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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321화 (1,311/1,794)

템빨 66권 - 21화

개의 아가리.

무지한 놈들은 20번이라고 부르는 지옥이다.

불에 녹은 바위들이 장벽을 이룬 이곳은 신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지옥의 입구, ‘파수꾼 켈베로스가 지키는 지옥의 문’이 바로 여기다.

“로노베가 또 졌다고?”

서열 제20위의 대악마 엘리고스의 스산한 음성이 대전에 내려앉았다. 겨울이 다가온 느낌이다. 하지만 지옥에는 겨울이 없다.

“예... 육신을 잃고 성을 점령당했다고 합니다.”

“이번엔 다를 거라더니?”

절그럭, 새카만 갑주를 출렁이며 왕좌에 걸터앉는 엘리고스의 기세가 불꽃처럼 사납고 칼날처럼 날카롭다. 지독한 한기가 마족들을 떨게 만들었다.

악과 마를 상징하는 흑(黑)을 이명으로 얻은 존재.

흑기사 엘리고스는 생(生)을 부정한다. 지옥의 최강자 중 하나인 그가 걸어온 길엔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개의 아가리의 주인으로 군림해올 수 있던 이유다.

개의 아가리야말로 진정한 지옥이라고 칭송하고 숭배하는 대악마는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흑기사로부터 개의 아가리를 빼앗지 못하고 죽었다.

“나를 두 번이나 실망시키는군.”

27위 대악마 로노베는 몇 년 전 인계에서 큰 망신을 당했다. 붉은 안개를 뿌려 인계에 역병을 일으킬 거라고 지껄여놓곤 넝마가 되어서 돌아왔다.

그 웃긴 꼴을 조롱하는 악마들에게 놈은 말했었다.

자신이 패주한 이유는 어느 작은 신의 개입 때문이었다고.

작은 신.

특정 지역의 토착신을 뜻한다.

아스가르드의 주신들과 비교하면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으나, 인계에선 악마의 힘이 대부분 봉인된다는 점을 참작한 엘리고스는 로노베의 패주를 눈감아주었다. 놈이 여전히 자신의 오른팔을 자처하여도 묵과해줬다.

실수였다.

죽였어야했다.

인계도 아닌 지옥에서, 인간에게 패배하고 성을 빼앗겼다지 않나.

“로노베에게 윤회의 기회를 줘선 안 됩니다.”

“놈이 주군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엘리고스의 부하들이 소리쳤다. 크르르, 거친 숨을 토하는 켈베로스 또한 외침에 동조하는 듯했다.

엘리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노베의 영혼을 찾아 가둬라. 그때까지 강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봉쇄한다. 놈의 영혼은 영겁토록 고통 받으리라.”

“예!!”

개의 아가리가 진정한 지옥으로 불리는 이유는 죽은 자의 영혼이 모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괜히 신화의 배경이 된 장소가 아니었다. 엘리고스의 권력이 바알에 버금간다는 소문엔 일체의 과장도 없었다.

로노베의 영혼을 수색하기 위해 떠나는 수백 명의 악마와 마족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리고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곧 마르바스가 오겠군...”

야탄의 충복을 자처하는 마르바스.

놈은 야탄과 지옥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온 지옥을 떠돌며 마족과 마물을 번식시킨다.

무지몽매한 놈들은 그런 마르바스를 보고 지옥의 수호자라는 둥 떠들어댔지만 엘리고스는 마르바스가 영 탐탁치 않았다.

놈의 권능이 실제로 지옥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었다.

엘리고스는 똑똑히 기억한다.

전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가 나타나는 구역마다 찾아가 번식의 권능을 일으키던 마르바스의 모습을.

놈은 알렉스를 없애겠답시고 그딴 짓을 벌였지만 결과는?

마르바스가 번식의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알렉스는 급격히 성장했다. 감히 개의 아가리를 넘보진 못했으나 종국에는 바알에게 도전할 정도로 강해졌다.

참으로 요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르바스는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

대악마를 죽이면 월드 메시지가 뜬다.

심지어 지옥에서 죽이면 지옥에서 죽였다고 정확히 명시한다.

세계가 난리였다.

“영우 씨, 지난 3일 동안 3개의 지옥이 정화됐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고 계시나요?”

“템빨단이 드디어 지옥 원정을 시작한 겁니까?”

아침 조깅을 위해 집 밖으로 나온 신영우를 수백 명의 기자들이 반겼다. 인종도 참 다양하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라지만 한국의 소도시에 이만한 외국인이 단체로 모인 광경은 새로웠다.

‘기자들 부지런한 거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수백 명의 기자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통역기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능숙하고 누군가는 어설프다는 차이점이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영우에게 조금이라도 더 호감을 얻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었다.

‘나 이제 영어 할 줄 아는데.’

한국으로 이민 온 지슈카.

그녀가 영우와 더 깊은 소통을 나누기 위해 한국어를 공부했듯 영우도 포르투칼어와 영어를 공부했다. 워낙 바빠 따로 공부할 시간은 내지 못했지만 운동하거나 밥 먹는 시간을 틈틈이 이용했다. 간단한 회화는 금방 가능해졌다.

