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7권 - 07화
“드디어 요령을 깨우쳤나보구나.”
파울드가 활짝 웃는다. 어린 소년의 얼굴에 어울리는 해맑은 미소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름이 돋는다. 커다란 눈동자에 감정이 없다. 빛을 뿜지 않고 미동조차 않아 무심(無心)이 드러나니 웃는 표정이나 어린 낯짝과 매치가 되질 않았다.
시체 따위가 진실 된 감정을 품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저 미소도 결국 본인의 영혼을 실감하기 위한 연기에 불과할 것이다.
파울드의 텅 빈 미소를 바라보며, 고작 언데드 따위를 루나의 재림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을 조소한 아그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적응했군.”
촤르륵━
아그너스의 사자가 움직일 때마다 체내에 자리 잡은 수십 개의 태엽장치가 미세한 소리를 흘리며 회전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추상적으로 다가올 뿐인 마력(魔力) 즉, 마나나 오러 따위의 ‘자원’을 외부로부터 흡수해 동력으로 여과(濾過)하는 과정이었고,
쿠와아아앙!!
실체화한 동력은 본래라면 존재할 수 없는 사자의 심장━ 파울드가 만든 마력기관을 폭발적으로 가동시켰다.
꽈득! 꽈자작!!
실에 당겨지는 인형처럼 기이하게 움직이는 사자의 전신에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음이 연쇄된다. 역방향으로 뒤틀린 관절들이 이리저리 촉수처럼 흐느적거렸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충격에 쇼크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그너스의 사자(死者)는 말 그대로 시체였다.
다만 움직일 뿐이며, 당연히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터엉!
부서진 아킬레스건을 개의치 않고, 사자는 지면을 박찼다.
이때의 가속력은 바알의 계약자 클래스를 전설 등급까지 성장시키며 민첩성이 2,500에 도달한, 심지어 수십 개 칭호의 보정을 받아 초월적인 안력을 보유한 아그너스조차 일부 놓칠 수밖에 없을 만큼 빨랐다.
‘...기대 이상이다.’
육신이 넝마가 된 대가로 마력기관의 사용법을 터득한 사자의 모습을 통해서 아그너스는 확신했다.
마력기관의 출력을 견뎌낼 정도로 단단한 육신을 지닌 사자를 만들어내는 순간, 자신이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한없이 적어질 것임을.
***
“그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군.”
청룡도의 주인 미르.
최강의 양반이라고 불려온 그는, 공교롭게도 자신의 신분에 자부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양반?
쫓겨난 신의 복수를 이루기 위한 사병으로 태어나 육성됐을 뿐인 존재다.
설령 신격을 쌓아 신이 된다고 한들 타고난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한울 아래에 존재하며, 한울을 위해서 싸우다가 덧없이 사라지리라.
그렇기에.
“베이고, 찔리고, 쓰러진 끝에 죽어도 불멸의 전승으로 부활해 기어코 다시 내게 검을 겨누는 그대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그대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한다는 강박마저 느끼게 되는군.”
미르는 무신이 되기를 꿈꿨다.
한울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 뭐 그런 거창한 의도는 아니다.
만들어진 반신, 만들어진 신, 그런 타의에 의한 무언가가 아닌 ‘나’를 오롯이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예에 집착해왔다.
반신의 육신, 권능, 수명 등 재능의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철저히 이용해서 평생토록 연마했다. 다른 양반들과 다르게 노력이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비로소 최근에야 깨달았다.
자신이 노력이라 믿어왔던 것들은 타고난 재능에 의지한 허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눈앞의 사내를 통해서 알게 됐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호흡에 뜨거운 입김이 번진다.
청룡의 저주가 만든 만년설을 붉게 물들이며 누운 사내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일주일 전처럼, 보름 전처럼, 그리고 한 달 전처럼 사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매번 달랐다.
한 달 전보다, 보름 전보다, 그리고 일주일 전보다 오늘, 사내는 더욱 오래 버틴 끝에 쓰러졌다.
토옥.
손가락을 타고 떨어진 한 방울의 피가 설원에 점을 찍는다.
그것만큼은 미르의 피였다. 그의 왼쪽 어깨에 옅은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사내가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 때마다 미르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깊지는 않다.
하지만 미르는 경각심을 느꼈다.
