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12화
해각은 자신에게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평생토록 무예를 연마해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될 때까지, 설령 영원토록 스스로를 혹사시킬지언정 그는 오로지 정진할 각오였다.
바로 그게 무신의 추종자다.
뚜드득, 꽝!
꽈득, 퍼엉!
해각의 신체 모든 부위가 무기로 활용됐다. 팔꿈치는 칼날이 되었고 수도는 창으로 변했다. 머리를 철퇴처럼 떨어뜨려 적을 부순 뒤 휘두르는 다리는 채찍이었으며 표창을 후려치는 주먹은 망치였다.
하지만 페이커와 카심은 그림자를 무기와 병사로 다룬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자신의 육신을 무기로 빚을지언정 그림자의 해일로 집어삼키면 그만이었다.
“비겁하고 저열하구나!”
무너진 천장의 틈새에 드리워있던 그림자 폭격을 피해낸 해각이 비난한다. 무인인 그는 어둠에 숨어 기척을 지우고 암살을 기도하는 어쌔신들의 방식을 싸움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콰앙-!
지형지물에 구애받지 않는 경공술이 변칙을 일으키고 가속을 중첩시킨다. 은밀하게 덮쳐오는 그림자 무기들과 병사들을 무반동의 공격으로 말살시킨 그가 허리를 비틀어 회전했다.
쩌엉!!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타난 페이커의 단도가 해각의 단단한 어깨와 충돌했다. 해각의 어깨에서 선혈이 튀어 올랐지만 상처는 깊지 않다. 반면 단도를 휘두른 페이커의 오른쪽 손목은 박살이 났다.
‘강하다.’
페이커의 감상엔 일체의 과장이 없었다.
해각은 강하다. 이정이 삼제 중 최약체였다는 그의 주장은 아무래도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드도 공감했다.
‘렙빨 같긴 하다만...’
팔짱끼고 선 그리드는 다만 조용히 전투를 지켜봤다.
그가 기사들을 소집한 이유는 해각과 추종자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혼자서는 지크프렉터를 지킬 수 없을 거라는 의심의 발로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기사들의 성장을 기대할 뿐이다.
푹!
다시금 그림자로 숨어드는 페이커를 붙잡으려던 해각이 카심의 단검에 등을 찔렸다. 정확히 척추를 노린 공격이었지만 해각은 멀쩡했다. 호신강기를 꿰뚫는 대가로 위력이 반감된 카심의 단도는 단단하게 수축된 해각의 근육을 파고들지 못했다.
쩌엉!!
해각의 팔꿈치가 카심의 안면을 함몰시켰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카심의 발목을 붙잡아 그대로 땅에 매치려던 해각이 피아로가 뿌린 씨앗들의 기척을 읽고 장풍을 쏴 날렸다.
맹수처럼 날뛰는 놈의 기세는 그리드를 전율시킬 정도로 굉장했지만 불꽃처럼 금방 사그라졌다.
지크프렉터의 룬어가 붙잡은 해각의 오른 팔을 은빛 오러에 휩싸인 메르세데스의 검이 베어버린 것이다.
혜안의 주인인 메르세데스는 상대방의 약점을 간파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녀의 공격은 해각의 호신강기가 잠시 약해진 틈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잘려나간 해각의 팔이 허공을 부유한다. 덕분에 자유를 되찾은 카심이 숨어들 그림자를 찾아 시선을 돌린다.
찰나의 시간이었다.
메르세데스가 휘둘렀던 검을 채 회수하기도 전이었다.
바로 그때.
쩌정! 쩌저저저저정!!
해각의 무반동 공격이 탄환처럼 연사됐다.
놀라 방패를 세운 메르세데스가 뒷걸음친다. 그리드가 만들어준 방패가 속절없이 우그러지는 광경은 해각의 강함을 재차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리드의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렙빨이 확실하군.’
공격력, 속도, 체력, 구사하는 기술의 종류와 깊이에 이르기까지.
해각은 다방면에서 이정보다 뛰어났지만 한 가지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건 바로 감각이다.
안대로 두 눈을 봉하면서까지 단련해온 이정의 감각은 적의 공격을 대부분 무력화시키는 회피력으로 직결됐던 반면 해각의 회피력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정보다 뛰어난 순발력을 지니고도 그렇다는 건 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덜 발달했다는 뜻이다.
‘안대를 벗었을 때 보여줬던 위압감도 이정의 것보다 못했지.’
봉했던 시야를 해방시켰을 때의 이정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다.
