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19화 (1,309/1,794)

템빨 66권 - 19화

마족들의 기습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미리 알고 대비했음에도 3만의 생명력을 손실했다.

까득, 까드드득! 탐욕을 비명 지르게 만드는 열기와 생명의 본질을 억압하는 마기가 혼재하는 헬파이어의 위력은, 그 어원이 왜 지옥에 있는가를 여실히 상기시켰다.

‘갓핸드와 방어구의 재질이 탐욕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녹아내렸을 거다. 근데 방금 뭐지?’

잘못 본 게 아니다. 네펠리나는 이 막대한 위력의 마법을 ‘흡입’했다. 산 정상에 오른 등산객이 폐부 깊숙이 공기를 마시듯 마족들의 마법을 만끽했다.

네펠리나의 상태창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지경이다.

“외곽의 마족들은 생각보다 더 나약하구나.”

콕콕.

어디서 주워온 막대기로 마족들의 시신을 건드려본 네펠리나가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흡입한 뒤 다시 토해낸 불길에 휩쓸린 마족들의 시체는 완전히 새카맣게 타버려 재로 흩날리고 있었다. 이내 솟구치는 잿빛 기둥들 사이에서 그리드가 물었다.

“어떻게 한 거야?”

“뭐를?”

“방금 그건 브레스가 아니잖아. 무슨 마법...이죠?”

네펠리나의 외형은 12살쯤의 어린 소녀다. 실제 나이는 더 어리다. 함께 지낸 세월도 나름 꽤 되어 편하게 반말이 나오다가도 동공이 길쭉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움찔 놀라 공손해진다.

“마법이 아니야. 네가 본 대로 단지 먹은 뒤 뱉어냈을 뿐이다.”

대수롭지 않은 답변이 그리드의 표정을 심각하게 만들었다.

마법을 단지 무력화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흡수한 뒤 더 큰 위력으로 방출하는 능력.

그것이 네펠리나 고유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드래곤의 ‘종족특성’일 경우, 드래곤의 무력은 그리드가 상정해온 것을 넘어선다는 뜻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드래곤이 세계관 최강의 종족이라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다.

드래곤은 잡으라고 만든 몬스터가 아님을 S.A그룹은 이미 몇 차례나 못박아왔고, 미식룡 레이더스와 직접 만나 그 힘의 편린을 체감하기까지 했다.

그리드는, 드래곤에게 도전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레이더스가 보여줬던 ‘드래곤의 변덕’에 휩쓸릴 경우를 염두에 둬야 만 했다.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어떤 드래곤이 갑자기 템빨국에 난입해 깽판을 부린다면...

그리드는 막아야한다. 그건 피할 수 없는, 피해선 안 되는, 피할 생각 따위 없는, 당연한 의무다.

“마법을 단지 먹고 뱉었을 뿐이라고... 모든 드래곤의 공통 된 능력인 건가?”

“응, 드래곤은 원소를 지배하니까. 축복의 수준을 넘어선다는 거야. 다만 하나의 개체가 모든 원소를 지배할 수는 없어. 그건 음... 재능의 개념이야. 태어날 때 얻는 비늘의 색깔이 지배하는 원소를 상징한다고 보면 쉬워. 예를 들어 레드 드래곤인 염룡 트라우카는 불을 지배하는 대신 물은 지배하지 못해. 물론 지배하지 못할 뿐이지 약하다는 뜻은 아니야.”

“해석하자면 트라우카가 삼킬 수 있는 마법은 불 속성으로 한정된다는 거야? 물 속성 마법은 삼키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물 속성 마법에 취약하다는 뜻은 아니고?”

“정답. 하지만 비늘 색을 맹신해선 안 돼. 비늘 색을 바꾸는 일쯤이야 드래곤에겐 쉽거든.”

“그렇구만...”

그나마 다행이다.

브라함이 마법을 쓰는 족족 반사당하는 일은 없을 듯하다. 무효화될 가능성은 높겠지만.

‘드래곤하고 싸워야하는 사태가 왔을 때 브라함이 병풍 될 가능성이 100퍼센튼 아닌 거군.’

천사를 만날 때마다 병풍이 되는 브라함을 볼 때면 가슴이 아팠다...

안도하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네펠리나 넌 사실 레드 드래곤인가?”

