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16화
육체를 단련하고 검술을 연마하며 재능을 측량했다. 재능이 존재함을 자부하고 나서야 논밭을 찾아갔다. 그리고 지옥을 맛봤다. 상식을 개변시킬 정도로 혹독한 훈련은 차라리 고문이라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견뎌냈다. 계절마다 바뀌는 농작물을 포용하는 대지의 굳건함을 배웠기에 가능한 인내였다. 자연에서 가르침을 찾고, 농부들과 함께 체력을 기르고, 기사의 도리를 본받은 끝에야 재능이 발화함을 느꼈다. 부끄럽지 않은 검술과 꺾이지 않는 신념을 품은 후에야 비로소 충성의 서약을 맺었다.
그렇듯, 템빨국의 기사가 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직접 사사한 농부들과 기사들에게 정식으로 수료해야만 자격을 꿈 꿀 수 있었다.
“꿀꺽.”
템빨기사단.
제국의 적기사단과 쌍벽을 이루는 최강의 기사단이 긴장해 연신 마른 침을 삼킨다.
가우스 왕국과의 전쟁이나 대악마와의 전투를 앞뒀을 때보다 더 큰 압박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선임기사 로이먼이 재차 당부했다.
“긴장을 유지하되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을 품었다간 치솟는 불길에 위축되어 물러나게 될 것이다.”
“예!”
힘차게 대답한 기사들이 방패를 고쳐 세웠다.
현재 그들은 그리드의 대장간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드가 새로운 신검을 제작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수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드의 손끝에서 염룡검이 탄생했던 날, 저 거대한 대장간이 폭발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용광로조차 염룡검이 내뿜는 화기(火氣)를 감당하지 못해 발생한 사태로 추측됐다.
그날의 사건 이후, 행정관 라빗은 그리드의 대장간을 더욱 웅장하고 견고하게 재건축 하였으나...
‘부족할 수도 있다.’
썩 안심이 되진 않았다.
라빗은 벌써 20년 가까이 그리드를 섬겼다. 그리드의 성장이 결코 멈추지 않는단 사실을 목격해왔다.
‘전하의 대장장이 기술은 더욱 더 발전했을 터. 이번엔 대장간뿐만 아니라 이 구획 전체가 폭발에 휩쓸릴 수도 있다.’
대장장이 기술의 발전과 폭발의 상관관계가 도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폭발의 여파에 대비한답시고 기사단 전력의 절반과 마법사단 전력의 80퍼센트를 대동한 점에 대해서 반발이 꽤 있었다.
하지만 라빗은 강행했고, 사람들은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리드가 신검을 만드는 여파로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단 1퍼센트라도 존재하는 이상 라빗의 행동을 막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국가의 재산과 백성들을 보호하는 일은 관료의 의무다.
따앙━!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는 가운데 그리드의 망치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벌써 3일 밤낮으로 멈추지 않는 소리였다.
“곧 끝나겠네요.”
라빗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법사들을 파견한 마탑주 라엘라. 대장간 근처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중얼거린다.
그리드는 슬슬 접속 제한 시간에 걸려서 강제 로그아웃 될 것이다. 여태까지 그리드의 패턴으로 보건데 신검의 제작은 곧 끝난다.
그리드가 하나의 신검을 만드는데 소요하는 시간이 평균 3일이었으니까.
“드디어 완성품을 볼 수 있겠군.”
라엘라의 건너편에 앉아 수정과를 원샷한 극검이 싱글벙글 웃는다.
그리드의 새로운 신검은 어떤 위용을 자랑할까.
기대감에 사로잡힌 그는 벌써 몇 시간째 흥분 상태였다.
그들은 라빗과 달리 느긋했다. 폭발이 일어날 거라는 염려 따위 하지 않았다. 염룡검을 만들었을 때 발생했던 폭발은 어디까지나 염룡검의 강력한 화기가 만들어낸 결과. 그리드가 염룡검 이상의 화속성 무기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에야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일은 없다.
‘이번에 그리드가 만들 무기는 풍속성이나 빙속성이겠지.’
극검은 그리드가 기왕지사 풍속성 무기를 만들기를 바랐다.
원거리 공격과 가속을 보조하는 풍속성 무기의 범용성은 올해 국대전에서도 증명됐다.