붉은 설원 위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 사내.
당대의 검성 크라우젤.
그가 머잖아 자신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길 수도 있겠다는 불안을 느꼈다.
***
[레벨이 하락하였습니다.]
벌써 3번째 레벨 다운이다.
크라우젤이 레벨을 올릴 때마다 상승하는 스탯 포인트는 평범한 사람과 달리 무려 15개였기 때문에 손실이 꽤나 컸다. 약해진 근력이 실감날 정도였다.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검의 무게와 상반되게도, 크라우젤의 마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이번엔 4개나 올랐군.’
초감각 스탯을 확인한 크라우젤이 옅게 미소 지었다.
검성으로 전직하고 스킬에서 스탯으로 변한 초감각은 히든 스탯 중에서도 특별했다. 모든 클래스를 통틀어서 오직 검성만이 독점하는 최강의 전투 관련 스탯이다.
유일한 단점은 육성이 매우 힘들다는 것.
가야에 오기 전까지 크라우젤의 초감각 스탯은 40이 채 안 됐었다.
하지만 현재 그의 초감각 스탯은 67이다.
가야에 머무는 기간 내내 양반들과, 특히 미르와 싸운 덕분이었다.
미르의 공격에 반응하는 횟수가 중첩될수록 크라우젤의 초감각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 대가로 ‘미르에게만’ 총 8번의 죽음을 겪고 상당량의 경험치와 몇 개의 아이템을 손실했지만, 크라우젤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레벨이야 이미 한 번 1로 떨어진 경험도 있다. 레벨 다운엔 충분한 내성이 생겼다.
아이템도 다시 구하면 그만이었다. 어머니께서 병을 극복하신 뒤로 그의 잔고는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백호검은 창고에 넣어뒀다.
만에 하나라도 백호검을 떨어뜨렸다가는 제아무리 크라우젤이라도 파산을 염려해야했기에.
“어서 오세요.”
“378번 창고를 개방 부탁드립니다.”
어느 작은 마을.
가야가 왜 모래왕국이라고 불리는지 증명하듯 사막 위에 세워진 마을이다. 만년설에 뒤덮인 수도와 전혀 다른 열기를 간직한 그곳을 부활 포인트로 지정해놓은 크라우젤은 부활 즉시 창고에 들러 백호검부터 찾았다. 그리고 육포를 씹으며 사냥터로 이동했다.
미르와 또 다시 싸우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바.
그때까지 최대한 경험치를 쌓아야했다.
***
22번 지옥의 새로운 주인 오보라는 베리드의 심복 출신이었다. 거짓의 권능으로 시스템마저 속였던 베리드와 비교하면 임팩트가 굉장히 약했지만 종합적인 전투력이 상당히 뛰어났다.
뱀 같은 하체를 기하학적으로 꺾어 전혀 예상치 못한 각도로 공격을 뻗어왔고, 놈의 꼬리에 실린 힘은 갓 핸드를 일격에 경직시킬 정도로 무거웠다.
게다가 비늘이 단단하고 회복력도 뛰어나 여러모로 난적이었다. 사자들이 심한 페널티를 입은 상태였다고 해도 레이드 시간만 장장 2시간 이상 걸렸다는 건 그만큼 놈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좋은 걸 떨어뜨렸지.’
오로라가 떨어뜨린 부속물은 ‘척추’였다.
7개의 경추와 20개의 흉추, 그리고 4개의 요추로 구성 된.
쭉 뻗었을 때 길이는 3미터에 이르지만 마디마다 결합시키는 게 가능해 최대 1미터까지 수축시킬 수가 있었다.
오보라를 상대하기 힘들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 오보라의 뱀 같은 꼬리는 온갖 형태로 꺾이는 것으로 모자라서 길이까지 바뀌었기 때문에 패턴을 읽고 대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만약 초월경이 없었다면 그리드도 다른 사자들처럼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걸 새로운 신검의 재료로 삼으면 참 좋겠는데.’
길이가 자유자재로 변환하는, 채찍처럼 휘두르는 검.
검의 궤적을 읽고 대응하는 고수일수록 오히려 개미지옥에 빠뜨리는 지독한 환검일 것이다.
하지만 신검의 재료로 삼기엔 부족함이 많다.