“아니, 내가 레드 드래곤이었다면 마기가 섞인 불을 삼키진 못했겠지.”

“...?”

쏴아아...

푸른 색이었던 네펠리나의 머리카락이 흑발로 변한다.

“나는 블랙 드래곤이야. 그리고 블랙 드래곤과 골드 드래곤은 모든 원소를 지배해.”

“...!?”

“재능만 놓고 봤을 땐 나름 특별하다는 거지. 그래서 번헬리어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할 수도 있었던 거고.”

“그, 그렇구나. 대단하십니다.”

또 다시 공손해진 그리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자신의 하나뿐인 드래곤이 천재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기쁠 수밖에.

머리카락 색을 다시 파랗게 바꾸고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 네펠리나가 주위를 빙~ 둘러봤다.

“근데 이곳은 이상하리마치 조용하네. 그 흔한 마수도 안 보여.”

지옥의 마기는 사악한 존재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지옥 어디에나 마족과 마수가 득실거려야 정상이었다.

한데 고요하다.

눈살을 찌푸리는 네펠리나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지옥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가 마수와 관련이 있어?”

“마수와 마족은 내게 좋은 식량이야. 블랙 드래곤은 마기를 흡수할수록 비늘이 더 단단해지거든. 골드 드래곤이 광물을 먹을수록 단단해지는 거랑 똑같아.”

“그럼 원래 블랙 드래곤의 거처는 지옥인 건가?”

“아니, 지옥에 둥지를 틀 정도는 아니야. 마기에 심취해서 너무 많이 흡수했다간 악룡 번헬리어처럼 사악해지거든. 게다가 지옥과 중간계를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니 특별한 주기마다 방문하는 정도가 적당해. 그것만으로도 대악마들의 경계를 사서 아버지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지만.”

‘번헬리어와 네바르탄 모두 블랙 드래곤이었나.’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묘하게 솔직한 네펠리나가 그리드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신뢰 받는 느낌이라 좋다.

“네펠리나 너를 위해서라도 이번 지옥 정벌에 성공해야겠는걸.”

“까불지 마.”

“....”

빙그레 웃으며 네펠리나의 머리를 토닥이던 그리드가 냉큼 손을 거뒀다.

그를 등지고 선 네펠리나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

서열 제10위 대악마 레라지에의 성.

지옥 중심부 즉, 진정한 마경(魔境)으로 진입하기 위한 최후의 관문인 이곳은 지옥 최고의 요충지 중 하나로 꼽힌다.

마르바스가 수시로 방문해서 방비를 점검할 정도였다.

“얼마 전에 데빌 슬레이어를 성으로 초대했다고 들었네.”

“악명이 자자하기에 불러봤느니라. 하지만 실망이더군.”

“그래서 살려서 돌려보냈는가?”

“나 패왕 레라지에의 손에 그깟 애송이의 피를 묻혔어야했느냐?”

“하하, 아닐세. 그래선 안 되지. 피라미는 피라미의 손에 맡겨야 피라미에게도 성장할 기회가 생기는 법이잖나.”

“내 말이 그 말이니라.”

웃으며 술잔을 기울인 마르바스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데빌 슬레이어에게 일행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자는 누구였나?”

마르바스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술잔에 가려진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식기에 반사되는 그의 눈빛을 엿본 레라지에가 어깨를 으쓱였다.

“관심 없다. 하찮은 인간을 내가 일일이 기억하겠느냐.”

“그렇군...”

이후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마르바스는 대화 내내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는 반면 레라지에는 갈수록 오만상을 찌푸렸다. 은근한 심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쾌하다고 해서 마르바스를 쫓아낼 수는 없었다.

마르바스는 보통의 악마들과 궤를 달리하는 존재다.

태초의 악마들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수천 년을 존재해온 그는 본능을 억누른 채 오직 야탄만을 섬겼다. 다른 악마와 단 한 번도 경쟁하지 않고, 단지 처단하며 지옥을 관리해왔다. 야탄이 다시 눈을 뜨기 전에 혹시라도 지옥이 멸망하지 않게끔, 철저하게.

본래 바알이 맡았어야할 역할을 대행하는 셈이다.

야탄의 신탁을 받는 자, 혹은 지옥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는 그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한가한 늙은이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군.”

