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22화 (1,312/1,794)

템빨 66권 - 22화

침입자들을 성 밖으로 내보낸 후.

““방금 그놈이 검성인가? 아니, 검성은 크라우젤이다. 인계에서 직접 봤잖아요. 한데 저놈이 어찌...””

단탈리안의 얼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최대의 용적을 자랑하는 8개의 뇌와 삼라만상의 권능으로 흡수해온 천 년의 지식이 쌓아올린 성.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는 수백 종류의 고위 결계를 각인시킨 <불변의 성>이 두부처럼 썰려나갔다. 물론 성은 아직도 건재했다. 그리드의 참격이 성을 베었다지만 그 범위는 성 전체 규모의 1,000분의 1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이기도 했다.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

““태초의 드래곤과 주신들, 그리고 검성이 아닌 이상에야 이 성을 파괴하지 못하는 거 아니었나? 맞아. 실제로 증명됐잖아. 해츨링도 수정에 흠집조차 못 냈어. 하지만 방금 그 해츨링은 너무 어렸습니다. 제 계산에 착오가 있던 걸 수도... 흥, 헛소리. 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내게 착오란 없다.””

단탈리안은 그리드를 알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이미 몇 차례나 얽혔기 때문이지만 설령 얽히지 않았어도 알게 됐을 것이다. 그리드의 명성이 너무 높았다. 게다가 단탈리안의 손에 들린 책은 미래를 보여준다. 물론 만능은 아니다. 미래의 범위를 특정하지 못한다.

““저놈들이 성 밖에 진을 쳤다. 갈 길 가라는데 왜 안 가고 저러는 거야? 나를 노리는 거겠죠. 이건 위험해. 위험해요. 당장 인계로 가서 666명을 죽이고 미래의 서를 펼치죠. 지금 자리를 비웠다간 성을 잃을 게다.””

단탈리안이 초조해졌다.

역대 모든 전설의 능력을 구현하는 절정의 강자인 그도 성 밖에 진을 친 저놈들을 상대로는 승산을 엿보기 힘들었다.

그나마 천 년 동안 공을 들여서 쌓아올린 지식의 정수, 이 불멸의 성을 방패삼으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리드가 검성 같은 활약을 펼친 시점부터 얘기가 달라졌다.

““성을 포기하죠. 안 돼. 천 년 동안의 공부와 666만 명의 인간을 제물로 바쳐서 쌓아올린 성이다. 아모락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때? 뭐? 자살하자는 건가요?””

단탈리안은 공식적으로 아모락트 파벌에 속한다.

하지만 아모락트를 신뢰하진 않았다.

아모락트는 야탄에게 맹목적인 광신도다. 야탄을 욕보이는 순간 놈은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분쟁의 권능을 써서 8개의 얼굴이 서로 다투게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을 선사한 뒤 야탄에게 바치겠지.

““차라리 바알에게 의지해볼까? 그놈과 엮이느니 죽는 게 낫다.””

한숨 쉰 단탈리안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그리드, 광룡의 해츨링, 역대 최강의 마법사이자 베리아체의 아들, 혜안의 주인, 타락한 대천사, 칠악성의 화신, 데빌 슬레이어, 농부....

딱 한 놈만 제외하고 입지와 실력이 대단한 거물들이다. 저놈들의 현재는 필시 신화로 새겨지리라.

한참을 고민하던 단탈리안의 8개 얼굴이 낮게 중얼거렸다.

““추구하는 이상이 높기에 거물끼리 뭉쳤을 터. 맞아요. 목적이 한두 개가 아닐걸요. 하나 같이 이루기 힘든 목적일 테지. 악마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거예요. 신과 악마가 손을 잡는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이미 전례도 있으니.””

대악마들과 헥세타이아의 합작이었던 <번헨 열도 침공전>을 떠올린 단탈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스킬이 도중에 끊길 줄이야.’

흑수정 성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그리드가 좌절했다.

본래 그는 성을 통째로 박살낼 계획이었다.

그래서 5융합 검무를 전개했다.

초연살파극.

낙월검으로 그리는 파멸의 춤사위가 흑수정 성을 초토화시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이었다.

초연살파극의 첫 번째 검격을 휘두른 순간 즉, 낙월검을 딱 한 번 휘두른 순간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스킬 동작이 끊기며 발동이 멈춘 까닭이었다.

10분에 ‘한 번’만 휘두를 수 있다는 낙월검의 제약은 스킬에도 적용됐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한 번이란 정말 단 한 번의 동작을 의미하는 거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초토화검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낙월검에겐 초토화라는 멋진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애초에 월야철은 제약이 너무 많은 광물이었어.’

