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14화
“얼마...? 수리비가 뭐? 얼마라고?”
“2,388만 골드입니다. 국내 업자들에게 발주해서 시세보다 싸게 계약했습니다. 노동자들이 흔쾌히 일정을 비워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리드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삼제 해각을 비롯한 추종자들을 잡아 대량의 비급서를 얻었고 지발과 지크프렉터가 아군으로 합류했으니 잠시나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바로 이럴 때 연회를 베푸는 거구나.
기쁜 마음으로 깨달은 그리드가 여태껏 흥미 없던 시스템에 관심을 품었다.
왕의 연회.
최대 300명의 신하를 초청해 술과 음식을 베푸는 행사다. 초대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높이고 신하 개개인의 서사를 파고들 수 있다.
단, 돈이 많이 들어간다.
진즉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굳이 행사를 열 필요가 없는 그리드 입장에선 전혀 쓸모없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연회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더니 냉큼 달려온 행정관 라빗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다.
“2,388만 골드...”
어제 무너진 바이란 성의 복원 비용이란다.
마력사출기를 만드느라 지출했던 금액의 3배를 훌쩍 뛰어넘는 거액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24채의 상가 건물이 훼손됐습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건물이 갑자기 무언가에 베여 잘려나갔다고 하는군요.”
“....”
바르바토스의 시야를 써서 시가지의 추종자들을 베었을 때를 떠올려본다.
확실히... 계속 검기를 날리다보니 몇 개의 건물을 조금 망가뜨렸었다. 귀퉁이가 싹둑 잘려나간 건물이 있었고, 천장이 통째로 뜯겨나간 건물이 있는가하면 창문이 와장창 깨진 건물도 있다. 반으로 쪼개진 건물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무패왕의 검술 중엔 오직 ‘적’만 베는 스킬도 있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적을 벤 후에 발생하는 후폭풍까지 책임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사상자가 없다는 겁니다.”
알고 있다.
사람들의 대피가 끝난 구역까지 진입한 추종자들만 골라잡았던 거니까.
“음... 추종자들이 강하긴 강해. 검기로 건물을 잘라낼 정도라니, 과연 대단하단 말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 증언을 들었을 때는 전하의 소행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입니다.”
“나는 백성들의 터전을 부서 먹는 못돼먹은 왕이 아닐세.”
“자주 부수시지 않았습니까?”
“...뭐가 어찌됐든 상인들에게도 복구비를 지원해줘야겠군. 섭섭지 않게 챙겨주도록 하게.”
“예, 전하. 또한 레이단 연금술 시설에 85만 골드의 대금을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긴 또 왜? 예산을 벌써 다 깎아먹었나?”
“아니요. 전하의 사도분들과 기사분들께서 소모품을 새로 지급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전투에서 전부 소진하신 것 같더군요. 게다가 지크프렉터 공과 지발 경에게도 같은 물품을 지급해야하기 때문에...”
“....”
레이드는 돈이 된다.
그래서 템빨국은 레이드 팀까지 따로 만들어서 템빨국 전역의 레이드를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드도 레이드 나름이다. 목표물의 수준이 매우 높을 경우엔 오히려 적자를 보는 상황이 생겼다.
해각을 예로 들어보자.
해각은 강했다. 되도록 피해 없이 놈을 레이드하기 위해선 당연히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했고,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생산되는 최상급 버프 비약과 회복 비약을 지속적으로 소비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브라함, 피아로, 메르세데스, 사리엘, 페이커, 카심 그리고 그리드가 이번 레이드에서 소모한 약값만 한화로 수억 원어치라는 뜻이다.
드라시온 레이드 당시의 제국이 입은 손실이 수억 ‘골드’였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턱없이 싸게 먹힌 거긴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군.’
보통의 국가는 템빨국과 다르다.
심지어 사하란 제국조차도 대악마를 막기 위해선 대량의 군대를 투입하고, 잃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부분에서 천문학적인 재정 손실이 발생했다. 레이드할 때 얻는 이익보다 손해가 훨씬 더 컸다. 심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템빨국은 병력의 손실을 각오했던 경우가 적지만 앞으론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드와 사도들, 템빨단원들과 기사들.
그들만으로도 감당 못할 강적을 레이드해야하는 상황이 초래할 경우 레이드는 독이 된다. 레이드 한 번 치를 때마다 국가 예산이 갈려나갈 것이다. 벌써부터 두렵다.
‘우리가 비약을 소모하는 만큼 비약 제조에 쓰이는 재료값도 폭등 중이고... 이건 진짜 미친 게임이다.’
S.A그룹은 플레이어의 주머니에 돈이 채워져 있는 꼴을 못 본다. 인플레이션을 핑계로 예전부터 그랬다.
탄식을 자아낸 그리드가 결재서류에 인장을 찍었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2,500만 골드가 사라졌다.
***
“제라툴의 상징물을 모조리 찾아 없애.”
