주세요!!”

“갓리드 나 죽어엇!!”

환호하는 사람들.

새로운 신물을 구경하고 싶다는 의지가 역력했지만 그리드는 다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무형검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무형검은 그 특성상 되도록 비장의 무기로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반트너였으면 이럴 때 생각 없이 자랑했을 텐데.’

가끔은 반트너가 부러운 그리드였다.

***

“나이트를 고용해 서리여왕의 심장을 노렸던 인물이 누군지 파악했습니다.”

악몽인가?

“상인 랭킹 3위인 라이온입니다. 다섯 거상이라고 불리는 상인계의 신성 중 하나로 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단순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한쪽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말하는 라우엘의 손등에 검은 불꽃이 일렁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리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흑염룡?”

“후훗, 역시 전하께서는 알아보시는군요. 영원히 떨쳐내지 못할 전생의 업보랄까요.”

“....”

저 날개는 뭐냐...

스킨의 힘이 상상을 초월한단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간신히 치유되고 있던 라우엘의 중2병이 전보다 심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저게 라우엘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겠지. 눈하고 귀가 썩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해해주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라이온의 배후에 또 다른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서리여왕의 심장의 가치를 생각해 봤을 때 나이트가 요구한 의뢰비가 상당했을 텐데 라이온 개인이 감당할 금액이 아니거든요. 다섯 거상 중 하나라고 해봤자 전성기 시절의 키르와 비교하면 아직 재력이 형편없으니. 쿨럭, 쿨럭.”

“라우엘...!?”

갑자기 각혈하는 라우엘 탓에 깜짝 놀라는 그리드였다. 독? 포이즌 마스터 덕분에 독에 대한 내성은 꽤 갖췄을 텐데? 해독제를 꺼내는 그에게 라우엘이 손을 저었다.

“천재는 단명하는 법. 고작 약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죠.”

“미친... 이 무친놈...”

라우엘이 토한 피가 컨셉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우엘은 설명을 이어갔다.

핵심은 라이온 상단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

혁명단 등 여러 집단을 후원하고 있는 세력과 동일 세력일 확률이 높다는 것.

잠자코 듣던 그리드가 의문을 표했다.

“동일 세력일 확률이 높다고? 납득이 안 되는데?”

라우엘이 열거한 집단들. 동일 세력에게 지원을 받았다는 집단들은 아무런 접점도, 공통점도 없었다. 심지어 성향도 제각각이었다. 테러리스트가 있는 반면 정치가도 있었고 성직자가 있는 반면 악마숭배자도 있는 식이었다.

“투자엔 목적이 있는 법이잖아?”

근데 전혀 목적성이 없다. 돈을 마구잡이로 뿌리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아... 서로 대립하는 집단에 모두 투자해서 전쟁을 심화시킬 의도인 건가?”

전쟁은 누군가에겐 사업이 되기도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리드가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깊은 경계심을 품었다.

한데 의외로 라우엘은 다르게 해석했다.

“표면적인 정황만 봤을 땐 전하의 추측이 타당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도리어 전쟁을 억제하려는 의도 같아요. 굶주린 맹수들을 배부른 가축으로 길들이는 느낌이랄까요.”

한동안 히든 클래스를 사냥하고 다녔던 혁명단이 최근 잠잠해진 이유는 불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우엘이 쭉 감시해온 그들의 장비는 전과 비교해서 몇 배나 업그레이드 된 상태였는데, 덕분에 강해진 그들은 혁명에 관심을 잃고 사냥과 레이드에 집중하며 즐겜 중이었다.

혁명단의 혁명이 단순한 신세한탄에 불과했단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혁명단을 지원한 세력은 혁명단에게 혁명을 사주하지 않았다. 혁명을 지지했을 수는 있어도 강요하진 않았단 뜻이다. 그러니까 혁명단이 저 모양 저 꼴일 테지.

“단순히 잠재력 있는 플레이어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이 두루 성장하길 바라는 것 같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게 뭔... 키다리 아저씨냐?”

“적절한 비유군요. 물론 아직은 확신할 단계가 아닙니다. 페이커님께선 여전히 의심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철저히 조사할 계획이라고 하니 조금 더 지켜보시죠. 쿨럭, 쿨럭.”

“....”

또 다시 각혈하는 라우엘을 보자 급격히 피곤해진다.

헬가오 원정을 준비하는 사자들의 인솔을 메르세데스에게 맡긴 그리드가 동대륙으로 이동했다. 옛 신의 일족인 청호와 옛 신의 백성들이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스킨을 얻은 라우엘이 마안족 왕과의 호감도를 빠르게 쌓고 있단 사실을.

“그리드으!!”

청호는 다행히 잘 지내고 있었다. 토순이와 연애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오늘 그리드의 정신은 여러모로 혼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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