개성이 너무 강하다. 강화시킨답시고 단련하는데만 보름이 넘게 걸렸을 정도다. 실제로 낙월검의 칼날에는 탐욕이 전혀 함유되지 않았다. 칼날 아래로 떨어지는 묵색의 손잡이만이 탐욕으로 구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구력이 무한인 건 월야철이 그만큼 대단한 광물이라는 거겠지만... 어떤 광물과도 조화를 이루는 탐욕과 비교했을 땐 아쉽다.

‘결국 탐욕의 잠재력이 최고라는 뜻... 초토화검을 만드는 건 브라함의 마법 단조가 끝난 뒤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나.’

그라비늄.

언제쯤 만들어질까...

간절히 바라는 만큼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다.

“....”

우울해하고 있는 그리드를 사자들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확히는 그리드의 손에 쥐어진 낙월검을 주시했다.

네펠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검은 위험하구나.”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험하지. 정말로 엄청나게 위험해.”

무려 주인의 통수를 친 검이다.

만약 적과 싸울 때 낙월검을 휘둘렀다간 역습을 허용했을 것이다. 융합 검무의 발동이 도중에 멈춰서 드러난 빈틈을 적에게 공략당하고 목이 뎅겅 잘려나갔을 수도 있다.

‘성능 테스트를 제대로 해보지 않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물론 몇 번이나 휘둘러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물질을 베면서 위력을 시험하는 수준이었다. 어디까지 벨 수 있는지를 실험했고, 정말로 무엇이든 벨 수 있음을 확인했다. 강화된 월야철로 벼른 이 칼은 탐욕처럼 내구력이 무한인 물질조차 벤다. 정확히는 격의 약화를 유발해 내구력을 떨어뜨린 뒤 베는 거지만... 원리야 어찌됐든 드래곤의 <절대방어>도 무력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네펠리나의 생각도 같은 듯했다.

“언젠가 내게 그 검을 빌려주면 좋겠구나.”

“악룡에게 복수할 때?”

“그래.”

“응, 당연히 빌려줘야지.”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네펠리나의 복수는 최소 수백 년 후의 이야기다. 그녀가 성룡이 되었을 때 그리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별 생각 없이 약속해도 하등 문제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네펠리나는 속내를 몰랐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리드는 신이다. 자신이 성체가 될 때까지 그리드도 당연히 살아있을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자칫 복수에 실패했다간 네게 후환이 미칠 텐데...? 내게 검을 빌려준 대가를 치르게 될 게다.”

“두렵지만 어쩌겠어? 나는 네가 알에 있을 때부터 지켜봐왔어. 게다가 넌 내 사자야. 너를 외면할 리가 없잖아.”

“...고맙구나.”

[당신의 사자 ‘네펠리나’와의 호감도가 20 올랐습니다.]

네펠리나가 순수하게 감동했다.

그리드는 조금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일단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어떻게 해야 단탈리안을 죽일 수 있을까?”

단탈리안은 그리드 일행에게 성문을 개방해줬다. 24번 지옥으로 통하는 출구였다. 하지만 그리드 일행은 출구를 외면하고 입구로 되돌아왔다. 흑수정 성을 다시 마주보고 섰다.

단탈리안과 끝장을 볼 각오였다.

이번 지옥 원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성장이니까. 성장을 위해서 사냥해야할 대상을 살려두고 도망친다? 웃기는 일이다.

특히 단탈리안은 모든 분야의 지식을 섭렵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악마다.

그리드는 야탄의 종을 해치우고 얻었던 단탈리안의 지식 파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격투의 지식 파편. 모든 격투 관련 스킬의 레벨을 1씩 추가해주고 공격 속도와 회피력도 올려줬지.’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봐도 정말 엄청난 보상이었다.

파편조차도 그런 위력을 발휘하는데 온전한 단탈리안의 지식은 얼마나 대단할까?

‘단탈리안을 잡으면 클래스 제한 없는 스킬 레벨업권을 드롭할 확률이 높다.’

추가로 전대 전설들의 스킬을 드롭할 가능성도 있다.

단탈리안은 전대 전설들과 관련한 지식도 쌓아왔으며 실제로 전대 전설들의 스킬 중 일부를 구현할 수 있었으니까.

‘꼭 잡아야 돼.’

그리드는 사명감마저 느꼈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거대한 탐욕을 품고 흑수정 성을 노려봤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저 성이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성 전체를 시야에 넣은 뒤 무패왕의 검술을 쓰면 저 거대한 성도 반토막 날 것이다.

‘계속 베다보면 흑수정이랑 결계가 통째로 잘려나가겠지.’

다만 문제가 있다.

낙월검은 10분에 한 번밖에 못 휘두른다. 단탈리안이 그 사실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놈이 다른 대악마들에게 소문이라도 냈다간 이후에 힘들어져.’

