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32화 (1,322/1,794)

템빨 67권 - 10화

할 일이 산더미다.

사리엘이 언제 폭주할지 몰라 지옥 원정을 서둘렀더니 대장일을 등한시했다.

“후우.”

대장간에 틀어박힌 지 어느덧 보름.

그리드는 등뼈검의 제작을 잠시 중단하고 단기적으로 처리 가능한 일들에 집중했다. 단원들의 밀린 의뢰를 해결하고 사자들의 아이템을 새로 만들거나 개조했다. 지옥에서 확인한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절차였다.

등뼈검은... 며칠 만에 뚝딱 만들 만한 견적이 아니었다.

뼈라는 재질의 특성상 단접을 굉장히 신중하게 진행해야했다.

금속이야 열에 녹인 뒤 굳기까지 여러 번 단접하고, 또 다시 녹여 굳기까지 단접하길 수천, 수만 번 반복하여 단련한다지만 뼈는 녹기보다 타기 때문에 난이도가 매우 높았다.

장인기술 마스터급의 대장장이가 아닌 이상에야 뼈를 제련하고 단련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얼추 다 된 것 같군.”

보름 동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단원들의 의뢰를 완수했고 사자들의 아이템도 깔끔하게 정비를 마쳤다.

쉴 틈도 없이 등뼈검의 제작에 착수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지슈카의 아이템을 만든 기억이 없다?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의뢰 목록을 검토해 봤더니 역시나, 지슈카의 의뢰 자체가 없었다.

‘내가 껄끄러워서 의뢰를 안 한 건가...?’

포비아의 후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궁도(弓道)를 걷기 시작한 지슈카는 사람들의 염려와 달리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녀가 올해 국대전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딴 것은 이변조차 아니었다.

궁성이 쏘는 화살의 종류는 무궁무진하고 저격은 천차만별하니 어지간한 하이랭커도 그녀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올해도 금메달 보상을 갖고 돌아온 지슈카는, 그것을 길드 창고에 넣어뒀을 뿐 그걸로 뭔가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는 발주하지 않았다.

그리드와 엮이는 일 자체를 피하는 눈치였다.

그리드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그녀를 동료로서도 잃게 될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슈카가 사라지면 나는...’

지슈카는 그리드의 원천(源泉) 중 하나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그녀와 체다카 길드의 신뢰와 지원이 없었다면 그리드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막말로 제2의 아그너스가 됐을 수도 있다.

그리드가 아그너스를 혐오하는 이유는 그에게서 자신의 잠재 된 단면을 읽었던 탓이었으니.

‘...슬프고 괴로울 거다.’

지슈카가 떠날 가능성을 떠올리자 우울해지는 그리드였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상실감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를 느꼈다.

‘일단... 일단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주자.’

현재 지슈카의 무장은 페이커와 똑같다.

과거 페이커에게 줬던 <크루제의 바지>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개량한 끝에 완성시킨 <그리드의 천 갑옷 세트>를 지급했던 것이다.

사실 그리드의 천 갑옷 세트는 크루제의 바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성능이 더 뛰어난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재질의 강화’를 이용한 ‘사용 조건 상승’이라는 편법으로 만들어낸 결과.

그리드의 제단 기술은 아직 크루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도 머잖아 옛날이야기가 될 확률이 높지만.’

<훼손 된 단탈리안의 서>를 습득한 대가로 그리드의 재단 기술은 고급 8레벨로 상승한 상황.

앞으로 빠르면 1년, 늦어도 2년 내에 고급 마스터 레벨을 달성할 것이다. 그때 얻게 될 보상은 6개의 레벨 상승과 장인급 재단 기술의 활성화. 그리고 대장기술과 재단기술의 완전한 융화...

잠재력 개방을 사용한 그리드의 대장기술이 전설을 초월한 수준을 넘어 신화에 이르렀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그리드의 재단기술은 말만 장인급이지 전설급의 성능을 발휘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 실력으로도 지슈카의 방어구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건 충분히 가능해. 무기는 당연히 훨씬 더 좋은 걸 만들어줄 수 있고.’

주작궁은 낡았다.

물론 신화급 무기이니만큼 종합적인 옵션은 ‘평생토록’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공격력 등의 수치가 낮은 편이다.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관점에서 봤을 때의 이야기지만, 어찌됐든 지금의 그리드는 주작궁보다 더 훌륭한 활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주작궁의 원본은 압도적일 정도로 뛰어난 아이템은 아니지. 주작궁이 원본을 초월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한계가 있어.’