아레스 군단의 랭커 오아시스가 질풍을 일으키며 활약하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지 않았나.
오아시스는 올해 국대전 최고의 루키 중 한 명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무패왕의 검술도 쓰지 않았지.’
자신의 진가를 세상에 알릴 생각이 아직은 없어보였다. 템빨단을 제외하곤 오아시스가 무패왕과 관련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을 2개나 땄고 PvP에서 32강까지 진출했다.’
오아시스 개인의 실력이 제법인데다가 바람을 통제하는 검의 위력이 워낙 탁월했다.
미국 언론이 새로운 희망이라는 수식을 붙였을 정도다.
‘자격은 충분했어... 뭐, 그래봤자 코크보단 조금 못했지만.’
오아시스가 설령 무패왕의 검술을 썼다고 해도 코크보단 살짝 아래가 아니었을까.
극검은 생각해보지만 내심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템빨그림자단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오아시스는 7만 대적검까지 습득한 상태였으니까.
30만 대적검까지 쓰는 그리드와 비교해서 애송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드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리드는 만인에게 평등하다. 그리드를 상대론 누구라도 애송이다.
“응?”
극검의 생각이 산으로 가는 사이 라엘라가 당황하고 있었다.
“왜?”
“그리드님이 로그아웃했어요.”
“뭐라고?”
친구 목록을 열어본 극검이 얼굴을 구겼다.
라엘라의 말대로 그리드가 미접속 상태였다.
“설마 최악의 결과가 나온 건가...”
“아무래도 그런가 봐요...”
3일.
시간적으로 봤을 때 그리드는 이미 새로운 신검의 제작을 완료했을 것이다.
한데 결과물의 성능을 실험하지도 않고 말없이 로그아웃했다는 것은... 망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길드 채팅창이 난리였다.
-그리드 나갔는데?
-설마... 아 그리드 어쩌냐...
그렇지 않아도 비급 뽑기에서 죽을 쓴 그리드다.
한데 신검 제작조차 망한 듯했으니 템빨단원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템빨단 전체가 초상집 분위기였다.
***
[닭발에 소주 한 잔?]
“피곤해 죽겠는데 술은 개뿔....”
로그아웃한 신영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극검이 어울리지 않는 이모티콘까지 써가며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
하루 내내 단 한 번도 로그아웃하지 않고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배도 엄청 고프지만... 우선은 자야한다.
침대에 몸을 던진 영우가 그대로 잠을 청했다.
***
다음날.
“입 조심하세요.”
그리드가 슬슬 로그인할 시간이 다가오자 라우엘이 단원들에게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전하 앞에서 신검의 신자라도 꺼내시는 분은... 이유 불문하고 코크로 섬 던전에 던져버릴 겁니다.”
이제 헬가오는 7개의 화석을 대동하고 출몰한다.
놈을 안전하게 레이드하기 위해선 그리드가 직접 나서거나 템빨단 레이드팀 전원이 출동해야했다.
그곳에 던져버린다는 건 즉, 죽으라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
라우엘의 흉흉한 음성을 듣고 그가 진심임을 깨달은 템빨단원들이 길드 채팅창에 열심히 대답했다.
아이템 제작과 관련한 이야기는 절대로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이 대부분이었다.
그때였다.
[길드마스터 ‘그리드’가 접속하였습니다.]
템빨단원 전원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레가스가 힘차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신나게 즐겨보자고요!
라우엘의 눈빛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페이커, 출동해주세요.”
뭐? 신나게? ‘신’~나게?
이쯤 되면 거의 대놓고 반역하는 거 아닌가?
부들부들, 몸을 떠는 라우엘에게 페이커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레가스를 코크로 섬으로 보냈다. 다소 억울해하는 눈치였다만 순순히 워프게이트에 올라타더군.
“던전에 입장하는 모습까지 확인하셨나요?”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부하들에게 잘 감시하라고 일러주세요.”
라우엘의 화가 조금 풀릴 때쯤 반트너의 채팅이 이어졌다.
-오~? 그리드 왔냐? 혹시 너 동대륙에 있는 구미호 둥지 가봤어? 내가 어제 거기서 신기한 일을 겪었...
“페이커.”
-반트너의 신변은 이미 확보했다. 지금 당장 코크로 섬으로 보내도록 하지.
-악! 뭐야! 페이커 이 새끼 왜 이래!? 야 미쳤...
