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7권 - 11화
[스킬 지정 대상이 잘못 됐습니다.]
서리여왕의 심장은 영약. 말 그대로 먹는 약이다.
제련, 개조, 승급, 분해 등 대장장이의 모든 스킬이 적용되질 않았다.
‘이게 당연하지. 대장장이가 무슨 약사도 아니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는데 역시나 도둑놈 심보였다.
“메르세데스, 네펠리나를 데려와 줘.”
“네, 전하.”
그리드의 곁을 지키던 메르세데스가 즉시 출발했다.
그리고 고작 5분 만에 네펠리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대장간과 성의 거리를 고려하면 순보라도 쓴 건가 싶을 정도의 속도였다.
‘중력장을 이용한 건가...?’
메르세데스가 배운 중력장은 작은 범위의 중력을 가변시킨다.
지옥에서 그녀의 보조를 받으며 싸웠던 그리드는 적들의 행동이 급격히 느려지거나 빨라지는 현상을 목격했다.
메르세데스의 솜씨라면 중력장을 응용해서 이동 속도를 높이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안대를 벗어던진 네펠리나가 투덜거렸다.
“마침 막 잠들려던 참인데 이 무슨 예의 없는 경우냐?”
“대낮인데?”
“나는 아기이니라. 양질의 수면을 취해야 빠른 성장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그래...? 미안. 배려가 부족했군.”
“요즘 난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니라. 나보다 늦게 식객이 된 칠악의 화신조차 네 덕을 봐 나태의 저주가 회복되고 있는 마당에 나는 여전히 양껏 먹지도 못하지 않느냐. 한데 이제는 낮잠마저 방해 받아야 하는 것이냐? 나만 대접을 못 받는 느낌이니라.”
“전하의 은덕이 아니었으면 당신은 이미 죽거나 흑마법사들의 마탑에 팔려가 실험체로 고통 받았을 운명이에요. 생명의 은인께 늘 감사하진 못할지언정 뒤로 불만이나 품고 있었다니, 염치가 없으시군요.”
“...이 시건방진 계집도 마음에 안 들고...”
“지크프렉터의 저주가 회복되고 있는 건 내가 따로 특별히 신경 써서가 아니야. 아마 혈왕의 특성이 영향을 주고 있는 거겠지. 음, 라빗 행정관을 설득해서 매일 소 한 마리씩 더 주라고 할게. 그럼 좀 위안이 되려나?”
“다섯 마리.”
“그래, 전달할게.”
말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다.
한 마리도 감지덕지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요즘 재정이 위태로운 상황에 지옥 원정을 다녀온답시고 너무 많은 자금을 소모하고 말았다.
대악마들이 드롭한 아이템을 외판했다면 소요 금액의 수십 배, 수백 배도 벌어들였겠지만 내부 투자에 집중하는 그리드의 방침상 외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최근엔 템빨단, 템빨국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강해져야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는 중이지만... 그래도 아직 외판은 시기상조다.
“이걸 봐 줘.”
속사정도 모르고 기뻐하는 네펠리나에게 그리드가 서리여왕의 심장을 내밀었다.
초롱초롱 빛나던 네펠리나의 커다란 눈동자가 파충류의 것처럼 길쭉하게 변했다.
용안의 작동. 진지해졌다는 뜻이다.
“이건... 막대한 음기를 품고 있구나.”
“서리여왕의 심장이야. 혹시 네가 먹어서 소화시킬 수 있겠어?”
“먹고 소화시키는 거야 누구라도 가능하지. 다만 새어나오는 음기를 통제하는 건 나라도 못하느니라. 내가 이걸 먹는 순간 라인하르트의 모든 게 얼어붙고 말게야.”
“원소의 축복을 받는다며? 근데 통제를 왜 못해?”
“이 심장에 담긴 음기는 순수한 원소가 아니라 사념에 가까운 것이니라. 무의식이 만든 인공적인 저주체라고 봐도 무방해. 모든 것이 얼어붙은 세상에서 홀로 군림하고 싶은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에야 이것을 섭취해선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 없나...? 전설의 약사쯤 되면 성분을 좀 바꿔서 부작용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뛰어난 약사는 역사상 존재한 바 없다. 애초에 이건 약이라기보다 저주 덩어리라 하지 않았느냐. 쯧쯧, 그래도 명색이 신이라는 자가 사이한 힘에 매료되어 집착하는구나.”