그리드의 머리에는 온갖 제작법이 축적되어있다.

대륙 각지에서 활동 중인 템빨단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제작법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걸 그리드에게 상납한다.

그리드가 보유 중인 ‘활’의 도안은 총 192개.

그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작궁보다 뛰어난 활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만약 그리드 혼자만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면 <아이템 창조>를 써서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었다.

무려 전설 클래스로 전직한 동료를 위해서라면. 아니, 지슈카를 위해서라면 아이템 창조를 쓰는 게 아까울 리 없다.

무릇 활이라는 무기는 활용도가 높기도 했고.

‘일단 만들어두면 지슈카뿐만 아니라 언젠가 성장할 누군가도 유용하게 써먹게 되겠지.’

메르세데스는 당장부터 잘 써먹을 수도.

“새로운 활의 특징은...”

그리드는 일단 속성을 배제하기로 했다.

지슈카의 화염 속성을 증폭시켜주는 기능은 주작궁에 충분히 내장되어 있기도 했고, 애초에 활이란 속성의 영향을 덜 받는 무기였으니까.

당연하다.

활은 어디까지나 화살을 발사하기 위한 도구다. 속성은 화살에 부여할 수 있으니 활자체엔 속성이 없는 편이 활용도 면에서 나았다.

지슈카가 궁성이 되고 얻은 ‘자원’ <파마의 화살>만 봐도 주작궁이 내포하고 있는 화기의 영향을 받아 위력이 감소되는 실정 아닌가.

지슈카 본인도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독화살이나 파마의 화살을 쏠 때는 주작궁보다 평범한 활을 이용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지경이다.

‘다양한 속성을 포용하면서 증폭시키는 재질은 역시 미스릴이나 오리하르콘 계열이 최곤데...’

미스릴과 오리하르콘 둘 다 훌륭한 금속이다. 하지만 신화급 무기의 재질로 삼기엔 부족했다.

그리드는 아다만티움을 투자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스가르드산 금속인 아다만티움은 지상 모든 광물의 장점을 포용하고 있으니까.

물론 헥세타이아가 직접 만든 디바인스톤과 비교하면 급이 떨어졌지만, 헥세타이아가 감옥에 갇힌 지금 디바인스톤을 구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화르륵!

그리드는 궁리하면서도 손을 쉬지 않았다.

풀무질로 용광로의 화력을 조절한 뒤 오보라의 척추를 열에 달궜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꺼내 단접을 시도했다.

뼈를 제련하고, 단련한다는 것.

상식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Satisfy는 상식의 영향을 덜 받는다. 게다가 전설의 기술이란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법이었다.

[손재주 스탯이 1 올랐습니다.]

“오...?”

기술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스탯의 총량이 올라갈수록 제작을 통한 스탯 상승 확률은 낮아진다. 비전투 직업군의 무한 스탯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 탓에 재단 기술로 상승하는 스탯 폭도 점차 줄어드는 것을 체감 중이던 그리드 입장에선 단 1의 손재주 스탯 상승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뼈를 단접하는 건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니만큼 스탯 관련 페널티도 완화되는 건가.’

이번 단접이 너무 깔끔하게 성공하기도 했다.

보름 전과 비교해도 훌륭한 수준.

아무래도 보름 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하며 전반적인 감각을 끌어올린 덕분인 듯했다.

‘이럼 일할 맛나지.’

그리드는 등뼈검의 등급이 전설 이상으로 판정 받는 건 힘들 거라고 판단했었다. 대상 아이템의 등급을 최대 전설까지 상승시켜주는 <아이템 승급>을 소모해야할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다졌을 정도다.

하지만 뭔가 예감이 좋아졌다.

바로 그때 극검이 대장간을 방문한 것이다.

마침 기분이 좋았던 그리드는 구세하와 서리여왕의 심장에 얽힌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었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포용했다.

***

[플레이어 ‘시프트’에게 <서리여왕의 심장>을 양도 받았습니다.]

“제가 잘 맡아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드님.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됐군요.”

거래는 성사됐다.

서리여왕의 심장.