오보라의 척추에는 뼈마디마다 연골이 있기 때문에 광물처럼 제련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대악마의 연골답게 유연하되 강철처럼 단단하긴 했지만 용광로에 집어넣는 순간 훼손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무시하고 제련하면 척추 자체는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연골이 상하면 척추 고유의 기능을 상실할 거다.’
채찍처럼 휘둘러지지도 않고, 수축과 팽창도 되지 않는.
그저 기다란 통뼈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검으로 만들었다간 내구력이나 공격력이 신검급엔 훨씬 못 미칠 테고... 음, 뼈마디를 전부 분리한 다음에 연골 대신 고리로 다시 연결하면...? 아니, 그러느니 차라리 탐욕으로 뼈마디도 전부 새로 만드는 게 낫지.’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오보라의 척추를 제련하거나 다른 금속으로 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형태야 복제할 수 있겠지만 생물학적 기능을 완전히 똑같이 보존하거나 재현하는 건 대장장이의 능력 밖이었다.
“...아!”
그리드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시스템의 힘을 빌리는 방법이었다.
일단 순수한 오보라의 척추로 검을 만들어서 ‘척추검 도안’을 얻고, 탐욕을 재료로 써서 척추검을 만든다면...!
‘...아, 젠장. 불가능해.’
당연히 불가능하다.
오브라의 척추검 도안에 명시 되는 필수 재료엔 당연히 오보라의 척추가 있을 테니까.
한참을 고민해본 그리드가 레이단 연금술 시설 소장을 소환했다.
호출을 받자마자 워프 게이트를 타고 달려온 그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소장은 네임드 NPC로 장인급 연금술사였다.
하지만 워낙 많은 돈을 까먹어온지라 그리드 앞에서 도무지 당당하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탐욕으로 이 척추와 똑같이 기능하는 부품을 만들고 싶은데 내 기술만으론 불가능하오. 연금술의 힘을 빌리면 가능하겠소?”
“그건... 외람되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니, 왜 그런 것도 못하오? 연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적을 행사하는 거 아닌가? 고작 척추 하나 따라 만드는 건 기적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데.”
“생명의 강화나 창조를 꿈꿨던 고대의 연금술사들이 워낙 비인도적인 행위를 많이 저지른 까닭에 연금술이라는 학문 자체가 배척당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현자의 돌 사건이죠. 현자의 돌을 갈망했던 연금술사들은 악신과 악마를 숭배하는 야탄교인들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고 합니다.”
TMI가 시작됐다...
“대륙의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연금술을 사교로 규정하고 연금술사들을 대륙에서 추방했지요. 이후 천 년. 연금술사들은 잃었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노력의 일환에는 현자의 돌과 관련한 자료를 전부 폐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생명, 혹은 생물의 일부를 창조하거나 복제하는 방법이 바로 그 폐기된 자료 중 하나에 속했고요.”
“어찌됐든 결론은 이깟 척추 하나조차 재현하지 못한다 이거 아니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나이다.”
“후, 됐소. 이만 물러가시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언제라도 필요하시면 또 불러주시옵소서.”
‘불러봤자 도움도 안 되면서 무슨...’
연금술 소장에겐 제법 냉담한 그리드였다.
그리드의 눈에는 그가 돈 먹는 하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장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연금술이라는 학문 자체가 마음에 안 들 뿐이지.
“...!!”
소장이 돌아가고 또 한참 후.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일단 다른 작업을 진행하던 그리드의 뒷골이 찌릿해졌다.
갑자기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크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잖아?’
오보라의 척추로 검을 만드는 순간 그것은 아이템 판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리드에겐 아이템 변신 스킬이 있다.
탐욕을 척추검으로 변신시키면 척추검의 부족한 공격력과 내구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보완할 수 있다.
혈검에서 착안한 ‘시간제 신검’이었다.
‘신검으로 만드는 게 불가능하면 일시적으로나마 신검화 시키면 그만인 거지. 그래, 일단 만들자.’
잠시 인벤토리에 넣어뒀던 오보라의 척추를 다시 꺼내 모루에 올린 그리드가 잠재력 개방으로 대장장이 기술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척추검 제작에 돌입했다.
아무래도 척추는 어감이 좀 잔인한 면이 있으니, 기왕이면 등뼈검 같은 이름을 붙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