반면 해각은 안대 착용 전후의 기세 차이가 크지 않았다.
여러 근거를 토대로 그리드는 확신했다.
앞으로 몇 년 아니, 1년만 지났어도 이정이 해각보다 강해졌을 거라고.
물론 이정이 살아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가장 먼저 만난 삼제가 이정이었고, 이정을 죽일 수 있었던 건 결과적으로 행운이었던 셈이다.
스릉━
잠자코 해각을 지켜보던 그리드가 아련한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허공에 몇 차례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쏘아진 검기가 성으로 몰려오고 있는 무신의 추종자들을 베어 없앴다.
바르바토스의 시야와 무패왕의 검술의 결합.
그것은 이미 신의 권능에 가까웠다.
해각이 애타게 기다리는 지원을 봉쇄함과 동시에 그리드 자신에겐 대량의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를 선물하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그리드가 길드창에 다급히 말했다.
-지금 바이란에서 대기 중인 인원은 북쪽 상가 구역 통제해. 빨리! 거기 떨어져있는 비급 싹 다 주워놔!!
“...큭!”
그리드가 엄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동안 해각이 신음을 토했다.
자신을 창조한 신을 배반하고 그리드의 개가 된 주제에 여전히 머리 위에 빛의 링을 띄운 가증스러운 천사. 놈이 자신에게 창을 휘두르며 집요하게 달려들자 구역질이 치미는 해각이었다.
“타천사여! 악마보다 역겨운 흉물답게 염치가 없구나! 천상을 배반한 것으로 모자라 무신의 사도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냐!!”
드디어 죽음을 실감하는가.
평정심을 잃고 격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해각을 몰아붙이는 사리엘의 표정이 슬프다.
“천상의 신들은 오로지 천사만을 사도로 인정합니다. 당신들 추종자는 욕망을 저당 잡혀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흥!”
사리엘의 눈빛에 담긴 연민 따위의 감정을 엿본 해각이 콧방귀 뀌었다.
욕망을 저당 잡혀 이용당한다라.
그 사실을 모를 리 있겠는가.
상대방을 이용하는 건 해각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신에게 충성하고 숭배하는 이유는 단지 힘을 원해서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예를 섭렵한 무신 제라툴.
그로부터 비급을 얻을 때마다 해각은 강해지고 발전해왔다. 그러므로 섬기는 것이고, 끝내 인정받아 삼제의 칭호를 얻었다.
“무신이 날 이용하는 이유는 내 힘이 필요해서이며 나는 실제로 무신의 뜻을 대행하고 있다. 이런 내가 사도가 아니라면 뭐지? 나는 지상의 천사다. 천상에서 쫓겨난 너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강하다.”
해각의 등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시퍼런 핏줄을 드러내며 부풀어 오른 피부가 이내 폭발하며 두 쌍의 날개가 튀어나왔다.
알에서 갓 부화한 새의 깃털처럼 축축하게 젖은 날개의 상태를 보아 비행 효과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리드 일행은 극도로 경계했다.
4개의 날개가 돋아난 것으로 모자라 왼쪽 눈동자가 3개로 분열된 해각의 모습은 인간과 거리가 멀었다. 무표정하게 가라앉은 얼굴에서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이 소실됐다.
“저 날개는...”
해각의 몸속에서 튀어나온 날개. 해각의 신체 일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리드의 통찰력과 대장장이의 지식은 날개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리엘의 아름다운 얼굴에 더 큰 슬픔이 깃들었다.
“인간의 삶은 덧없이 짧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을 인정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아요. 그들에게 인간은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투쾅━!
해각이 지면을 박찼다. 3개로 분열된 눈동자를 맹렬하게 회전시켜 주변을 감시한 놈은 브라함과 지크프렉터가 쏘는 마법들을 순식간에 포착하고 회피했다. 그리고 사리엘에게 돌진했다.
쩌엉!!
사리엘의 몸이 해각의 발차기를 막아낸 창과 함께 통째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나마 멀쩡했던 천장을 꿰뚫고 하늘 높이 솟구친 그가 한 쌍의 날개를 펼쳐 추락을 모면하는 사이 해각은 성내의 그림자를 모조리 불사르고 있었다. 그의 날개가 찬란하고 새하얀 빛을 폭사시켜 주변을 환하게 밝힌 것이다. 그림자가 드리울 곳이 없었다.
강제로 은신이 풀린 페이커와 카심의 몸을 브라함의 실드가 감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실드 위로 해각의 주먹이 떨어졌다.
쩌어어엉!!
