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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31화 (1,321/1,794)

템빨 67권 - 09화

구세하가 스킨 제작자 본인이었다고? 당황한 극검의 말문이 닫히자 그를 대신해 레가스가 인사했다.

“구세하님과 시프트님이 동일 인물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기회만 온다면 두 분 다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한 번에 만나게 되다니! 마치 운명 같군요! 하하하!”

“...제가 구세하라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템빨단의 정보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쯤이야 익히 알고 있다. 어디서든 템빨그림자단의 눈과 귀를 조심하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나.

하지만 구세하의 현재 모습은 신상(新商)이다. 오늘 처음으로 개시한 스킨이란 말이다. 템빨단이 구세하를 실시간으로 감시하지 않은 이상에야 구세하의 정체를 알아봐선 안 되는 것이었다.

경계심을 품는 그의 입장을 헤아린 레가스가 극검을 가리켰다.

“여기 이분이 구세하님의 열렬한 팬이라서요. 아까 노점에서 마주쳤을 때 정체를 바로 알아보더군요. 눈썹이 휘는 각도를 보고 눈치 챘다던가...? 하하.”

“험험.”

극검이 헛기침했다. 아저씨가 같은 아저씨에게 ‘당신의 작은 습관만 보고 당신의 정체를 알아 볼 정도의 열렬한 빠돌이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된 꼴이라 적잖게 민망했다.

하지만 민망함은 잠시.

20년 동안 동경해온 뮤즈와의 만남을, 그는 솔직하게 기뻐했다.

“...발라드의 황제였던 구세하도, 클래식의 거장이 된 구세하도 제게는 찬란한 별이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영광입니다, 형님. 사인 좀... 기왕이면 실제로 만나서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아 물론 형님의 시간이 괜찮으실 때요.”

“하하하.”

긴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간곡히 부탁하는 극검의 모습에서 진심을 읽은 구세하가 그제야 경계심을 거두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극검에게 악수를 건네며 말했다.

“저는 극검님이 한국 길드 중 유일하게 활약했던 은기사 길드의 마스터였던 시절부터 팬이었습니다. 멀리서나마 응원했었는데 극검님이 제 팬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응원할 걸 그랬군요.”

“형님...! 제가 비록 액면가는 높아도 형님보다 여덟 살이나 연하입니다!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저희는 동방예의지국의 국민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친해지면 그때 가서 말 놓겠습니다.”

“그날이 어서 오길 바라겠습니다, 형님!”

덥썩! 구세하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극검의 눈이 급기야 소녀의 것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마치 그리드를 바라 볼 때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

20년 동안 톱스타의 자리를 지킨 구세하의 처세술은 뛰어났다. 흥분해서 날뛰는 극검을 잘 달래 회포는 적당히 풀고 자연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사신 나이트.

용병계의 거물인 그에게 표적이 된 경위와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서리여왕의 심장>이라는 게 있었다.

“심장이라고요?”

서리여왕.

헤라리스의 지배자인 그녀는 사람들에게 친숙하다.

그리드가 무무드의 오브를 만들 때 사용했던 <서리여왕의 숨결>처럼, 헤라리스 지역에서 채취할 수 있는 아이템엔 서리여왕의 이름이 붙은 경우가 많았고 그런 아이템들은 여러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어왔다.

사람들이 서리여왕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일례로 라우엘은 병력을 통솔할 때 종종 서리여왕을 언급하곤 했다. 흥분한 병사들에게 서리여왕의 차가운 숨결을 떠올리며 뜨겁게 달궈진 피를 식히라고 지껄이는 식이었고 병사들은 순순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서리여왕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드물다.

사실 드물기 보단 ‘없다.’는 추측이 맞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 법이니 속단을 못할 뿐이었다.

헤라리스.

새하얀 설원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은 인간의 방향감각을 상실시킨다. 단지 하얗고 광활한 땅.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여행자들은 먹통이 된 나침반에 절망하게 되며 한참을 헤매다가 동사한다. 마나의 흐름조차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탓에 마법이 발동하지 않아 탈출도 불가능했다.

서대륙 지도를 완성한 입지전적 모험가 스컹크가 헤라리스에서 17번의 죽음을 겪었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그런 스컹크조차 서리여왕을 만나진 못했다.