지발과의 면담이 끝난 후.
2,500만 골드를 잃어 분노에 휩싸인 그리드가 자신을 쫓아 나온 라우엘에게 명령했다.
“이미 국내는 템빨그림자단이 수색하고 있습니다. 템빨단 전체와 군부에 지시해서 진행 속도를 높일까요?”
“응? 언제부터 시작했는데?”
“보름 전부터 페이커 님이 시행하신 작전입니다.”
보름 전이면 지크프렉터가 막 바이란에 도착했을 무렵이다.
페이커는 이미 그때부터 추종자들의 추적을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은 달랐지만, 그리드는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유능하잖아...”
감탄한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요즘 일부 출판사에서 자서전을 출간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만약 제안을 수락하게 되면 자서전 제목은 ‘템빨왕~내 동료들이 너무 유능해서 한가한 건에 대해서~’쯤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책 제목이 길어야 어그로가 잘 끌리는 것 같았으니까.
“인원을 보충하고 수색 범위는 대륙 전역으로 넓히자.”
무신 제라툴이 다른 신들과 비교해서 위협적인 이유는 인계에 직접 개입한다는 점에 있다.
무신의 사도를 자처하는 추종자들은 진짜 사도인 천사들과 비교해서 약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드 입장에서의 이야기다. 랭커급 플레이어가 아닌 이상에야 추종자를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가 없으니 그들의 활동 영역을 최대한 좁히고 싶었다.
“현재 시점에서 수색 범위를 넓히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선 현재 저희는 무신의 상징물을 특정해내지 못합니다. 저희가 직접 만든 전하의 상징물과 헥세타이아 신의 상징물, 그리고 예로부터 유명했던 레베카 신의 상징물을 제외한 다른 상징물들은 정확히 어떤 신을 숭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지 파악이 불가능하죠.”
“그림자단이 무신의 상징물들을 부수고 있다며?”
“정확히는 무신이 아니라 템빨신, 헥세타이아 신, 레베카 여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의 상징물들을 모조리 부수고 다니는 겁니다.”
“음...”
마음에 든다.
사실 당연히 밟아야할 절차이기도 했다.
명목상이나마 템빨국은 신의 나라다. 템빨신과 템빨신이 인정하는 헥세타이아 신을 제외한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행위는 없는 편이 좋았다. 레베카교 때문에라도 레베카 여신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무신의 위험성을 설파하고, 다른 국가들이 그에 호응해준다고 해봤자 무신의 상징물을 특정해내지 못하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군.”
“네, 자칫하다 다른 신들의 상징물까지 건드리게 될 텐데 이때 큰 반발이 발생하겠죠. 외교 문제로 번질 겁니다.”
타국의 신앙에 개입하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불가능하다.
납득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국내를 철저히 수색해.”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비급함은 언제 열어보실 겁니까?”
템빨단원들의 관심이 온통 비급함에 쏠려있었다.
그리드가 이번 전투에서 확보한 비급함은 무려 23개.
그중 1개는 레전드리, 2개는 유니크, 에픽이 6개에 레어가 14개다.
과연 어떤 스킬이 나올까.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그리드가 대답했다.
“지금 당장.”
***
그리드의 집무실은 화려하지 않지만 넓다. 웅장하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륙에서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가 됐으니 구색을 갖춰야한다는 이유로 라우엘이 캐를을 시켜서 또 한 번 증축한 것이다.
집무실에 있는 시간이 한 달에 나흘 정도밖에 안 되는 그리드 입장에선 쓸데없는 지출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구석마다 산처럼 쌓인 서류뭉치가 증거다.
빌어먹을, 일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내정은 라우엘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호소를 들어주고 주간 퀘스트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그리드의 몫이었다.
‘로드한테 빨리 일을 가르쳐야겠어.’
로드가 가져온 푸른 오리하르콘을 뿌듯하게 어루만지는 그리드에게 지발이 놀라 되물었다.
“진짜? 나한테 주겠다고?”
탁자에 쌓아놓은 23개의 비급함.
여기서 나오는 비급 중 하나를 지발에게 주겠다고 그리드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천명했다.
그리드는 새로운 비급을 배울 생각이 없다. 현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의 상위호환 격인 스킬이 나온다면 또 모를까, 그리드는 새로운 스킬에 딱히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충분히 많은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고, 서사시 보상으로 얻은 스킬 합성 권한을 2개나 킵해놓고 있었다.
앞날을 생각하면 본인보다 동료들에게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그리드는 이번에 얻은 비급의 습득권을 해각 레이드에 참여했던 인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중 최우선 순위가 바로 지발이다.
“지발 네가 없었으면 지크프렉터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내 사자가 될 일도 없었을 거고 칠악성 에피소드는 더럽게 꼬였겠지. 난 네게 감사하고 있어. 그래서 선물을 주고 싶은 거고.”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자면, 일종의 전관예우다.
