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13화
“드디어 끝났나...”
전투 중에 가장 큰 정신력을 소비한 사람은 의외로 지발이었다.
저거 뒤치기 각인데, 나서도 되나? 멋진 협공이다. 나도 끼어도 되나? 저쪽에 벽처럼 쌓인 철골이 메르세데스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 같은데, 치워도 되나? 페이커가 위험해 보인다. 강운을 써야 하나? 마장기를 꺼낼까? 자칫 성을 부서 먹으면 아군을 오히려 훼방 놓는 거 아닌가? 등등.
전투 내내 지발은 그 어떤 판단도 섣불리 내리지 못했다. 적과 아군의 수준이 자신보다 한 차원 위였기 때문이다.
지발은 본인의 판단에 확신이 없었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자칫 적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아군을 돕겠다고 나섰다가 역으로 곤경에 빠뜨릴까봐 경직됐다.
물론 가만히 구경만 하진 않았다.
해각이 드러낸 빈틈이 함정이 아닌 진짜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마다 아군의 공격에 힘을 보탰고, 아군의 행동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는 순간마다 즉시 달려가서 의도를 이루게끔 도와줬다.
“수고했다.”
해각 레이드가 끝난 후.
동료들에게 지크프렉터를 소개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지발 곁으로 페이커가 다가왔다.
“덕분에 2번이나 불사를 아꼈군.”
페이커가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는 성격이었나?
다소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지발이 한숨 쉬었다.
“전투가 뭐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라서 구경만 하고 있던 놈한테 감사는 무슨.”
“아니, 넌 충분히 잘했다.”
페이커가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 전설의 기사 메르세데스, 전설의 농부 피아로, 대천사 사리엘, 칠악성 지크프렉터와 그림자의 왕 카심, 그리고 템빨신 그리드...
이 시대 최고의 강자들이다. 어지간한 실력자도 그들과 합을 맞추는 일은 불가능했다. 방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한데 지발은 몇 번이나 그들에게 도움을 줬다. 확실하게 보조했다. 페이커가 체감했을 땐 지발의 협조성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났고 활약도도 높았다. 과연 7대 길드를 이끌었던, 그리고 미국이라는 대국을 짊어진 영웅다웠다.
“잘한 게 전혀 없는데...”
지발이 마뜩찮단 반응을 보였다.
지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시절이 있는 지발의 입장에선 자신이 주역이 아닌 조역에 머물 수밖에 없던 전투가 적응되지 않았다.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늘 아쉬웠다. 칭찬을 들어봤자 잘한 일보단 못한 일들이 기억났다.
발목을 붙잡힌 카심을 구출하려고 달려가다가 해각의 장풍에 얻어맞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하필 철골 사이에 처박혀 몇 초를 꼼짝도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브라함이 중력 마법을 써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고작 철골 치우겠답시고 레이더스를 소환하거나 강운을 소모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쪽팔려서 얼굴을 붉히는 지발의 곁으로 기사와 사자들을 동원한 그리드가 다가왔다.
“이놈은 왜 죽상이지?”
브라함이 눈살을 찌푸린다. 잘한 것도 없는 놈이 표정 관리조차 못한다고 핀잔을 주는 듯했다.
소위 말하는 X밥 취급... 급기야 이런 취급을 받는 날이 오는구나.
지발의 표정이 더욱 더 어두워지는 그때였다.
“아까는 멋졌네.”
피아로.
과거 7대 길드의 레이단 침공을 막아내고 논밭의 악마라고 불렸던 그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내가 씨앗을 뿌려놓은 자리로 해각을 유인했을 때가 특히 큰 도움이 됐다네.”
카심이 말을 덧붙였다.
“틈틈이 지물을 움직여서 그림자의 영역을 확대시켜주더군. 덕분에 조금이나마 더 해각을 귀찮게 만들 수 있었소.”
두 손을 말아 쥔 사리엘은 눈까지 반짝이며 소리친다.