스컹크는 헤라리스라는 ‘지역’을 탐사하는데 성공한 반면 지역 내에 존재하는 던전들까지 클리어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컹크가 탐사하기엔 헤라리스 지역의 던전들은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서리여왕은 그 미지의 던전들 중 어딘가에 머물고 있거나, 혹은 설원을 배회하기 때문에 만나기 힘들다는 게 정설이었다.

한데 심장이라고?

누군가가 서리여왕을 발견한 것으로 모자라 죽였다는 뜻이 아닌가.

“제가 여왕의 심장을 얻은 건 1년 전, 헤밀턴 공국에서였습니다. 어린 시절 얼굴에 입은 화상 탓에 성 밖에 나오질 못한다는 공녀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치료해주었더니 공왕이 감사의 뜻으로 선물해줬던 것이죠. 치료라기 보단 상처를 ‘없애주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긴 하지만.”

“허...”

“우와,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까 스킨 제작은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스킬이네요.”

스킨 제작자의 클래스 등급은 레어에 불과하다. 고유 능력은 아이템과 캐릭터의 외형을 바꾸는 것. 충분한 수요가 있는 능력이긴 했지만 돈벌이가 되는 것 외엔 큰 메리트가 없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다.

심지어 비전투 클래스이기 때문에 성장에 명확한 한계가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추측했고 극검과 레가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구세하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

단순히 ‘멋’을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해서 푼돈을 모으기 보단 대륙 각지를 떠돌며 자신의 힘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왔다. 그렇게 인맥을 쌓아 히든 퀘스트를 얻거나, 유리한 정보를 선점하거나, 진귀한 보물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켰다.

사람들이 스킨 제작자를 쉽게 만날 수 없던 이유다.

구세하는 어지간한 고액을 지불하겠다는 고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굳이 플레이어의 의뢰를 받지 않았다. 손님을 골라 받을 자격이 그에겐 있었다.

“헤밀턴... 헤밀턴이라. 왜 귀에 익나 했더니 거기 공왕이 로드 성인식에 참가했었지?”

“네, 사하란의 셋째 아들을 시조로 둔 나라죠. 옛날에는 아프리카의 표범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종종 거론됐고요.”

“쿠자라크...? 혹시 그자가 서리여왕을 레이드한 건가?”

아프리카 출신의 강자 쿠자라크.

국가대항전 등의 공식 활동에 참가한 이력이 없음에도 유명한 하이랭커다.

크라우젤이라는 인물을 떠올릴 때 ‘그리드에게 대적할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는 관념이 따라붙듯, 크라우젤이 지존이던 시절에 쿠자라크라는 이름은 ‘크라우젤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유난히 크게 받았던 인물이다.

희소한 스타일의 싸움꾼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센스가 강점인 크라우젤, 평생을 연마해온 기술이 강점인 하오와 달리 그는 순수 피지컬이 압도적이었다.

피지컬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가상현실게임의 특징을 고려해봤을 때. 그래서 한국이 Satisfy에서 유난히 약한 면모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점을 돌이켜 봤을 때 쿠자라크의 뛰어난 피지컬은 훌륭한 이점이었다.

마치 한 마리의 맹수를 보는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쿠자라크의 목격담은 랭커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곤 한다.

레가스가 꼭 싸워보고 싶은 상대 중 하나가 쿠자라크일 정도다.

쿠자라크의 실력이면 서리여왕을 레이드했을 수도 있다는 게 레가스와 극검의 판단이었다.

“글쎄요. 심장의 출처까진 듣지 못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쿠자라크님은 두 분 같은 별세계의 인물이니 심장을 받았을 때 쿠자라크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죠.”

구세하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쿠자라크님이 연관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리여왕의 심장을 노리는 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헤밀턴 공국이 심장을 보관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던 눈치였으니까요. 나이트를 고용할 정도의 여력이 있는 그들이 공국으로부터 심장을 빼앗지 못하고 지켜만 봤던 이유는 쿠자라크님을 경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공왕의 실력도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긴 합니다만...”

[플레이어 ‘시프트’가 <서리여왕의 심장>의 정보를 공유합니다.]

<서리여왕의 심장>

서리여왕의 마지막 유산, 혹은 저주입니다.

복용 시 냉기와 완벽하게 동화합니다. 냉기 속성 공격력이 대폭 증가하며 냉기 속성 피해를 입을 때마다 생명력과 마나 등의 자원을 피해량에 비례해서 회복합니다. 주변 온도가 낮을수록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일부 스탯이 변경됩니다.

★착용 가능 아이템이 냉기 속성 아이템으로 한정됩니다.