쓸데없는 대화가 한창을 오가고 나서야 마르바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은빛의 목걸이가 찰랑인다. 순백의 깃털을 멋지게 장식해놓은 중절모를 푹 눌러쓴 그가 웃으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보겠네. 조만간 또 보세.”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하하, 서운하게 굴지 말게나.”

“흥.”

콧방귀 뀐 레라지에가 손을 젓자 알현실 문이 활짝 열렸다. 축객령이다. 쫓겨나다시피 성을 떠난 마르바스가 목걸이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저 어린 아이는... 여전히 신성과 신격을 느끼지 못하는군.”

레라지에는 얼마 전 지옥에 방문했던 정체불명의 신과 접선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일부 고위 대악마가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르바스에게 조사를 의뢰했다.

마르바스 입장에선 난감한 일이었다.

만약 레라지에가 뒤에서 꾸미고 있는 일이 드러날 경우, 마르바스는 그녀를 처단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라지에는 의외로 철두철미했다. 성 어디에도 베리아체의 흔적을 남겨놓지 않았다. 게다가 신격이 깃든 목걸이와 신성력이 녹아든 깃털을 알아보지 못했다.

“레라지에가 신과 접선한 게 사실일지언정 그녀는 상대가 신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농후하네. 지금 단계에선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어.”

고위 대악마의 사역마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달한 마르바스가 모자를 눌러쓰며 미소 지었다.

***

라빗 행정관은 역할이 역할이다 보니 늘 노심초사한다. 그리드가 혹 자신을 미워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이번 배웅은 아마도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한 연장선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리드 일행이 또 사고를 저지를까 염려해 이곳까지 쫓아온 극성맞은 인물로 내비쳐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황금 호두 우선 지급 대상에 포함시켜야겠군.’

피로에 찌든 라빗의 모습이 라우엘을 근심시켰다.

‘빨리 후계자를 찾아야할 텐데.’

템빨국엔 인재가 많다. 심지어 천재적인 수준의 인재들이었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활약해준 덕분에 지금의 템빨국이 존재하는 것이나, 라우엘은 이 체제의 맹점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대체자를 찾기 힘들다.

라우엘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이 없어 라우엘이 혹사당하고 있듯, 라빗 행정관을 비롯한 각 분야의 인재들은 10년 이상 혼자서 고군분투 중이었다.

워낙 뛰어난 그들이 안심하고 후사를 맡길 정도의 인재를 발견하고 육성한다는 건 정말로 힘든 일인 것이다. 현재로썬 온갖 영약을 써서라도 기존의 인재들을 연명시키는 게 최선일 정도였다.

“괜찮아?”

그리드가 떠난 후 1시간 반 만에 드디어 마지막 조가 지옥문을 넘었다.

그들을 배웅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던 라우엘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발과 시선이 마주친다.

그의 검에 찔린 몬스터의 발톱이 라우엘의 코앞에 멈춰있었다.

빛으로 산화하는 몬스터를 보며 정신을 차린 라우엘이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한눈을 팔았네요. 감사합니다.”

“...너, 레벨 몇이냐?”

지발과 라우엘의 인연은 깊다.

미국 대표로 국대전에서 몇 번이나 함께 활약했고, 템빨단에 가입하기 전에 라우엘이 의탁했던 곳이 바로 7대 길드 연합이었다.

라우엘이 한때 최고의 유망주였단 사실을 지발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한눈을 팔았어도 그렇지, 고작 이 정도 몬스터의 기습을 눈치 채지 못한 라우엘의 몰락은 지발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350...이라고 해두죠. 하하, 부끄럽네요.”

“....”

설마 현대판 노예인가...?

오만가지 상상을 떠올리며 충격 받는 지발. 그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지발이 전 7대 길드 연합의 총수였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괜한 욕심을 부려 연합을 와해시킨 장본인이긴 하지만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타고난 인물이다. 연합이 와해된 이후부턴 내적으로 많이 성숙해졌고 국대전에서도 꾸준히 좋은 활약을 펼쳐왔다. 콧대 높은 미국 대표들이 리더로 인정했을 정도다.

게다가 그랜드마스터의 신뢰도 얻었다.

‘...앞으로 몇 년 유심히 지켜보도록 할까.’

10년째 공석인 남부 도독 자리가 주인을 찾을 것 같다.

생각하며 방긋 웃는 라우엘의 모습에 지발은 왠지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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