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09화 (1,299/1,794)

템빨 66권 - 10화

쿠우웅!!

푸른빛을 흩뿌리는 대형 골렘이 지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육중한 어깨를 앞세워 인간들의 진형을 쉽게 돌파하고, 난입해 흐트러뜨렸다. 하지만 놈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인간들이 손에 쥔 밧줄을 일제히 잡아당기자 골렘이 서있던 지면이 미끄러지면서 골렘이 뒤로 자빠진 것이다. 곧장 일어나지 못하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꼴이 뒤집어진 거북이 같다. 놈에게 온갖 스킬 폭격이 쏟아졌다.

“매끄러운 연계로군.”

“적이 나타날 장소를 미리 알고 함정을 설치했으니 가능한 연계죠. 딱히 칭찬할 건 없다고 봅니다.”

고작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하면서 함정까지 이용하는 템빨단원들을 지발이 탐탁찮게 보았다.

사실 레이드 팀의 평균적인 수준을 보면 칭찬해 마땅하긴 했다.

뒷짐 지고 서서 지휘 중인 토반을 제외한 참가자들은 대부분 200레벨 중반의 플레이어였으니,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하는 모습은 솔직히 제법이었다.

하지만 지발은 보름 전 ‘각성한’ 숲의 수호자를 혼자서 해치운 꼬맹이를 목격했다. 템빨단 3군쯤 되어 보이는 애송이들이 온갖 생쇼를 부려봤자 딱히 감흥이 안 생겼다.

“토반, 너쯤 되는 녀석이 왜 고작 이 정도 수준의 레이드를 관리하는 거냐? 2군한테 맡겨도 되는 거 아니야?”

“평소엔 3군이 관리하는데 오늘은 신입들 교육이 있는 날이라 내가 직접 참관했다.”

“...신입?”

쟤네 3군 아니었어?

‘인재 풀이 도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아니, 허풍이겠지. 외부인에게 길드 전력을 노출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잠자코 레이드를 지켜보던 지발이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에 그리드가 도착한 까닭이다.

‘이런 빌어먹을.’

그리드가 내 상관도 아닌데 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거냐...

“잘 지냈어?”

스스로를 책망하는 지발에게 다가온 그리드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불편할 정도로 친절한 태도였다.

“...잘 지내진 못했다.”

그리드가 내민 손을 얼떨결에 붙잡은 지발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국을 다녀온 후부터 지난 몇 달은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계속해서 감시망을 좁혀오는 무신의 추종자들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았던 적이 없다.

“미안하다. 뻔히 고생한 걸 알고도 잘 지냈냐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니었네. 정말로 고생 많았어.”

지발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리드가 지크프렉터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요. 한데 왜 성에서 지내시지 않고 이런 숲속에 계시는 겁니까?”

지발 일행이 지난 보름 동안 바이란 외곽의 숲에서 지내왔다는 이야길 접한 그리드는 황당했다. 이곳이 뭐 훌륭한 사냥터라면 또 모를까, 템빨단의 편의를 거부하면서까지 머문 장소가 고작 숲의 수호자 리스폰 위치라니, 굳이 왜?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마나의 조언이 있었다.”

‘마나의 조언?’

고대의 마법은 마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한 건가?

지크프렉터가 룬어로 썼던 고대의 마법들을 떠올려보는 그리드에게 지크프렉터가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대가 아들에게 무신의 성상들을 파괴해놓으라고 시킨 덕분일 테지.”

“...?”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나를 시험했다고 해서 딱히 불쾌하지 않아. 나태의 저주를 겪을 때마다 육신이 약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마법적인 힘은 건재하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뭔 소리지...’

“우린 이만 간다!”

마침 숲의 수호자가 드롭한 아이템을 챙긴 토반이 그리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도록 눈치껏 사람들을 물리려는 것이다.

“아, 그래. 잘 가. 다들 수고하셨어요.”

토반에게 손을 흔들어준 그리드가 다른 템빨단원들에겐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함박웃음을 지은 템빨단원들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화답한 뒤 저들끼리 속닥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지발이 중얼거렸다.