“계속 지켜봤어요! 멋졌어요!”
“...?”
지발의 표정이 애매모호해졌다. 몇 번 안 되는 사소한 활약을 일일이 기억하고 칭찬해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보다 경계했다.
필요 이상의 친절은 의심해야하는 법이므로.
찝찝함에 휩싸인 지발이 이내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드가 시켰군.’
내가 염치없이 해각이 드롭한 아이템을 분배해달라고 나대기 전에 대충 어르고 달래서 분위기를 주도할 계획 같다.
그리드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깨닫는 지발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커다란 손.
절로 존경심이 생기는 손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자 그리드가 활짝 웃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 앞으로도 같이 잘 해보자.”
“....”
지발이 드디어 상황을 제대로 분석했다.
이들은 나를 동료로 여기고 환영해주는 것이다.
동료... 동료라.
지발이 지크프렉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의 사자가 된 지크프렉터.
앞으로 템빨단의 비호를 받게 될 그의 곁에 내가 굳이 남아있을 필요가 있을까?
없다.
이젠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그를 지켜줄 것이고 나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그의 편의를 봐줄 것이다.
나는 이미 할 만큼 했다.
지크프렉터가 여기까지 올 수 있게끔 도왔고, 그 대가로 많은 보상을 손에 넣어왔다.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 지크프렉터에겐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어.’
지발이 문득 그리드의 손을 보았다. 여전히 악수를 내밀고 있었다. 지크프렉터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발.”
“....”
지발의 겜생(game生)은 기구하다.
남다른 재능으로 최초의 랭커 중 한 명이 되고 만인의 기대를 받았지만 크라우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만년 2등을 벗어나지 못했다. MMORPG는 개인이 아무리 강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지론으로 거대 연합을 만들었지만 소수의 템빨단에게 무참히 박살나 세력을 잃었다.
늘 최고에 가깝게 다가가지만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운명. 그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지발은 고통 속에 숙고했다. 자신에게 조직을 이끌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속세를 떠나 개인으로 활동했다. 재기를 꿈꾸며 황실에 들어갔고 운 좋게 에단 황자의 눈에 띄었다. 한데 빌어먹을 에단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힘을 비축하기도 전에 제국과 척을 지고 지크프렉터와 함께하게 됐다. 그리고 지크프렉터의 영향으로 인해서 신의 사도들과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서, 지발은 진로를 자주 고민해왔다.
일단은 지크프렉터에게 얻은, 혹은 얻을 은혜(각종 스킬과 퀘스트)가 있어 지크프렉터를 따랐고, 따르며 함께하다보니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어 그를 응원하게 됐다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를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선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은 신들이 인류를 기만하고 있으며 최고신이라는 미친년은 주기적으로 세계를 멸망시킨다고 하는데 뭐, 어쩌라고?
어차피 게임이다.
심지어 전 세계 모두가 즐기는 게임.
S.A그룹은 이 게임에 엔딩이 생기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주가가 박살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상 영원히 지속하고 싶을 것이다.
지크프렉터가 말하는 세계의 멸망이 언젠간 도래할지언정 그것은 수백, 수천 년 후에 벌어질 일이다. S.A그룹이 Satisfy의 서비스를 종료할 생각이 아닌 이상에야 플레이어는 세계의 멸망을 목격할 수 없다.
다만, 세계의 멸망을 준비하기 위해 차츰 활동을 시작하는 신의 사도들과 싸우며 온갖 시련을 맛보긴 하겠지만... 그건 지발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감당 못할 시련은 피하면 그만이다.
애초에 자신은 그리드나 크라우젤이 아니다. 혼자서 모두를 압도할 정도의 무력을 갖추지 못했고 대륙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권력도 없었다.
“지발.”
이제 슬슬 편해지고 싶다.
