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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34화 (1,324/1,794)

템빨 67권 - 12화

인페르노의 이사 라트비히.

깊은 눈빛이 인상적인 그의 잘생긴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래서야 포기해야겠군.”

주륵.

누런 콧물이 흘러내렸다.

‘말을 할 때마다 콧물을 흘리는’ 스킨의 효과였다.

진중한 표정으로 콧물을 질질 흘리는 꼴이 퍽이나 우습게 보였지만 라트비히는 괘념치 않았다.

대기업의 후계자답게 그의 자아는 강했다. 가상현실 세계에서 콧물 좀 흘린다고 해서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런 모습쯤이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었다.

“의뢰 실패에 따른 배상금입니다.”

나이트가 착수금의 6배에 해당하는 거액을 군말 없이 지불했다. 그는 용병 업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만큼 의뢰 실패 시 페널티도 매우 컸다. 하지만 미련 따위 없었다. 서리여왕의 심장이 그리드의 손아귀에 들어간 시점부터 의뢰의 성공 가능성은 제로다.

“자네나 나나 아쉽게 됐군. 훌쩍.”

“구세하가 시프트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너무 늦게 떠올린 제 불찰입니다.”

스킨 제작자의 정체를 며칠만 빨리 알아챘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구세하가 라인하르트에 진입할 무렵에서야 미심쩍은 정황을 포착했다는 게 실패의 원인이었다.

“겸손하군. 빈약한 정보만 가지고 구세하를 특정해낸 자네의 솜씨에는 적잖게 감탄했다네. 나이트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확인했지. 훌쩍. 앞으로 자주 의뢰를 맡기고 싶은데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대롱대롱 매달린 콧물이 거슬린다...

의뢰인의 콧물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의뢰 실패로 빚을 졌으니 갚겠습니다. 템빨단과 엮이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맡겨주십시오. 그럼 이만...”

히든 클래스 <사신>은 암살계에 가깝다. 하지만 자리를 떠나는 나이트의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는 아이디처럼 기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윗선에서 몇 년 전부터 주목해온 인재답게 실력이며, 기개며 모두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그리드의 경우만 봐도 가문의 안목이 남다르긴 했지.’

파그마의 후예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의 상황들을 떠올리고 피식 웃은 라트비히가 팽! 코를 푼 뒤 다음 손님을 맞이했다.

흑마법사 퍼지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로제의 뒤를 이어 야탄의 종이 된 인물 중 하나다.

당대 야탄의 종은 무려 3명이 플레이어였다.

야탄교의 운영에 플레이어가 깊숙이 관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안 그래도 캐시템의 수혜를 입는 등 시스템의 도움을 받게 된 야탄교의 운영을 플레이어가 주도하게 된 상황. 야탄교는 더 이상 폐쇄적이지 않다. 가문은 작금의 야탄교를 훌륭한 투자처라고 판단했다.

“신전을 건설할 토지를 임대해주시겠다는 게 사실입니까?”

라트비히와 악수를 나눈 퍼지스가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의심하는 눈치였다.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야탄교는 공공의 적인 바.

야탄교의 신전은 늘 다른 세력의 표적이 되어왔다. 최대한 은밀한 장소에 건설하고, 정체를 위장해도 대부분의 신전이 수개월에서 수년 내에 발각되고 파괴당하길 반복했다. 신전이 크고 많을수록, 오래 유지될수록 여러 혜택이 발생하는 법인데 야탄교는 혜택을 얻기도 전에 물질적인 피해만 입어온 셈이다.

가장 큰 원인은 대부분의 땅에 주인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토를 철저히 관리하고 감독했다. 자신의 영토에 혹시라도 야탄교의 그림자가 드리우진 않았을까 주기적으로 탐색했다. 그건 각국 중앙정부의 의지였다. 제아무리 게으르고 무능한 영주일지언정 야탄교를 수색해 없애라는 국왕의 명령만큼은 외면하지 못하고 실천했다.

그만큼 야탄교는 경계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야탄교가 10년 이상 지킨 신전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10개가 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주인 없는 땅에 세운 신전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 없는 땅에만 신전을 세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지엔 사람이 적었으니까. 신도들을 모으기도, 제물을 구하기도 힘들었다. 별 영양가가 없단 말이다.