전 통합랭킹 2위였던 실력자가 길드에 가입해줬으니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선물을 주고 싶었다.
반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마장기 레이더스의 주인이기도 한 지발은 앞으로 창설될 템빨마장기단의 단장이 되어야할 운명이다.(아직 지발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템빨단원들은 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맙군...”
전투에서 활약하지도 못한 내게 너무 선심 쓰는 거 아니냐고, 몇 번이나 거부하던 지발이 끝내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7대 길드의 수장이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내가 그리드처럼 베풀 줄 알았다면 연합이 와해될 가능성도 낮아졌겠지...’
7대 길드에 어떤 집착이 남은 건 아니다.
다만 지발은 그리드가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는지 깨달았을 뿐이다. 본받을 대상을 찾은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비급 선택권은 지발과 사자들에게 최우선으로 줄 거야. 그 다음이 내 기사들, 그 다음은 하이랭커급 단원이야. 이번에 한정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얻게 될 비급 선택권도 사자들과 기사들에게 먼저 줄 거고. 물론 예외는 있어. 이번 지발의 경우처럼 활약도가 높은 사람은 당연히 먼저 챙겨줄 거야. 이의 없지?”
“응.”
“없다.”
십공신 모두가 동의하고 결정한 일이다.
그리드의 사자들과 기사들이 뛰어난 잠재력을 지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템빨단원들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최우선적으로 성장시키는 게 모두에게 좋았다.
스윽. 스윽.
어떤 비급이 나올까.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물티슈를 꺼낸 그리드가 손을 닦기 시작했다.
의아해하는 지발에게 극검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갓리드에게 딱 하나 약점이 있거든.”
“약점?”
“똥손이라는 거다.”
“....”
그리드에게 약점이 있다니? 설령 약점이 있다고 해도 물티슈로 손을 닦는 행위랑 약점이 무슨 상관이지?
지발의 머릿속을 채우던 의문들이 똥손이라는 말 한 마디에 씻겨나간다.
“깐다.”
경건한 표정으로 손을 닦은 그리드가 비급함 하나를 손에 쥐었다.
레어 등급의 비급함이었다.
맛있는 건 아껴먹는 성격 같다.
지발이 그리드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동안 그리드가 비급함을 열었다.
나온 스킬은 바위 굴리기.
커다란 물체를 근력 수치와 관계없이 움직여 굴릴 수 있다고 한다. 쿨타임은 1시간.
“...나쁘지 않군.”
다들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라우엘도 동의해줬다.
“쿨타임이 너무 긴게 아쉽기는 하지만, 막힌 길이 자주 나오는 특수 던전이나 전쟁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겠네요.”
“그렇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다음 비급함을 열었다.
이번에 나온 스킬은 무인의 마음가짐.
스킬 숙련도가 오르는 속도를 1퍼센트 상승시켜주는 패시브 스킬이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없는 영구적인 효과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비록 수치는 낮아도 좋은 스킬임은 분명했다.
근데 수치가 낮아도 너무 낮은 느낌이다.
없는 것보단 낫다. 딱 그 정도의 스킬이랄까.
“...이건 엄청 좋군.”
다들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라우엘도 침묵했다. 그러자 어색하게 웃은 레가스가 동의해주었다.
“좋네요. 단련할 맛이 나겠어요.”
“....”
이후 그리드는 남아있는 레어 등급의 비급함을 전부 개봉했다.
결과는 전부 꽝.
있어서 나쁠 건 없지만 딱히 좋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레어 등급 스킬에서 성능을 기대하기엔, 애초에 그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처음부터 레어 등급 비급함엔 별 기대가 없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지.”
반트너가 말하는 순간.
마침 또 다시 손을 닦은 그리드가 에픽 등급 비급함을 개봉했다.
결과는 꽝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잠시 입을 닫고 있던 그리드가 갑자기 비급함 하나를 지발에게 넘겨주었다.
“새로운 동료의 운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은데, 어때? 한 번 열어볼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비급함의 가치는 너무 높다. 하물며 에픽 등급 이상의 비급함에 괜히 손을 댔다가 꽝을 뽑으면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부담스러워 거절하려던 지발이 문득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부가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중 몇 명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발이 눈치 챘다.
‘이거 설마 덤터기 씌우는 건가?’
내가 꽝을 뽑는 순간, 그리드가 뽑았던 꽝들은 다 잊혀지고 비난의 화살이 내게 집중되는 방식인가...?
“응? 지발, 어서 열어봐.”
“....”
지발은 싱글벙글 웃는 그리드로부터 거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 같지가 않았다.
“그럼 한 번만...”
천하의 그리드가 소인배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지발이 비급함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화려한 빛이 폭사하며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감탄한 템빨단원들이 환호하는 와중에 그리드가 중얼거렸다.
“내가 제물이 된 덕분이군...”
똥손이라는 낙인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