“진짜로 신입들이었어...”

그리드와 인사 한 번 나눈 걸로 뛸 듯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입한지 얼마 안 되는 신입들이 분명하다. 템빨단에게 있어서 숲의 수호자는 신입 교육용 소재에 불과한 것이다.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템빨단원들이 떠난 후.

얼굴을 살짝 붉힌 그리드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자 땅에서 2마리의 해골이 솟아나왔다. 중갑옷을 무장한 전사계열의 스켈레톤과 지팡이를 쥔 마법사계열의 스켈레톤이었다. 노에와 랜디까지 소환한 그리드가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녀석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지크프렉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신이 되었다더니 사실이었군.”

“...네, 명목뿐인 신이긴 하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그리드가 지크프렉터의 눈치를 살폈다. 매우 실망하거나 심할 경우 좌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하다. 역시 하야테처럼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는 걸까?

“지금 와 돌이켜보면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다. 그대가 세워온 업적은 역사를 통틀어도 비견할 자가 드물 정도로 대단하니 신으로 추앙 받는 건 당연한 절차였지.”

“실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지크프렉터는 신살자의 탄생을 고대해온 인물이다.

그리고 신은 신을 죽일 수 없다.

“실망하지 않았다면 가식이지. 나는 그대가 신이 아닌 신살자가 되길 바랐었으니.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게다가...”

지크프렉터의 시선이 숲의 안쪽으로 옮겨졌다.

혹시 모를 위험이 없는지 주변을 탐색하고 돌아온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그의 시선에 닿는다.

“그대는 자기 자신이 신살자가 되는 것보다 신살자를 육성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 듯한데, 오히려 그런 방식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대의 방식에 찬동하는 바이다.”

“...?”

신살자를 육성해?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지크프렉터가 고백했다.

“사실은 나도 이미 한 번 시도해봤었다. 메르세데스가 혜안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봤던 나는 그녀를 신살자로 육성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가 피아로의 눈에 띄게끔 의도해서 종자로 들이게 만든 거였고...”

과연 지크프렉터의 안목은 훌륭했다.

피아로 밑에서 수학한 메르세데스는 눈부신 속도로 성장했고 종국에는 적기사단의 첫 번째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에겐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결코 꺾이지 않는 신념. 그것은 메르세데스를 발전시킨 양분인 동시에 독이었지.”

메르세데스는 굉장히 고지식했다. 효율보단 규칙을 중시했고 그것은 그녀의 발전을 저해시켰다. 온갖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단명할 상이었다.

“나는 메르세데스가 오래 살지 못할 운명임을 보았다. 한계를 넘어 초월자가 되기는커녕 잠재력을 개화하기도 전에 죽을 거라고 장담했다.”

지크프렉터의 시선은 여전히 메르세데스에게 고정돼 있었다.

먼 옛날, 신의 사도로써 수많은 난적들과 싸워왔던 지크프렉터조차 그녀의 역량을 파악하는데 긴 시간을 소요했다.

“한데 그대는 메르세데스의 신념을 올바르게 비틀고 여기까지 발전시켰군. 과연 신이 될 만하다.”

‘완전한 신이 된 건 아닌데...’

하야테는 그리드에게 아직 신살자가 될 여지가 남아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크프렉터는 그 사실까진 모르는 눈치였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점은 하야테가 지크프렉터보다 한 수 위라는 점.

현재 유일한 절대자인 하야테는 과연 인류의 정점이라 할만 했다.

‘지크프렉터가 본신을 되찾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뭐 어찌됐든, 메르세데스의 성장을 알아봐 주니까 뿌듯하군.’

확실히, 지금의 메르세데스는 적기사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전설의 기사가 되어 새로운 기사도를 몇 차례나 썼으니까.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자들도 엄청 강해졌어.’

게다가 템빨신의 사자의 고유 특성은 템빨의 극대화다.

그들을 신살자까지 성장시키자는 지크프렉터의 의견은 굉장히 타당했다. 그리드는 생각하지 못했던 접근법이다.