“방법이 없나보군.”
확실히, 서리여왕의 심장이 품은 힘은 너무 강대했다.
Satisfy가 싫어하는 밸런스 붕괴용 아이템이었다.
먹는 순간 강해질지언정 고립된다는 설정은 그놈의 밸런스를 위해서라도 불변하리라.
‘주작의 심장도 무반응이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미련을 접은 그리드가 심장을 품속에 넣었다.
막말로 짐덩이를 떠안게 된 셈이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아무개한테 들어가서 쓸데없는 위험요소를 늘리는 건 피해야했다.
‘서리여왕을 레이드했다는 사람이 빌런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군.’
아프리카의 표범 쿠자라크.
솔직히 말해서 그는 그리드의 관심 밖이었다. 국대전 등의 행사에 불참했을 뿐더러 평소에도 변방에서 혼자서만 활동하지 않나. 여태껏 전혀 접점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쯤 되면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서리여왕의 심장을 토대로 추측해 보건데 서리여왕은 필시 초네임드급의 보스 몬스터였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헤라리스의 지독한 설원을 돌파한 것으로 모자라 초네임드급 보스를 레이드했다라... 크라우젤을 위협했던 명성도 납득이 되는군.’
언젠가 꼭 만나보고 싶어졌다.
강자와의 만남이 손해가 됐던 경우는 드무니까.
생각하며, 그리드는 잠시 멈췄던 작업을 재개했다.
***
“제가 스킬을 쓸 때마다 오른쪽 눈동자에 이 문양이 떠오르게 해주십시오. 집중해서 살펴보지 않는 이상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구세하는 스킨 제작 능력을 비교적 올바르게 사용해왔다.
평생 감내해야할 장애, 지워지지 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겉으로나마’ 멀쩡하게 고쳐주고 마음의 병을 치유해줬다.
물론 조건 없는 선행은 아니었다.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
“왼쪽 손과 팔에는 검붉은 불길이 일렁이게 해주시고요. 단, ‘흑염룡’이라는 키워드에 반응해서 작동해야 합니다.”
구세하는 성녀 루비와 달랐다. 성녀의 자애와 권능을 감히 참칭할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돈에 움직인 경험도 많았다.
단지 멋져지고, 아름다워지고 싶어 의뢰하는 플레이어들이 종종 거액을 제시할 때면, 구세하는 군말 없이 그들의 취향에 맞는 스킨을 제작해줬다. 그러면서 ‘멋’의 기준이 굉장히 주관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세상엔 참 다양한 취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제가 이런 식으로 손을 들어서 얼굴의 절반을 가릴 때는 주변에 암운이 드리우듯 배경이 검어지며 천둥번개가 쳤으면 좋겠군요. 가능합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그릴 땐 미풍이 불어오듯 제 머리카락과 옷깃이 작게 흔들리게 해주십시오.”
“‘전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마다 의미심장한 아우라가 표출되어야 하는데... 타천사의 검은 날개가 잠시 등 뒤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느낌은 어떨까요?”
“제가 하늘을 올려보거나 콜록, 콜록, 이런 식으로 기침을 하거나 ‘훗, 제법이군.’이라고 말 할 때마다 입가에 피가 흐르게 해주십시오.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을 때 재인박명이라는 말을 자연히 떠올리게끔 말이죠. 그런 컨셉인지라.”
...하지만 이건 정도가 무척 심했다.
라우엘의 요구사항이 더해질 때마다 구세하는 현기증을 느꼈다.
이자가 대체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의 욕망과 취향이 꽤나 다양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믿어왔는데 믿음이 깨지고 말았다.
가장 슬픈 사실은, 라우엘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들어줄 능력이 자신에겐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 의심을 품어왔던 ‘쓸데없는 기능’들이 마치 라우엘을 위해 존재해왔던 것처럼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스킨 제작자는 라우엘의 기괴한 취향에 맞추기 위해 탄생한 직업이 아닐까, 그런 황당무계한 의심이 생길 지경이었다.
