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18화 (1,308/1,794)

템빨 66권 - 18화

Satisfy의 지옥은 흔히 생각하는 팔열지옥과 다르다.

하늘과 땅이 있고 낮과 밤이 교차한다. 미약하나마 혜택을 주는 자연 덕분에 일부 마족은 문명을 이뤘다.

Satisfy에서 지옥이란, 인간이 아닌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일뿐이라고 이해하면 쉬운 것이다.

다만 도덕이나 법규 따위의 개념이 없어 위험하다. 몇 개의 안전 구역을 제외한 지옥 전역에서 온갖 비윤리적인 일이 자행됐고 살육이 난무했으니 이름 그대로 지옥이다.

“긴장되는군요.”

피아로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지옥은... 생전에 죄업을 쌓은 이들의 영혼이 떨어지는 장소라고 배웠습니다. 죗값을 치르기까지 영겁토록 고통 받으며 반성하고 정화되는 영혼이 있는 반면 독기를 품고 악령이 되는 영혼이 있다고 하지요. 신격을 이루신 전하께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빛의 여신의 축복을 받지 않고 지옥을 방문했다간 악령에 홀려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여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 저희가 과연 지옥에서 활약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살아서 지옥을 다녀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피아로는 당연히 지옥을 다녀오지 못했다. 그러므로 잘못된 정보를 맹신할 수밖에 없다.

메르세데스가 그를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피아로님, 저희가 믿어온 신이 마냥 올바르진 않음을 직접 보고, 듣지 않으셨나요.”

지옥에서 안전하기 위해선 빛의 여신의 축복이 있어야한다.

즉, 빛의 여신은 세상 어디에서나 전능하다...

이처럼 근거 없는 주장의 발원지는 당연히 레베카교다.

“피아로님께서 알고 계신 지옥은 레베카교가 묘사하는 지옥이에요. 그리고 레베카교는 믿을 게 못 됩니다. 실제 지옥은 다를 거예요.”

레베카교는 사하란 제국과 템빨국의 국교였던 까닭에 메르세데스 또한 레베카교를 맹신해왔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세계를 지키고자 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지크프렉터와 신들의 죄를 논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대천사 사리엘이 바로 곁에 있지 않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레베카와 레베카교를 신뢰할 순 없었다.

“음...”

읽고 있던 레라지에의 일기장을 덮은 그리드가 피아로와 메르세데스를 마주보았다.

“메르세데스의 말이 맞다. 여신의 축복이 없더라도 지옥에서 활동하는 건 가능해. 예를 들어 마기를 쌓거나 데빌슬레이어의 도움을 받거나... 그리고 나는 지옥을 몇 번이나 오갔지만 아직 악령이라는 걸 보지 못했다.”

유라의 도착 예정시간까지 30분 남았다.

여유가 있으니 대화에 어울려도 좋겠지.

하지만 마냥 입만 놀릴 생각은 없다.

그리드는 일기장을 덮은 대신 갓핸드들을 직접 조종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피아로와 메르세데스에게 두고 대화하면서도 갓핸드의 사냥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의식을 분산시켰다.

키엑, 키아아...!

몬스터들이 죽어나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대화도 무르익어갔다.

고작 이 정도의 멀티 플레이는 지금의 그리드에겐 너무 쉬웠다. 축적된 경험이 재능의 부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레베카교의 주장이 마냥 틀렸다고 보기는 어려워. 지옥은 서대륙만큼이나 넓고 마족의 종류는 인종보다 다양하거든. 지옥 어딘가에선 죽은 자들의 영혼을 관리하고 있을지도 몰라. 망령이라는 게 출몰할 수도 있겠지.”

실제로 일부 악마는 죽은 자의 영혼을 전리품마냥 수집한다. 정확히는 ‘악마와 계약한 후 죽은 자들의 영혼’이다.

바알의 손아귀에서 절규하던 파그마의 영혼을... 그리드는 목격한 바 있다.

“만약 망령과 조우하게 되면... 여신의 축복이 없어서 위험할까요?”

그리드의 답변에 메르세데스가 다소 긴장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피아로와 마찬가지로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나쁘지 않다.

지옥은 지극히 위험한 장소니까.

그리드는 벌써 몇 번이나 지옥을 다녀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이 미지로 다가왔다. 구역마다 워낙 다른 환경과 특성을 지녔으니 적응하거나 예측하는 게 불가능했다.

두 사람처럼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주는 게 좋은 것이다.

