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15화
해각 레이드는 결과적으로 큰 이익이 됐다.
바이란 성의 복구비용과 소모품비용으로 쓰인 2,500만 골드를 상회하는 가치의 스킬이 비급함에서 쏟아져 나온 덕분이다.
템빨단은 축제 분위기였지만 그리드의 표정은 똥독이 오른 것처럼 최악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똥독이 뭐냐.”
비유를 해도 하필 꼭...
헛소리를 지껄이는 반트너를 노려본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확률이 실시간으로 변동되는 느낌이었다.’
그리드에겐 행운이라는 히든 스탯이 있다. 심지어 850이 넘는다. 긍정적인 확률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치였다.
한데 그리드는 전부 꽝을 뽑았다.
아니, 꽝은 과장이다.
그리드가 뽑은 비급들 전부 나쁘지 않은 성능을 자랑했다. 다만 그리드의 기준을 만족시키기엔 너무 평범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결과였다.
대박만 뽑아도 부족할 판국에 단 한 번도 대박을 뽑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행운 스탯은 무의미한 게 아닌가?
물론 행운 스탯 덕분에 최악은 피한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그리드가 너무 초라해졌다. 그리드가 정말로 타고난 똥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난 똥손이 아니야. 이건 조작이다.’
여태껏 내가 만든 신화 등급 아이템과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이 수십 개다. 게다가 얼마 전 레라지에를 상대로 증명했듯이, 중요한 순간마다 신장도 잘 터뜨린다.
이런 내가 똥손일 리가 없다...
부정하는 그리드의 머릿속엔 여태껏 잘됐던 기억들만 떠오르고 있었다.
수십 개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얻기 위해 만들었던 수만 개의 노말 등급 아이템과 신장이 터지질 않아서 죽을 뻔했던 위기들은 기억에서 지웠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식했다.
억지가 아니다.
비급함을 여는 족족 대박도 아닌 초대박을 터뜨린 지발을 바로 앞에서 목격했으니 조작을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비급함을 열 때는 확률이 낮아졌다가 지발이 열 때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았어.’
이를 단순히 불운으로 치부하기엔 문제가 있다.
계정마다 확률이 다르게 적용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빌어먹을 S.A 놈들,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견제할 작정이지?’
가슴에 치솟는 불길을 식히기 위해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안 가십니까?”
지발이 개봉한 비급함은 총 4개.
레전드리 등급의 비급함과 유니크 등급의 비급함 각 1개, 그리고 에픽 등급의 비급함 2개였다.
그리고 그 전부에서 초대박 스킬이 나왔다.
특히 레전드리 등급의 스킬 <중력진>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5미터 내의 중력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단, 지속 시간이 매우 짧고 시전자 본인도 중력의 영향을 다소 받는다. (1레벨 기준)
상식 이상의 순발력과 컨트롤 실력을 요구하는 스킬이었다.
천재라고 칭송받아온 지발조차도 중력진은 탐내지 못했다. 최우선 선택권을 지녔음에도 포기했다. 라우엘은 내심 그리드가 중력진을 가져가길 바랐다. 하지만 그리드 또한 중력진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사자들에게 먼저 선택권을 줄 거라고 공표한데다가 중력진을 완벽하게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력진의 주인은 메르세데스가 됐다.
중력 마법을 쓸 수 있는 브라함에게 중력진은 무의미한 잡기에 불과했고, 사리엘과 피아로는 자신들보다 메르세데스가 중력진을 더 잘 다룰 거라고 장담했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중력을 관조하고 적응하는 일... 혜안을 지닌 메르세데스에겐 손 쉬울 터였으므로.
메르세데스는 중력진을 어디까지 소화해낼까.
또한 다른 사자들과 지발이 새롭게 배운 스킬은 얼마만큼의 위력을 발휘할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모두가 연무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리드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반트너의 표현을 빌리자면 똥통에 빠지고 나온 것처럼 똥독이 오른 표정을 지은 채 말이다.
“그리드 님?”
라우엘이 걱정했다.
라우엘은 현재 그리드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솔직히 라우엘이 그리드 입장이라도 똑같이 조작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드가 비급함을 열었을 때와 지발이 비급함을 열었을 때의 결과가 극명하게 나뉘었으니까. 오죽하면 그리드가 싫다는 지발에게 강제로 레전드리 비급함을 떠넘겼겠는가.