아무래도 Satisfy에서 다양한 지식을 쌓고 공부하다보니 공부라는 노동 자체에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전반적인 이해력이 상승하기도 했다. 예전엔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노력해도 쉽게 되지 않았던 공부들이 이젠 비교적 쉽게 성취를 이뤘다.

‘사과는 애프얼...’

영우의 시선이 옆 건물로 향했다. 지슈카의 펜트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영어를 구사했더니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본래 지슈카의 생활 패턴은 영우에게 맞춰져 있었다. 영우가 일어나는 시간에 기상했고, 식사를 자주 함께 했으며, 캡슐에 누워 있는 시간을 공유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비슷했다. 침대에 누웠을 때 잘 자라는 문자를 받곤 했었으니.

욱씬.

영우의 가슴이 아파왔다.

영우는 지슈카를 좋아한다. 하지만 유라도 좋았다.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다 보니 정도 쌓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고백한 유라를 거부할 용기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야 두 사람 모두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 두 사람이 허락할리 만무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 허락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 매장 당할 것이다... 나보단 두 사람이 더 큰 피해를 입겠지.

‘빌어먹을.’

“영우 씨?”

“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옥 원정의 주인공은 템빨단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번 일정 동안 20번대 지옥을 전부 점령하는 게 목표고요.”

“20번대 지옥을 전부...! 만약 성공한다면 지옥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겠군요?”

“당장 그렇진 않을 겁니다. 점령 상태를 유지할 여력은 없어서 새로운 대악마에게 다시 땅을 빼앗기게 될 거라.”

“여력이 없다는 말씀이 선뜻 이해가 안 되는군요. 최근 미국의 호프 지발까지 템빨단에 합류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템빨단의 전력은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현재 시점엔 랭커도 섣불리 입장할 수 없는 필드가 바로 지옥입니다. 이번 일정에 참가한 인원은 채 10명도 안 돼요.”

“허... 지옥의 난이도는 전문가들의 예측보다 훨씬 높은가 보군요.”

“전문가의 예측도 가끔씩은 틀릴 수 있는 거죠, 뭐.”

“하하하!!”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세월.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은 그리드를 예측하려다가 실패하길 반복해오지 않았나.

한결 편해진 분위기 속에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영우는 지옥과 관련한 정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정보를 공개한다고 해서 피해를 입을 우려가 없으니 자신의 정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영우는 플레이어의 전반적인 성장을 바라고 있었다.

템빨단원들에게만 판매해온 그리드제 아이템들을 외판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정도다.

독식을 꿈꾸기에는 앞으로 남아있는 인류의 적이 너무 강했다.

***

“10명이라...”

고작 10명으로 지옥을 찾아가 28번, 27번, 26번 대악마를 레이드했다고 밝힌 그리드의 인터뷰가 전 세계 랭커들을 자극했다. 랭커들의 마음속에 도전의식이 싹텄다.

물론 지옥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바보는 없었다.

그리드가 말하는 10명엔 피아로, 메르세데스, 브라함이 포함돼 있을 테니까.

오래 전부터 템빨국을 수호해온 농부 피아로와 항상 그리드의 곁을 지키는 아름다운 여기사 메르세데스, 그리고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의 위명을 세상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혼자서 하이랭커 열 사람 몫은 족히 해낼 괴물들이야.”

“내가 볼 땐 스무 명 몫은 할 것 같은데. 마왕 토벌전의 4천왕을 잊은 거냐?”

“그때랑 비교하면 랭커들의 수준이 많이 올랐잖아. 유니크 등급으로 전직한 사람도 비교적 흔해졌고.”

현실 시간으로 2년이면 Satisfy 시간으로 6년이다. 보통 랭커도 아닌 하이 랭커들에게 있어서 6년은 개벽을 이루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하긴 그렇지... 단순하게 계산해서 하이랭커 60명쯤이면 그리드 파티 10명이랑 비슷한 화력을 낼 수 있겠군. 30명이 피아로, 메르세데스, 브라함 몫을 하고 나머지 30명이 그리드와 템빨단원들 몫을 하고.”

플레이어들은 대악마 레이드 때마다 숫자의 무력함을 절감했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단 한 명의 강자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하이 랭커들은 최근 가파르게 성장했다. 숫자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강자로 거듭났다. 현재 시점에서 대악마가 인계를 침입한다면, 굳이 템빨단이 나설 것도 없이 랭커들 자력으로 대악마를 해치울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어, 60명이면 충분할 거 같다.”

“사람들을 모으자. 우리도 지옥에 도전해 보자고.”

의기투합한 소수의 하이 랭커들이 사람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지원자는 많았다.

최고의 보상을 드롭하는 대악마 레이드를 누가 욕심내지 않겠는가.

고작 10명으로 지옥을 휩쓸고 다닌다는 그리드의 인터뷰가 랭커들에게 큰 희망을 준 것이다.