실드덕에 목숨을 부지한 페이커와 카심의 몸이 무너진 외벽 바깥으로 날아가 떨어진다. 해각은 뒤쫓지 않았다. 막 재생된 팔을 들어 피아로의 호미를 막은 뒤 전갈의 꼬리처럼 꺾은 다리로 반격했다.
투쾅!!
해각의 머리 뒤에서 뻗어진 발차기는 피아로 입장에서 완벽한 사각이었다. 공격을 허용한 그가 쓰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물론 속수무책으로 당할 리 없다. 절구가 떨어져 해각의 몸을 짓뭉갰다.
하지만 해각은 금세 재생했다.
“인간을 천사로 개조한 건가. 악취미군.”
천사의 특성은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해각에게 마법이 통하질 않자 쯧, 혀를 찬 브라함이 메르세데스의 칼과 방패에 강화술식을 더했다. 물체에 마력을 덧씌워 강화시키는 인챈트 마법이 아니다. 물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속성을 강화시켜 물체의 근본적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원소마법이었다.
이거라면 천사에게도 통한다.
대상 물체의 내구력을 크게 감소시킨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리드가 알아서 수리해주거나 새로 만들어줘야지.
서걱!!
메르세데스의 정제된 검술이 해각의 몸을 베고, 베고, 또 베었다.
한 번의 호흡마다 여섯 번의 참격을 잇는 그녀의 동작이 뚝뚝 끊겨 보였다. 너무 빨라 동작의 흐름을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해각도 빠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메르세데스에게 반격하는 놈의 동작도 뚝뚝 끊겨 보였다.
‘안 되나?’
초월경은 그리드 본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발동하는 패시브다.
초월경이 발동하지 않아 메르세데스와 해각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지 못하게 된 그리드가 일말의 불안을 느꼈다.
메르세데스의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 반면 해각의 상처는 생기는 즉시 회복됐으니 전황이 나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개입해야하는가.
고민하던 그리드가 다시금 바르바토스의 시야를 펼쳤다.
이곳에 달려오고 있는 추종자가 더 있는지 우선 파악하고 판단할 심산이었다.
“...?”
그리드가 움찔 놀랐다. 새로운 무신의 추종자들이 바이란에 진입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놈이 등에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눈과 코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비틀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금방 죽을 것 같았다.
그리드의 뇌리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천사가 인계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숫자를 셋으로 맞춰 삼위일체를 이뤄야한다.
그리고 현재 이곳에 있는 천사는 해각과 죽어가는 추종자, 마지막 한 명은...
꽈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메르세데스와 해각을 동시에 덮친 그 기둥은 메르세데스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킨 반면 해각의 몸을 넝마로 만들었다.
뚜둑, 뚝.
부러진 목뼈를 양손으로 잡아 돌린 해각의 시선이 빛의 기둥과 함께 강림한 존재를 쫓는다.
사리엘.
천사 군단을 이끌었던 일곱 대천사 중 하나.
해각은 그를 간과했다.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본디 대천사란 범접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 해각에게 있어서 대천사란 미지였고, 그러므로 경계하지 못했다.
대가는 컸다.
푸욱━!
백열하는 사리엘의 창이 해각의 가슴을 꿰뚫고 갈랐다.
삼위일체를 이룬 사리엘의 무력은 현장의 모두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삼제 해각을 해치웠습니다!]
[레벨이 2 올랐습니다.]
[당신의 기사 ‘카심’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자 ‘피아로’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자 ‘브라함’의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자 ‘지크프렉터’의 레벨이 2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자 ‘메르세데스’의 레벨이 4 올랐습니다.]
[당신의 사자 ‘사리엘’의 레벨이 10 올랐습니다.]
[<인공 날개의 파편>을 획득하였습니다.]
[<무신의 비급함(레전드리)>을 획득하였습니다.]
[<무신의 비급함(유니크)>을 2개 획득하였습니다.]
“....”
경험치 보상은 활약한 정도에 따라서 다르다.
피아로와 브라함에게 향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게슴츠레했다.
피아로가 급히 설명했다.
“메르세데스에게 발전할 기회를 주고 싶었나이다.”
브라함은 당당했다.
“천사를 상대로 뭘 어쩌란 말이냐?”
“....”
헥세타이아를 구출하기 위한 성전에서 브라함은 활약할 수 있을까, 그리드는 진지하게 걱정했다.
물론 무의미한 근심일 수도 있다.
브라함이 뱀파이어의 힘을 되찾는 순간, 일개 천사 따위 마법 없이도 때려죽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