‘S.A그룹 본사에 찾아가실 수도 있겠군.’
공개적으로 확률 조작을 비난하고, 조작의 증거를 밝히기 위해 법정싸움까지 가실 수도 있다. 엄청난 시간과 재력을 소모하는 일이겠지만 그리드에겐 재력과 영향력이 있다.
여태껏 그리드와 똑같은 피해를 입어온 플레이어들이 그리드에게 힘을 보태준다면 여론은 그리드에게 유리해질 것이다.
로펌을 통째로 섭외할 계획을 짜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나는 연무장에 안 가. 해야 할 일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이 타이밍이거든.”
“역시... 시작하시는 겁니까?”
여태껏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던 S.A그룹과의 싸움을?
‘이를 계기로 현실세계의 지배자까지 노리시는 건가...!’
작금의 상황을 언젠가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전개에 대입하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라우엘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물은 충분히 바쳤으니까.”
“꿀꺽.”
“곧장 대장간으로 간다.”
“....?”
비급함을 열며 겪었던 불운을 제물로 바쳐서 신화급 아이템을 노리시겠다는 건가...?
과연 개돼지 아니, 플레이어다운 귀결이다.
***
“컷! 퍼펙트!! 아~~주 좋았어요! 세희 양이 한 번 웃을 때마다 촬영장 전체가 화사해지는 느낌이었다니까요! 제가 이 느낌을 시청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을지 걱정될 지경입니다!”
김장철이 신나서 떠들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CF감독으로 꼽히는 그는 여태껏 수많은 스타들과 작품을 찍었지만 오늘처럼 큰 흥분을 느껴보는 건 처음이다.
신세희.
세계적인 플레이어 신영우의 친동생인 그녀는 미모만큼이나 출중한 연기 재능의 소유자였다. 최근 TV출현을 꺼려하고 있는 유라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울 것 같았다.
김장철은 장담했다.
오늘 찍은 CF가 전파를 타는 순간, 당대 최고의 톱스타만 모델로 기용해왔던 각 분야 최고의 회사들이 신세희에게 눈독을 들이게 될 거라고.
마침 유라의 활동이 뜸해진 것도 큰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과찬이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바로 가시게요? 광고주께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는데...”
“봉사활동이 있는 날이라서요.”
“아하! 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시고 다음에 꼭 다시 뵙기를 바랄게요!”
세희의 선행은 몇 년 전부터 화제가 되어왔다.
자신이 Satisfy에서 성녀가 된 것은 마치 운명이었다는 듯이,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온갖 선행을 베풀어왔다. 기부금액은 해가 갈수록 높아졌고 봉사활동도 꾸준했다. 심지어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찾아가고 있는 보육원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큰 화제가 됐었다.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눈치다.
“훌륭해. 정말로 엑셀런트!”
미모, 능력, 인지도, 성품.
모든 면에서 완벽한 새로운 스타의 탄생.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세상에 내보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는 김장철 감독이었다.
***
“세희야!”
스튜디오에서 나온 세희를 그녀의 오랜 친구 예림이 반겨주었다. 주정차 단속 구역에 당당하게 정차시켜놓은 슈퍼카가 눈에 띈다.
성녀의 기사로 활동하며 모은 돈을 모조리 쏟아부어 산 차...
예림을 볼 때마다 옛날의 오빠가 떠오르는 세희였다.
“설마 또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
느긋한 예림을 재촉해 차에 올라탄 세희가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요즘 예림이 봉사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벌써 3주 연속. 신기록이다. 지구에 점차 가까워진다는 정체불명의 운석이 자꾸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다는 둥, 요즘 세상이 흉흉한데 이러다가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씨익, 예림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호윤 오빠 말이야.”
“호윤...?”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는 세희에게 예림이 덧붙였다.
“보육원에서 같이 봉사하는 오빠 있잖아.”
“아...”
봉사자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특히 세희가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봉사시설엔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세희가 그런 곳을 찾아다녀서가 아니다. 그녀가 방문하는 시설마다 남자 봉사자가 우르르 쫓아올 뿐이다. 정보가 너무 쉽게 새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툰 오빠의 신경이 날카롭다. 지금도 뒤에서 바이크로 바짝 쫓아오고 있지 않나. 가죽재킷 속에 볼록 튀어나온 저거... 설마 총은 아니겠지.