다만 지옥에 입장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상왕 키르의 패거리였던 ‘타로트’가 흑화 상태에서 죽으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개소리를 지껄였지만 당연히 무시했다. 흑화를 아무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목숨을 입장비로 지불하기엔 너무 비쌌다.

***

“허억, 허억... 환장하겠네.”

끈기, 집념, 역전.

그리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이다. 그는 포기를 몰랐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진득하게 노력해서 극복해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단 후퇴해야할 것 같은데?”

25번 지옥의 성은 특별했다. 산보다 큰 흑수정을 통째로 깎아 만든 성이다. 멀리서 봤을 땐 굉장히 신비롭고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와서 보니 끔찍했다. 흑수정의 단면이 빛을 반사하고, 굴절시키며 멀미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균형 감각이 사라졌고 헛구역질이 나왔다. 상태이상 저항으론 해결하지 못하는 물리적인 문제였다.

덕분에 그리드 일행은 고초를 겪었다. 착란을 일으키는 시각과 정신 탓에 온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리엘은 몇 번이나 폭주를 일으킬 뻔했다.

“큭! 일단 튀어!!”

25번 대악마 단탈리안의 신중한 성격도 일행을 괴롭히는데 한몫 했다.

단탈리안은 그리드 일행과 전면전을 해주지 않았다.

빛의 굴절을 이용해 시선을 속이고 기습하기를 반복하며 일행의 체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세상의 온갖 지식을 섭렵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했다. 치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쿨럭!”

“피아로! 윽!”

“영우 씨!”

전투가 길어지면서 약점까지 간파 당했다.

해츨링, 칠악성의 화신, 직계 출신의 대마법사, 각 분야의 전설들...

면면이 화려한 그리드 일행 대부분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멀쩡한 사람은 네펠리나가 유일했다.

까강!

섬전처럼 날아온 창이 네펠리나의 심장을 찔렀으나 피부조차 꿰뚫지 못하고 바닥에 맥없이 떨어진다...

“일반적인 흑수정이 아니구나. 마력이 자꾸만 흩어져 반격할 수가 없어.”

자신의 모습을 반사하는 내벽을 어루만져본 네펠리나가 더 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드의 말대로 후퇴하도록 하자꾸나.”

그때였다.

““당신들은 못 나갑니다.””

어린 소년, 늙은 노인, 젊은 여자, 부리부리한 눈매의 청년...

머리에 다양한 사람의 얼굴을 붙인 괴물의 모습이 사방팔방에 투영됐다. 모든 흑수정마다 놈의 기괴한 낯짝이 담겼다.

““제 성에 들어왔다가 살아나간 존재는 여태껏 단 하나도 없었거든요. 자네들의 생은 여기서 끝일세. 해츨링은 생포하자. 해부해서 연구재료로 써야지.””

노인, 청년, 여인, 소년의 목소리가 겹친다. 목소리마다 말투도 달랐다. 듣기 괴로웠다.

“살!!”

그리드가 검무를 전개했다. 착란을 일으키는 흑수정 내벽 탓에 길을 잃었으니, 내벽을 모조리 부셔버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스킬이 발동하질 않았다.

[마나가 흩어집니다.]

[검기가 흩어집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이런 염병.’

이건... 정말로 위험하다. 비장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없다.

판단한 그리드가 유라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인 유라가 눈치껏 스킬을 사용했다.

“지옥 규제!”

쏴아아아━

옥색의 빛이 범람하며 마기를 정화한다.

단탈리안의 지식과 흑수정의 결합으로도 데빌 슬레이어의 마력엔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그리드가 검무를 전개했고 사자들도 마법과 스킬을 난무했다.

쿠구구구구궁!!

거대한 성이 무너질 기세로 흔들린다. 하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흑수정은 그리드 일행의 마법과 스킬을 정통으로 맞고도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마법과 스킬을 반사하여 일행을 위협했다.

흑수정에 비치는 단탈리안의 얼굴들이 하하호호 웃기 시작했다.

““아직도 모르겠나? 이 성은 수천 년의 지식과 기술을 집대성해 만든 지옥 최강의 요새랍니다. 그 어떤 힘도, 격도, 심상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결계인 셈이지. 여기서 살아나가는 건 불가능해요.””

서걱━!

““...!?””

신나서 떠들던 단탈리안의 얼굴들이 얼음장처럼 굳었다.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기술과 마법의 술식을 더해 탄생시킨 흑수정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양단됐기 때문이다.

설원에 반사되는 달빛처럼 차가운 빛의 검...

흑수정을 깎아 만든 내벽을 깔끔하게 베어 갈라버린 그 검의 모습을, 흑수정은 비추지 못했다. 모든 섭리를 부정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다 부셔버리기 전에 길 열어.”

그리드가 으름장을 놓았다. 당연히 허세였다.

낙월검은 10분에 1번밖에 못 쓰는 조루형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현재 그리드뿐이다.

““갈 길 가세요.””

허세가 먹혔다.

흑수정이 불투명하게 변하며 빛의 반사와 왜곡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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