“...요구사항 중에 천둥번개를 연출하는 건 제 역량 밖입니다만, 나머지는 비슷하게나마 가능할 듯싶습니다. 대신 굉장히 많은 재료가 필요합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헬다의 염료, 도깨비 불, 와이번의 폐, 퓨리오스의 원한, 달빛 유리인데...”
스킨 제작에 필요한 재료 목록을 라우엘은 열심히 받아 적었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단 사실에 처음엔 마냥 기뻐하던 그였지만 점차 표정이 어두워졌다. 구하기 힘든 재료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도 손에 넣기 힘들어 보이는 진귀한 재료가 더러 있었다.
“훗, 시련의 연속이라는 건가... 전생의 업보 탓인지 세상이 내게 너무 가혹하군.”
씁쓸히 웃으며 하늘을 올려보는 라우엘.
이때 입가에선 주르륵 피가 흘러내리고, 등 뒤로 타천사의 날개가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라우엘의 꺼져가던 의욕이 다시 불타올랐다.
“헤더 경, 기사들을 전부 이끌고 당장 이 재료들을 구해오도록 하세요.”
“예, 각하.”
“...음.”
직속 기사단을 모조리 호출한 라우엘이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광경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구세하의 시선이 이내 반트너에게 향했다.
파괴전차 반트너.
수호기사 랭킹 1위로 유명한 그는 템빨단과 구세하의 협력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 중 하나였다.
“원하시는 헤어스타일을 말씀해주세요. 바로 구현해드리겠습니다.”
구세하는 반트너의 의뢰 내용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대머리였던 의뢰자들의 공통됐던 소망을 떠올리며 늘 상비하고 다니던 가발 몇 개를 꺼냈다.
진짜 머리 같은 가발.
특수 재질로 만든 이것은 중년 귀족들에게 수요가 높은 아이템이었다.
“역시 사내라면 모히칸...”
화색을 지으며 대답하던 반트너가 문득 정신을 차리더니 소리쳤다.
“난!! 현실에선 대머리가 아니라고!!”
내가 대머리인 이유는, 단지 커스터마이징을 대머리로 했기 때문이다...
여태껏 늘 그렇게 주장해온 반트너다.
그가 이제 와서 혹해 가발을 쓰게 되면 현실에서도 대머리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꼴밖에 안 됐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뭡니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이 전설적인 대배우의 이름을 설마 모르시는 거요?”
“알고 있습니다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나는 20대 초반 시절의 레오나르도의 얼굴로 한 번 살아보고 싶소.”
이상형이라는 건 이성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동성의 모습을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하는 심리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는 보편적 욕구에 속한다.
반트너의 마음을 헤아린 구세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체형도 맞춰드리면 되겠지요?”
“싫소. 20대 시절의 레오나르도는 비쩍 말랐지 않소. 몸은 지금 상태 그대로 놔두고 얼굴만 부탁드리겠소.”
“밸런스가 안 맞을 텐데요.”
“괜찮소. 결국 얼굴만 잘 생기면 장땡이니.”
“알겠습니다.”
쉬운 의뢰였다.
인피면구 한 장 만드는 건 간단한 일이었고 레전드 스타의 얼굴은 참고할 자료가 많기도 했다. 게다가 반트너는 가발도 거부하지 않았던가. 머리숱을 만드는 수고도 필요 없었다.
다음날.
“푸하하하하핫!!”
가슴에 털이 잔뜩 난, 우락부락한 체형의 대머리 레오나르도가 템빨단원들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
금발.
레오나르도를 상징하는 금발은 어디에 갖다 버렸느냔 말이다...
목구멍까지 치솟는 그 말을 간신히 삼킨 반트너가 묵묵히 인피면구를 벗어던졌다.
이후.
구세하는 라인하르트에서 한참을 머물게 되었다.
쉬지 않고 찾아와 의뢰를 맡기는 템빨단원들 때문이었다.
의외로 피곤하진 않았다. 오히려 재밌고 점차 기대됐다.
보통 사람의 능력으론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어떻게든 구해오는 템빨단원들 덕분에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고난도 제작 의뢰들을 수행하게 됐으니 스킬 경험치가 쭉쭉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