힐끔, 그리드가 다른 사자들을 흘겨보았다.

네펠리나는 지옥에 가는 대신 배식량을 늘려달라고 라빗에게 흥정 중이었고 지크프렉터는 길 한복판에 이불을 깔아놓은 채 숙면 중이었다. 브라함은 천사의 마법무효화 술식을 조사해야겠다며 사리엘을 괴롭히고 있었다.

저게 어딜 봐서 지옥행을 앞둔 결사대의 모습이란 말인가.

긴장감이라고는 쥐뿔도 없다...

“아마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겠지. 신성력 없이는 영적인 존재와 싸우는 게 불가능하니까. 공교롭게도 우리에겐 신성력이 없고 말이야.”

애초에 신성력이라는 개념은 애매모호하다.

레베카교, 쥬다르교, 도미니언교를 제외한 그 어떤 종교도 신성력을 생성하지 못한다.

대개 사람들은 신성력이 신의 거룩함에서 비롯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Satisfy에서 신성력은 레베카의 전유물이나 다름이 없다. 쥬다르와 도미니언조차 그녀에게 빛을 나눠받았다는 신화가 있는 걸 보아 신성력은 레베카 개인의 권능에 가까운 개념이다.

‘성녀를 경계하는 이유도 밥그릇 뺏길까봐 걱정하는 느낌이지.’

“만약 망령과 마주치면 피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 우리에겐 유라가 있으니까. 지옥에서의 데빌 슬레이어는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거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반기를 꿈꾸는 레라지에의 입장에서 데빌 슬레이어는 무척 중요한 패다.

그래선지 최근 한 달 동안 유라를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레라지에가 제공해준 온갖 정보를 발판으로 성장했을 유라가 어디까지 성장했을지, 그리드도 섣불리 추측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그리드가 그녀보다 월등히 강했지만 지금은 격차가 많이 좁혀졌을 것이다. 적어도 지옥에서만큼은 말이다.

‘마기를 흡수하는 스킬을 배웠다고 하니까...’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

흥정이 뜻대로 안 되자 화난 네펠리나가 라빗의 옷깃을 물어뜯고, 새로운 지식에 흥분한 브라함이 사리엘의 깃털을 뽑기 시작했을 무렵.

유라가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다.

“마족들의 견제 때문에 지옥문을 여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사과할 필요 없어. 미안한 건 오히려 나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정을 잡았으니.”

유라는 정신 사나운 현장의 분위기에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지옥 정벌을 앞둔 신의 사자들이 모인만큼 분위기가 엄숙할 줄 알았는데 시장 한복판 같았으니 당황할 수밖에.

이불 깔고 누워있는 지크프렉터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물었다.

“근데 마족들이 지옥문을 견제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게 가능해?”

지옥문.

지옥과 인계를 연결하는 통로다. 데빌 슬레이어의 고유 스킬 중 하나다.

평범한 인간이 지옥을 방문하기 위해선 반드시 지옥문의 도움을 받아야했다.

“지옥문의 출현을 감지하는 악마와 마족이 나타났어요. 지옥문을 여는 순간 위치를 특정하고 추적해오죠. 글런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뭐...?”

매우 심각한 문제다.

유라가 지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건 순전히 지옥문 덕분이다. 지옥문을 견제 받게 됐다는 건 자유가 억압됐다는 뜻과 같았다.

“아니 근데... 지옥문을 캐스팅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몇 분도 아니고 고작 7초 정도 아니었나? 그런데도 추적을 걱정해야 한다는 건 놈들에게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는 거야?”

“맞아요. 좌표를 특정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순식간에 날아오죠. 브라함이나 스틱세이처럼요.”

“대마법사급 마법을 쓴다는 건가...”

악마와 마족의 종류는 워낙 많다. 마법적인 능력을 타고난 개체가 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긴장하지 않는 사자들에게 핀잔을 줬던 그 또한 사실 이번 지옥행을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멤버들의 면면이 워낙 화려했기 때문.

하지만 유라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긴장감이 몰려왔다.

“문을 인계에서 열어도 좌표가 특정되는 건 마찬가지에요. 지옥문을 넘어 지옥에 입장하자마자 기습당할 가능성이 높아요.”

참고로 지옥문은 2명밖에 이용하지 못한다.

재사용 대기 시간은 30분.

지금 여기에 있는 8명이 동시다발적으로 지옥에 입장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둘씩 들어갔다가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다.

잠시 고민해본 그리드가 말했다.