★무 속성, 냉기 속성 외 속성의 스킬이나 마법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얼음 안개> 스킬을 항시 전개합니다.

★<얼음 왕국> 스킬이 생성됩니다.

<얼음 안개>

반경 5미터 이내의 모든 대상에게 초당 5천의 냉기 속성 데미지를 입힙니다. 안개에 6초 이상 노출 된 대상은 상태이상 ‘빙결’에 걸리며 빙결 상태에서는 초당 2만의 고정 데미지를 입습니다. 최소 4초에서 최대 12초 지속. 강제 해제 불가.

<얼음 왕국>

한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이상 머물 시 발동합니다.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어 고독의 낙원을 만듭니다.

단, 주인 없는 영토에 한하며 면적에 제한에 있습니다.

“....”

극검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헤밀턴 공왕의 선물이라기에 엄청 좋은 아이템일 줄 알았더니 상상과 전혀 달랐다.

영약에 속하는 아이템.

반드시 ‘복용’해야만 효과를 발휘하며, 복용 시 피아 식별 불가능의 광역 데미지를 항시 발생시키게 된다고?

오직 죽음만을 불러오는 저주 받은 물건이다.

이건 차라리 보스 몬스터 전직서나 다름이 없었다.

“이걸 선물로 준 인간은... 무슨 심보랍니까?”

“나쁘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물건의 가치라는 건 꼭 사용할 수 있어야만 올라가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서리여왕의 심장은 표면이 얼어붙은 다이아몬드를 연상시켰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단순 장식품으로도 필시 고가에 거래 될 물건이다.

게다가 인간의 유형은 무척 다양해서 혼자여도 상관없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힘에 대한 열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물건을 탐낼 것이었다.

“제가 심장을 얻고 반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접근해온 인물이 바로 나이트의 고용주입니다. 심장이 제 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찾아와 심장을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더군요. 물론 저는 거절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 물건은 너무 위험하니까요.”

“그때부터 추노가 시작된 거군요.”

“네, 전 모습을 바꿀 수 있어 비교적 쉽게 추적을 피해올 수 있었습니다만... 언제까지고 도망만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이트에겐 변신도 통하지 않아 난처하던 참이었습니다.”

“음... 그런데 형님, 적들이 노리는 물건을 왜 창고에 안 맡기고 인벤토리에 들고 다니시는 겁니까? 자칫 죽었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말도 마세요. 창고에 맡겼더니 냉기가 통제가 안 되는 바람에 창고에 있던 물건들이 모조리 얼어붙었습니다. 그러자 은행에선 창고 보관 불가 아이템 판정을 내렸고요.”

“뭐 그딴... 인벤토리에 넣으면 괜찮고요?”

“네, 항시 곁에 두고 지켜보면서 유혹당하길 유도하는 느낌이죠.”

“그야말로 저주 받은 물건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그리드님께 맡기고 싶어요. 그리드님이라면 이걸 함부로 사용하실 리도 없고, 누군가에게 쉽게 빼앗길 일도 없을 테니까요.”

최근 영주가 된 플레이어들의 폭정은 그리드와 아레스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리드는 황제와 비견되는 권력을 거머쥐고도 권력을 함부로 휘두른 적이 없다. 그리드에게 악의적이었던 중국 언론조차 그리드를 군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지경이다. 구세하는 그리드를 신뢰했다.

“그렇기야 하지만... 갓리드도 무적은 아니라 죽을 때가 제법 있어요. 갓리드라고 해서 심장을 영원토록 지킬 순 없다는 겁니다.”

“제가 빠른 시일 내에 심장을 처리할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그때까지 만이라도 그리드님께서 맡아주시도록 주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깊이 허리를 숙이는 구세하였다.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다짜고짜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된 점에 대해서 그는 충분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민해본 극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가 좋은 일이기도 하니... 갓리드에게 사정을 설명해보겠습니다.”

혹 그릇된 자에게 이 힘이 넘어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구세하의 마음가짐은 실로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딱 봐도 귀찮아질 것 같은 물건을 그리드가 순순히 맡아줄까?

극검은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당연히 맡아줘야지. 자칫하다가 아그너스 같은 놈의 손에 들어갔다간 골치 아파질 물건이잖아.”

그리드는 흔쾌히 수락했다.

단 조건을 붙였다.

템빨단의 스킨 제작 의뢰를 구세하가 무조건 받아줘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라우엘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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