그러던 차에 혹할 만한 제안을 받게 됐다.

야탄교 신전을 건설하고 운영할 영토를 제공해주겠다는 제안.

심지어 세계적인 기업 인페르노측의 제안이었다.

“귀사에서 굳이 왜 본교를 후원하시겠다는 건지... 솔직히 말해서 함정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요.”

“기업은 이윤을 보고 움직이는 법이죠. 훌쩍. 우리는 야탄교가 돈이 될 거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돈이라... 본교를 이용해서 뒷세계 진출이라도 노리실 셈이신 겁니까?”

“하하, 인페르노는 건실한 기업입니다. 우리가 야탄교에게 원하는 건 더러운 커넥션이 아니라 정당한 고객이죠. 수억 명의 고객.”

촤르륵.

라트비히가 서대륙 지도를 펼쳤다.

콧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지도 위엔 17개의 표시가 체크되어 있었다.

“중소도시 16개와 대도시 1개. 이곳 전부에 야탄교 신전을 건설하실 수 있게끔 돕겠습니다. 훌쩍. 물론 표면적으로는 야탄교가 아니라고 위장을 해주셔야합니다만 그 정도야 늘 하던 일이니 쉬우시겠죠?”

“....”

17개...?

인페르노가 17개나 되는 영토를 소유 중이라고?

이쯤 되면 국가급 규모 아닌가?

‘기업들이 랭커들을 육성하거나 후원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게 가능할 정도였나?’

퍼지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인페르노의 뒤에 더 큰 세력이 버티고 있단 사실을 아직 몰랐으니 놀랄 수밖에.

“임대료와 세금을 꼬박꼬박 지불하고 ‘제물’은 반드시 영외에서 공수해올 것. 또한 신도들에게 보급하는 장비와 소모품을 전부 ‘우리들’이 지정한 상단에서 매입할 것. 야탄교가 이 조건들만 지켜준다면 17개 도시의 영주들은 야탄교의 모든 활동을 묵인하며 외부의 감시로부터 보호해줄 겁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없는 겁니까? 예를 들어 대악마 소환 의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야탄교의 교리나 방침에 개입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는 야탄교가 무사히 세력을 키우고 더 큰 고객이 되길 바랄뿐입니다. 자, 읽어보시죠.”

라트비히가 두툼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일체의 독소 조항이 없는, 야탄교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조건들이 가득 적힌 계약서였다. 솔직히 말해서 인페르노가 이득을 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길 지경이었다.

퍼지스의 몸이 흥분으로 떨렸다.

“다른 종들과 의논해본 뒤 대답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늦진 않을 겁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지요.”

답변은 다음날 바로 도착했다.

야탄교와 인페르노의 거래는 당연히 성사됐다.

가문에 보고하는 라트비히도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예, 야탄교 측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아모락트가 교단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는단 뜻이겠죠. 예, 예. 서리여왕의 심장은... 그리드의 손에 들어갔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예, 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명심하겠습니다. 모든 건 지구를 위해서.”

***

“좋아.”

궁리를 거듭한 그리드는 아이템 창조를 소모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했다.

지슈카의 새로운 활에 필요한 조건은 무속성일 것과 속사에 초점을 맞춘 옵션.

기존에 존재했던 도안을 이용해도 충분히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속성 부여와 명중률, 사정거리 보정 등의 효과를 배제한 시점부터 아이템 창조는 사치였다.

끼릭, 파팡.

‘훌륭하군.’

탄력이 넘치는 현을 빠르게 몇 번 당겨본 그리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속성부여가 불필요해 숨결 등의 고급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레전드리 등급 판정을 받은 활이다. 명중률 보정 등의 부가 옵션을 포기한 대가로 순수 공격력이 극한에 이르렀다.

‘어차피 궁성의 화살은 백발백중이니까.’

물론 대상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애초에 궁성의 솜씨로도 맞추지 못하는 대상에겐 명중률 개념이 무의미하다. 궁성의 화살을 피한다는 건 이미 초월의 영역에 들어섰거나 어떤 권능을 보유한 상대라는 뜻이니.

파팡, 파팡!

현을 당기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화살을 장전하는 시간을 감안해 봐도 초당 2발의 화살을 날릴 수준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기준이다. 지슈카는 2배, 3배의 화살을 날릴 것이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단궁이라 비거리가 짧다는 점.