“나를 먼저 보내줘. 내가 가서 적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놔야겠어.”

사자들은 약하지 않다. 몇 명은 그리드보다 오히려 강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유한하다.

그리드 입장에선 선발대를 자처하는 게 당연했다.

“네, 누구를 데려가실 건가요?”

“음...”

그리드가 사자들을 살핀다.

메르세데스는 열렬한 시선을 보내왔고 피아로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브라함은 관심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고 사리엘은 싱글벙글 웃는다. 지크프렉터도 슬그머니 일어나 이불을 개고 있었다.

“나는...”

스윽.

그리드의 손가락이 네펠리나를 가리켰다. 작은 입에 라빗의 손을 넣고 오물오물 씹고 있는.

“네펠리나랑 같이 갈게.”

“그러려무나.”

퉤, 침으로 범벅된 라빗의 손을 뱉은 네펠리나가 근엄하게 말했다. 드래곤의 명예를 의식하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그리드와 단 둘이 있을 때는 애나 다름없지만...

“내가 감시해야지 안 그러면 사고 칠 것 같아.”

“위대한 드래곤의 힘에 의지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려무나.”

“음...”

아직 해츨링인 주제에, 라는 핀잔을 주기엔 해츨링도 너무 위대하다.

순순히 입을 다문 그리드가 노에, 랜디, 템빨골과 갓핸드를 모조리 회수했다. 물론 갓핸드는 인벤토리에 넣지 않고 자신과 네펠리나의 주위에 띄웠다. 지옥문을 넘자마자 날아올 기습도 갓핸드가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가서 안전구역을 확보해놓을 테니까 다음 지옥문도 계속 같은 위치에 열어줘.”

“공교롭게도 완전히 같은 위치에는 문을 열 수 없어요. 차원 이동 좌표엔 반드시 오차가 발생하거든요.”

“다음 문은 완전히 엉뚱한 방향에서 열릴 수도 있다는 뜻이야?”

“네, 하지만 32지옥을 벗어나진 않을 거예요.”

“이거 원 쉽지가 않군.”

“우선 네펠리나 양, 이 차를 마시세요. 지옥의 마기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줄 거예요.”

“우웩. 떫고 쓰구나.”

“아직 어려서 차 맛을 모르시네...”

“그리드여. 내게 예절을 갖추려무나.”

그리드와 네펠리나가 티격태격 하는 동안 공간이 뒤틀리고, 찢어졌다.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새카만 구멍이 두 사람의 눈앞 허공에 생겨났다.

지옥문이다.

문에 발을 올린 그리드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다들 조심해. 무사히 만나자고.”

“무운을 빕니다!”

그리드 일행을 배웅 나온 라빗과 기사들이 일제히 경례했고,

스파앗!!

그리드와 네펠리나의 모습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

쿠콰콰콰콰쾅!!

지축을 울리는 폭발과 함께 화마가 치솟는다.

유라의 경고대로 지옥문을 넘자마자 기습이 날아왔다.

그리드와 네펠리나의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하하하! 쥐새끼 같은 데빌 슬레이어 놈을 드디어 잡았...?”

흥분해서 소리치던 마족들이 금세 입을 다물었다.

업화에 타들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표적과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데빌 슬레이어가 아니야. 미끼다.”

“미끼를 보내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설마 계속 미끼를 보내다보면 우리의 마력을 고갈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인간은 약해 빠져서 마력의 총량이 적잖아. 데빌 슬레이어라고 해봤자 인간이니까 상식의 수준도 낮은 거겠지.”

“불은 있는데 고기가 없구나.”

“...?”

과연 고도의 마법을 익힌 놈들답게 이성적으로 대화하던 마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의 대화 사이에 섞인 헛소리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후우웁!”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활활 타오르던 업화가 무엇인가에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

업화가 걷히자 드러나는 광경에 마족들이 깜짝 놀랐다.

재가 되어 소멸했어야할 인간들이 멀쩡히 서있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뺨을 한껏 부풀린 꼬맹이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롸라랏!!”

꼬맹이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주둥이를 벌리자,

쿠와아아아아아앙!!

거대한 불의 기둥이 쏘아졌다.

수십 명의 마족이 힘을 모아 일으켰던 업화가 하나로 뭉쳐서 더 큰 열기를 품고 날아오는 것이었다.

마족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고기가... 내 고기들이 사라졌다.”

충격 받은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네펠리나를 그리드가 넋 놓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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