“그 오빠, 3개월 정도만 운동시켜서 체지방 줄이고 안경 벗기면 핵미남 될 거야. 내 미남 탐지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어.”
“그래서 요즘 열심히 봉사활동에 쫓아오는 거구나.”
“응, 나한테 홀딱 반하게 만들어야지. 그럼 알아서 잘 보이려고 운동도 시작하고 꾸미려고 노력할 테니까.”
“마음은 알겠는데 치마가 너무 짧아. 청소하고 애들하고 놀아줄 때 곤란할 거야.”
“얘도 참~ 그래서 짧게 입은 거지.”
“....”
“너무 걱정은 마. 이 모든 건 결국 영우 오빠랑 사귀기 전의 예행연습 같은 거니까. 난 일편단심 민들레잖니.”
“이제 그만 갈대가 돼줘.”
“싫은~데?”
신호에 걸린 사이 립을 덧바르는 예림이었다. 색을 보니 오늘 아주 승부를 볼 작정인 듯하다. 하지만 입술보단 자꾸 허벅지로 시선이 간다.
원장님이 살포시 트레이닝복을 안겨주시겠구나...
예림의 승부가 예상보다 큰 고비를 맞이할 것임을 예상한 세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부아아아아앙!!
마침 신호가 녹색불로 바뀌자 예림이 엑셀을 꾸욱~ 밟았다.
값비싼 이태리제 슈퍼카의 배기음을 강남 한복판에서 자랑하고 싶은 눈치다.
덕분에 상체가 뒤로 크게 밀린 세희가 커다란 피로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일정이 바빴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된 상태다.
하지만 세희는 내색하지 않았다.
Satisfy에만 집중하는 오빠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욱 더 부지런하고 좋은 사람이 될 것이다. 자신의 활동은 실제로 오빠의 대외 이미지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
‘드디어 이걸 쓸 날이 왔군.’
월야철.
지금은 없는 고대 거인족의 왕국에서 자생했던 광물이다.
상대방의 격을 일시적으로 차단시킨다.
새로운 신검의 재료로 손색이 없다.
‘혈검은 주무기로 다루는 게 불가능해.’
해각과 싸우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혈검은 유지력이 너무 떨어진다. 그나마 마력사출기 덕분에 실전성은 생겼지만 혈검만 믿고 설치는 건 불가능했다.
강한 무기가 더 필요하다.
물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새로운 신검을 만들기 위해선 2개의 확률을 뚫어야했다.
우선 월야철 단련 성공 확률.
같은 단련이라도 결과는 다른 법이다. 일반적인 단련은 대상 광물을 단지 좀 더 단단하게 만들뿐이지만 궁극의 단련은 대상 광물의 잠재력을 최대까지 이끌어낸다.
대표적인 예시가 강화된 사신의 숨결이다.
그리드가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노리기 위해선 반드시 최고의 월야철을 만들어야했는데 이 결과에 확률이 적용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설령 최고의 월야철을 만든다고 해도 그 월야철을 이용해서 무기를 만들 때 또 한 번 확률을 뚫어야했다.
최고의 재료를 쓴다고 해서 무조건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
자칫 재수가 없으면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2개의 확률을 뚫어야한다는 것이다.
“제물은 충분히 바쳤다.”
그리드가 일부러 큰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음흉하게 모니터링하고 있을 운영자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전해지길 바라서였다.
“만약 이번에도 조작질을 한다면... 그때는 이 심각한 확률 조작 문제를 공론화하는 수밖에...”
그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법규를 준수하는 S.A그룹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는.
확률 조작? 계정마다 다르게 적용되는 확률?
21세기 초반에 만연했던 쓰레기 게임사도 아니고, 시대를 선도하는 S.A그룹은 그런 저열한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
그리드를 모니터링 중인 운영진은 그리드가 제발 대박 아이템을 만들어내길 기도했다. 괜한 누명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불길했다.
그들이 보아온 그리드는 충분한 불행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행운을 거머쥐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건 시스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리드라는 개인이 타고난 숙명 같은 것이었다.
‘아직 제물이 부족한 것 같은데.’
운영진이 생각하는 순간.
따앙!!
그리드가 망치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