하지만 지슈카에겐 주작궁이 있다. 원거리에서의 저격은 주작궁을 이용하면 될 일이다.

‘나중에 좋은 재료가 들어오면 무속성 장궁도 하나 더 만들어 줘야지.’

길드 창고는 물론이고 거래소까지 다 뒤져봤지만 마음에 드는 재료가 더 이상 없다. 활이라는 무기의 수요가 워낙 높다 보니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지슈카.

용기를 낸 그리드가 지슈카에게 귓속말을 보내봤다.

-응? 왜?

다행히 지슈카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밝았다.

내심 안도한 그리드가 새로 만든 활의 옵션을 공유해줬다.

-새로 만들어봤어. 보조 무기로 사용해 줘.

-후와, 뭐야? 주작궁보다 공격력이 높네? 거기다가 속사 보정도 붙었고?

-지금의 너한테 딱 필요한 물건이지?

-응! 고마워! 얼마야?

-선물이니까 그냥 써. 어차피 길드 창고에 있던 재료로 만든 거라 돈도 안 들었어.

-헤에~ 알았어. 다음에 보답할게.

“...생각보다 기운이 넘쳐서 다행이네.”

태양 같은 여자다. 광합성 하는 식물의 기분이 이럴까.

오래간만에 지슈카의 밝은 목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그리드가 망치질을 잠시 멈췄다. 모루 위에는 오보라의 척추가 놓여있었다. 틈틈이 단접하고 단련한 덕분에 형태가 제법 날카롭다. 슬슬 검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건 유니크 등급만 떠줘도 대박이다.’

아이템 승급을 써서 레전드리로 만들면 된다. 그리고 등뼈검의 등급은 레전드리로 충분했다. 등뼈검은 환검. 적을 직접적으로 살상하기보다 현혹하는 용도로 활용할 예정이라 공격력이 다소 낮아도 괜찮았다. 탐욕으로 변신시키면 공격력이 어느 정도 커버되기도 할 테고.

‘욕심을 버려야 돼.’

더 높은 등급, 더 높은 공격력을 노리고 단접을 무리해서 반복하다간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뼈를 제련, 단접, 단련하는 모든 과정에는 실패 확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대장기술은 사실상 신화 등급이라고 봐도 무방해서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지만, 단접이 거듭될수록 그리드의 통찰력과 손재주가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단접에 한 번 성공할 때마다 다음 단접의 실패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슬슬 위험해.’

모루 주변에 쌓인 뼛가루를 슬쩍 확인한 그리드가 가늠해보았다.

오보라의 척추를 손상되지 않는 선에서 단련하기까지 앞으로 2번의 제련이 한계다. 단접은 4회를 넘기지 않는 편이 좋다.

화르륵.

그리드는 집중을 의식하지 않았다. 자연히 무아지경 상태가 되었다. 풀무질하는 그의 입에서 대장장이의 숨결이 토해졌고 피로에 삐걱거리던 근육들은 대장장이의 인내심에 호응해 경련을 멈췄다.

설령 세계가 멸망해도 동요하지 않을 부동심이 의식과 육체의 중심을 잡는다.

따아앙━!!

맑은 망치질 소리가 대장간을 한 바퀴 휘감은 뒤 외부까지 뻗어나갔다.

입구를 지키던 메르세데스는 알 수 있었다.

전하의 고된 행사가 드디어 끝났음을.

[템빨신 그리드의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템빨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의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아이템 착용 시 발생하는 페널티가 소폭 감소합니다.]

신을 상징하는 물건은 흔치 않다.

절대신 레베카의 신물만 봐도 라파엘의 창 등의 삼신기와 최초의 성검, 그리고 그녀가 직접 다룬다고 전해지는 <빛의 근원>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신이 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무서운 기세로 신물의 숫자를 늘려가고 있었다.

템빨신교 교인들 입장에선 막말로 신의 축복, 기적이었고, 외부인들이 봤을 땐 단순히 사기였다.

-아직도 템빨신교 코인 안 탄 흑우 없지? ㅋㅋ

-왜 템빨신 안 믿어? 왜 우리 템빨신 안 믿냐구!

-유.일.신.갓.리.드.

웹상에선 템빨신교와 템빨신교가 아닌 자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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