힘든 싸움과 의무는 다른 잘난 녀석들에게 맡기고 나는 적당히 게임을 즐기고 싶다. 그동안 열심히 해오지 않았나. 앞으론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다. 빌어먹을 스트레스 좀 그만 받고 싶다. 무력감에 짓눌리고 싶지 않다.
“지발, 나에겐 그대가 필요하다.”
“....”
지크프렉터의 음성이 지발의 상념을 깨웠다.
정신을 차린 지발은 여전히 자신에게 내밀어져 있는 그리드의 손과 그 곁에 나란히 선 지크프렉터를 보았다.
세계의 평화를 등진 이들... 보기 좋은 그림이다.
“그랜드마스터, 저는 이만 쉬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싸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그리드의 손을 외면한 지발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해각과 템빨단의 전투가 마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지발은 이제 끝내고 싶었다.
힘, 명예.
그딴 것에 더 이상 집착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비우고 게임을 편하게 즐기고 싶었다.
물론 도태되겠다는 건 아니다.
재능과 습관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다.
목표치를 낮춘 지발은 전보다 조금 느슨해질지언정 성장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가끔 대악마가 지상을 침공하면 달려가 도움을 줄 정도의 수준은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드, 그랜드마스터를 잘 부탁한다. 무저갱에 갇힌 그랜드마스터의 육신과 칠선인의 영혼을 해방시켜주길 바라마.”
지발은 끝내 그리드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나는 그에게 지크프렉터가 말했다.
“나는 부하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다.”
지발은 무시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세계를 지키기 위한 성전을 함께할 동지를 원한다.”
지발의 걸음이 빨라졌다.
“전쟁에서 네게 안심하고 등을 맡기고 싶다.”
지발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곁에 있는 너를 보고 안심하고 싶다. 여태껏 그랬듯이... 함께해다오.”
“....”
우뚝.
지발의 걸음이 드디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왜 제게 집착하시는 겁니까? 저는 당신이 의지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 아닌데요.”
‘그럴 땐 게이냐고 물어봤어야지.’
그리드가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무거운 분위기는 다소 가벼운 언행으로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여태껏 수많은 NPC의 호감도를 올려온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비록 실제 인간관계는 젬병일지언정 Satisfy에선 인싸인 그리드다웠다.
“사람을 신뢰하는 척도는 무력이 아니다. 나는 그대의 강건한 마음과 신의를 믿는다.”
나태의 저주가 발작하고 깊은 잠에 빠진 지크프렉터를 버릴 기회, 지발에겐 많았다.
하지만 끝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으론 감당하기 힘든 추종자들의 추적을 받으며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지언정.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빠져 자포자기하고 싶었을지언정 마음을 바로잡고 지크프렉터를 지켰다.
신의를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지크프렉터가 지키려고 하는 이 세계엔 공교롭게도 많지 않다.
“나는 그대에게 어떤 의무나 임무를 부여할 생각이 없다. 다만 벗으로서 함께 해주길 바랄뿐이다. ‘지크프렉터’에게 벗이란 그대밖에 없으니 잃고 싶지 않아.”
“....”
지발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향했다.
그리드는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미친, 누가 랭킹 1위 아니랄까봐 무서울 정도의 집념이다.
그리드가 빙그레 웃었다.
“친구, 템빨단은 너를 성대하게 환영할 생각이야.”
“...토반 밑에서 신입 교육 코스를 밟아야 되나?”
“천하의 지발님은 당연히 바로 1군이지. 네가 다스릴 영지도 이미 물색해놨어.”
“영지... 그딴 귀찮은 건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빡겜만이 살 길이다. 그랜드마스터를 쫓아다니며 칠악성 에피소드에 편승하고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수밖에.
결심한 지발이 드디어 그리드의 손을 마주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어서와.”
전 통합랭킹 2위, 현 랭킹 비공개.
잠재적 레전드리(혹은 고대) 클래스 <고대의 라이더>전직자이자 마장기 <레이더스>의 주인.
지발 그레이븐.
그가 오늘, 칠악성 지크프렉터와 함께 템빨단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