“...후.”
감히 그리드님 앞에서 자꾸만 신검의 신을 지껄이다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게 아닌가...
한심한 작자들 탓에 절로 한숨을 내쉬는 라우엘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달됐다.
“전하께서 대장간에서 나오질 않고 계십니다.”
“....”
템빨국에서 그리드의 대장간은 성지(聖地)다. 칸의 사후, 그리드의 허가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성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다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말없이 대장간에 틀어박힌 그리드를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은 멀리서 응원하고, 보호할 뿐이었다.
***
그리드가 대장간에 틀어박힌 지 6일째가 되었다.
그리드는 오늘도 역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폭발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던 템빨기사단과 마법사단의 임무는 어느새 그리드의 호위 임무로 바뀌어 있었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
따앙....
망치질 소리가 그쳤다.
이어서 최악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길드마스터 ‘그리드’가 로그아웃하였습니다.]
템빨단원들의 근심이 깊어졌다.
“재도전도 실패인 건가...”
“이거 진짜 큰일이네.”
대장장이는 아이템 분해가 가능하다. 분해를 진행하면 아이템 제작에 쓰인 재료를 추출할 수 있다. 하지만 추출할 때마다 재료의 양이 줄거나 질이 떨어진다고 들었다.
신검 제작에 벌써 2번이나 실패한 그리드는, 이미 상당량의 재료를 손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재료가 사신의 숨결이라면 괜찮다.
템빨단원들이 국대전에서 얻어온 보상이 사신의 숨결이므로 얼마든지 그리드에게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만약 숨결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면... 그때는 상황이 난처해진다.
“우리가 도울 일 없어?”
템빨단원들이 계속해서 라우엘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그리드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 구해오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드를 도울 수 없다.
이번 신검의 재료는 월야철.
그리드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길드마스터 ‘그리드’가 로그아웃하였습니다.]
또 3일이 지났다.
여태까지처럼 대장간에 틀어박힌 그리드는 이번에도 묵묵히 접속을 종료했다.
템빨단은 물론이고 템빨국 전체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리드는 템빨국의 중심이고 기둥이다. 그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 듯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백성들이 동요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열흘, 보름이 훌쩍 지났다.
슬슬 계절이 바뀌어갈 무렵이었다.
[템빨신 그리드의 신물(神物)이 출현하였습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템빨신의 신화가 강화됩니다.]
[템빨신교 교인들의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10 상승하고 아이템 착용 시 발생하는 페널티가 소폭 감소합니다.]
“...지긋지긋했다.”
밤의 어둠이 드리운 대장간을 한 자루의 검이 밝힌다.
달빛을 반사하는 설원처럼 시린 빛을 내뿜는 검이었다.
불길 속에서 장장 보름을 버틴 월야철을 간신히 제련하고 단련하여 만든 검.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즉, 달마저 베어 넘긴다는 의미에서 낙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화 아이템을 만들 때면 대개 그렇듯 시스템의 작명이었다.
그리드 입장에선 심히 불쾌했다.
“초토화검이라는 이름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뭐냐고...”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30 상승하였습니다.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올랐습니다.]
[템빨신교 교인들과 세상 모든 대장장이들의 신앙이 깊어집니다.]
[사람들의 당신을 향한 신앙이 깊어짐에 따라 신의 권한이 일부 해금됩니다.]
[명성 포인트의 사용처가 늘어납니다. 이제 황금마차뿐만 아니라 태양마차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태양마차는 금전의 신 ‘베니스’가 운영하는 이동 상점입니다.]
“...허허.”
보통의 플레이어는 황금마차를 자주 애용한다. 성능 좋은 소모품과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이템을 자력으로 생산한다. 소모품은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서 충당했다. 그리드 입장에서 황금마차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계정당 5회밖에 구매 못하는 <달콤한 사탕> 5개를 미리 구매해 비축하고 뽑기나 몇 번 해봤을 뿐이다.
무려 23만이 넘는 명성포인트를 놀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데 새로운 상점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태양마차를 소환해 판매 상품 목록을 확인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하나의 신검을 제작하는데 무려 23일을 소모하며 겪은 고통, 기껏 만든 신검이 낙월검이라는 소소한 이름을 갖게 된 점에 대한 불만이 눈 녹듯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