대악마는 난폭하지만 무식하진 않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높은 지능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수준은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

‘상식이 있는 놈들이다. 놈들한테 승기를 잡으려면 변수를 창출해야하는데 낙월검은 최고의 변수 창출 무기야.’

그리드 일행의 면면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봤자 더 깊은 지옥에 진입할수록 화력을 잃게 된다. 대악마의 서열은 오르는 반면 그리드 일행은 점점 더 강한 페널티를 받게 되니까. 물론 그리드와 유라, 사리엘은 예외지만 셋만으론 부족하다. 대악마를 딜로 찍어 누르는 양상도 이제 곧 끝이다. 그때 낙월검이라는 비장의 수단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옥에서 받는 페널티를 완화시키는 도구들은 의외로 많지. 성능이 다 고만고만해서 문제지만 내가 그것들을 이용해서 아이템을 만들면 위력을 증폭시키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어찌됐든 지금은 단탈리안을 성 밖으로 끌어내는 게 급선무인데...’

무슨 수로?

그리드가 고민하는 그때 지크프렉터가 입을 열었다.

“메르세데스, 그대의 혜안으로도 저 흑수정들을 분석할 순 없나?”

“너무 많은 왜곡이 걸려있어요. 저 상태로 유지만 된다면야 2시간 내로 분석할 수 있을 텐데 술식이 실시간으로 변동되거나 추가되고 있어서....”

“유라 경, 경의 대마력으로 흑수정에 깃든 마기를 잠시 물릴 순 없습니까? 마기가 빠져나가면 술식의 변화도 멈출 겁니다.”

대마력(?魔力).

마기에 저항하는 데빌 슬레이어의 자원이다. 신성력과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었다.

“저는 대마력을 개방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아직 실전에서 활용할 수준이 안 되네요.”

유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데빌 슬레이어임에도 데빌 슬레이어다운 활약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염증을 느끼는 눈치였다.

그녀의 부정적인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그리드가 대화를 주도했다.

“브라함, 대상을 지정해서 강제로 전이시킬 수 있는 마법은 없습니까?”

“매스 텔레포트의 마법진을 변형시키면 대상이 수락하지 않아도 강제로 전이시키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뿐더러 발동에 시간이 걸리지. 가장 큰 문제는 저 성 안에선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가능한 거였어?

브라함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은 그리드가 감탄했다. 하지만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이론으로만 가능하면 뭐해. 정작 필요할 땐 못 하면서.’

“왜 또 그런 눈으로 보지?”

묘한 불쾌감을 느낀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템빨의 신께 대화를 요청합니다.””

“...!”

“...!”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면서 단탈리안이 걸어 나왔다.

““악마를 멸시하는 신이 직접 지옥에 내려왔다는 건 먼 과거의 헥세타이아와 같은 대업을 준비하기 위함일 터. 당신 곁에 광룡의 해츨링이 있음을 보아 악룡과의 대전을 대비하려는 겁니까? 아니지. 칠악성이랑 사리엘도 함께 있잖아. 악룡보다는 아스가르드와의 전쟁에 대비하려는 게 아닐까? 베리아체의 자식을 좌시하지 마세요. 콧대 높은 브라함이 저자를 따르는 걸 보아 직계의 권능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걸 수도 있어요. 아마도 베리아체의 흔적을 따라서 지옥을 방문한 거겠죠. 무슨 헛소리냐? 데빌 슬레이어가 있는 시점부터 놈들의 목적은 명확해. 저놈들은 단순히 지옥을 멸망시키려는 거라고.””

그리드 일행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8개의 얼굴이 쉬지 않고 떠든다.

흑발의 미녀 얼굴이 그리드를 직시했다.

““템빨의 신이여. 이렇듯 저는 당신의 저의를 모릅니다. 하지만 무엇이 정답이든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있지요. 여기서 이러고 계실게 아니라 다시 성으로 드시어 제게 당신의 목적을 말씀해주시면 좋겠군요.””

그리드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내게 협조하겠다는 건가?”

““네, 당신의 목적이 무엇이든 저는 당신의 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그리드는 여태껏 그 어떤 신도 거느리지 못했던 강력한 사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많았고 바로 그 점이 단탈리안을 강렬하게 유혹했다. 그리드가 걷는 길에 동행할 수만 있다면 온갖 체험들을 통해서 깊은 지식을 쌓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단탈리안에게 지식이란 힘이다.

그리드와의 만남은 그에게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고 해석해도 무방했다.

“그럼 죽어.”

““...?””

서걱━!

흥분해 홍조를 띄운 단탈리안의 8개 얼굴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차가운 월광이 핏물에 음영을 드리우자 검은 물감이 뿌려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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