방향성은 기괴해도 워낙 가치가 높은 아이템이다 보니 손상 방지가 붙어있다. 굳이 등급을 매기자면 전설급 영약이니 손상 방지는 당연히 붙어있어야 했다. 전설급 영약이 상해서 못 먹게 되면 그것도 웃기는 일 아닌가?

구세하가 이것의 파기 방법을 밝혀낼 때까지 그리드가 보관한다는 게 거래의 주된 내용이었다.

단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 구세하는 템빨단의 스킨 제작 의뢰를 무조건 수용한다.

둘째, 그리드가 부득이하게 서리여왕의 심장을 소실했을 경우 구세하는 그리드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단, 그리드는 물건을 소실했을 당시의 상황을 영상으로 구세하에게 공개하고 구세하가 상황을 납득했을 경우에 한한다.

셋째, 그리드가 서리여왕의 심장의 올바른 사용법을 밝혀낼 경우 구세하는 그리드에게 서리여왕의 심장을 판매한다. 이때 그리드는 합당한 금액을 지불해야한다.

얼핏 불공정 계약처럼 보일 정도로 그리드에게 유리한 조항들이었지만 정작 구세하는 불만이 없었다.

서리여왕의 심장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물건.

구세하는 그리드에게 폭탄을 떠넘긴 셈이다. 본래라면 구세하를 노렸을 위험들이 앞으론 그리드를 향하게 생겼다.

한데 그리드는 별도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구세하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의 보답 즉, 스킨 제작 의뢰를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하물며 공짜로 만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스킨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모두 템빨단측에서 공수하기로 했다.

그리드가 서리여왕의 심장을 잃을 가능성?

구세하는 당연히 감수해야한다. 극검의 말대로 그리드는 무적이 아니니까.

끝으로 ‘그리드가 서리여왕의 심장의 올바른 사용법을 밝혀낼 경우 구세하는 그리드에게 서리여왕의 심장을 판매한다.’는 조건은 구세하 입장에서도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심장을 파기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린 마당에 돈까지 주며 고민을 해결해준다고 하면 당연히 기쁘지 않겠나.

“구세하님은... TV에서 볼 때와 똑같으시군요.”

구세하가 20년 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수려한 외모와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선행을 베풀어왔기 때문이다.

가끔 구세하와 관련한 기사나 인터뷰를 볼 때면 신념이 참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만약 그리드가 구세하의 입장이었다면 헤밀턴 공왕을 원망하며 폭탄을 되돌려줬을 것이다.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덤이었고.

아니, 어쩌면 이 물건을 원한다는 놈들과의 거래에 응해 잇속을 챙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세하는 서리여왕의 심장이 자신의 물건이 된 이상 끝까지 책임지려고 노력해왔다. 편해지기 위해, 혹은 재물을 탐내 악인과의 거래에 응하지 않고 신념을 지켰다.

여태껏 Satisfy가 큰 탈 없이 번영해온 이유는 이런 훌륭한 사람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존경하게 됐습니다.”

그리드가 웃으며 고백하자 구세하의 귀가 살짝 붉어졌다.

“만약 현실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바로 포기해버렸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Satisfy라서 오기를 좀 부려봤을 뿐인데 존경이라뇨. 부끄럽습니다.”

“현실에서든, Satisfy에서든.”

“...?”

“앞으로 또 어떤 위협을 받게 되신다면 저희에게 의지해주십시오.”

‘허.’

템빨단.

세계 최고의 조직을 이끄는 수장답게 그리드의 자부심은 엄청났다.

하긴 자부심이 없으면 그게 오히려 곤란할 지경이다.

화려한 면면을 자랑하는 템빨단원들은 대부분 현실 여러 분야에서도 활약하지 않나.

그리드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구세하는 마음 속 모든 불안과 근심이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말씀만으로도 든든하고 기쁩니다. 저 또한 나름대로 그리드님과 템빨단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진실 된 인사와 함께, 구세하는 떠났다.

극검과 라우엘이 후다닥 배웅 나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당분간 시달릴 눈치다.

피식 웃는 그리드의 기분은 좋았다.

멋진 사람을 알게 됐으니 기쁠 수밖에.

‘심장을 노리는 놈들은 페이커와 라우엘이 알아볼 테고... 우선 난 개조가 가능한지부터 확인해 볼까.’

잠시 망치를 내려놓은 그리드가 서리여왕의 심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