‘신살자 군단...’

그리드는 남들과 다른 이점을 지니고 있다.

아이템을 만들어서 동료들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

사자들과 템빨단원을 모조리 템빨로 무장시키고 초월자급으로 강하게 만들면 신살자를 육성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순간이다.

활짝 웃은 그리드가 지크프렉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계획을 눈치 채셨으니 제가 당신께 부탁드릴 일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시겠죠.”

“당연하다.”

지크프렉터가 그리드의 손을 마주잡았다.

“나 지크, 템빨신의 사자(使者)가 되도록 하지.”

여섯 번째 사자가 탄생한 순간이다.

서사시는 없었다.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일곱 명의 사자를 전부 채우는 순간부터 새로운 서사시가 써질 것 같았다.

***

그리드는 지크프렉터와 지발을 바이란 성으로 데려왔다. 오랫동안 고생한 그들에게 따뜻한 밥부터 대접하고 싶어서였다.

“칠악성... 칠선인의 역할은 신을 의심하는 존재들을 단죄하는 것이었죠?”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신들에겐 이미 천사라는 사도가 있잖습니까? 한데 왜 굳이 일곱 명의 인간을 선택해서 힘을 나눠주고 그들에게 역할을 부여한 거죠?”

혹시라도 인류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신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인간을 하찮게 여긴 건 아니지 않을까.

헥세타이아처럼 인간의 편에 설 신이 있을 거라고 그리드는 기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참담했다.

“천사가 인계와 지옥에서 힘을 쓰기 위해선 너무 많은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신이 천상 외의 세계를 손쉽게 통제하려면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지.”

“그렇습니까...”

그리드는 이 순간 확신했다.

모든 플레이어의 목적은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 즉 신들과 싸우고, 승리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

‘시스템은 내가 사람들을 이끌어주길 바라고 신이라는 감투를 준 건가.’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그만큼 부담이 크다.

난감해하는 그리드에게 지크프렉터가 말했다.

“당분간 그대가... 귀하가 해야 할 일은 2개다. 첫째,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것. 천상과의 전쟁에 대비해서 지상을 통일하는 건 당연한 절차다. 둘째, 마리로즈를 설득해서 같은 편으로 만드는 것. 마리로즈의 무력은 지상에서 가장 강하다. 그녀를 반드시 회유해야만 전력을 갖출 수 있다. 물론 두 가지 일 모두 쉽지 않겠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귀하를 돕겠다.”

“마리로즈는 이미 우군으로 합류했고, 인류도 사실상 하나가 된 상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오크와 뱀파이어가 제 휘하에 있는데다가 인간들의 나라도 대부분 템빨국에 협조적이라.”

“...?”

고기를 썰던 지크프렉터의 나이프가 멈췄다. 부릅뜬 시선으로 그리드를 바라본 그가 이내 거짓이 아님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놓다니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지? 특히 마리로즈를 설득했다는 게 놀랍군. 신의 권능이라도 쓴 건가?”

“그런 권능 없습니다.”

“그런가... 귀하가 마리로즈를 설득하기 위해 치렀을 희생이 얼마나 거대할지 감히 헤아릴 수 없군.”

“....”

인류의 화합은 바사라의 도움을 받아 이뤄낸 거고 마리로즈를 설득하느라 치룬 희생은 딱히 없지만 뭐, 일일이 설명해서야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2가지 조건을 충족한 이상 남은 과제는 비교적 쉽다. 마리로즈의 도움을 받아 지옥의 대악마들을 멸하며 힘을 키워나가도록 하지.”

“우선 헥세타이아 신부터 구출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신중에서 유일한 아군인데 그를 구출했을 때 얻을 이득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신은 신을 죽이지 못하니 헥세타이아는 안전하다. 그리고 신과 싸우기에 앞서 지옥을 정벌할 필요가 있는 것은 신과 대악마가 협력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고.”

헥세타이아가 대악마들에게 인계를 침략해달라고 의뢰했던 전례가 있음을 떠올린 그리드가 걱정했다.

“악마들이 천상에 지원을 요청하면요?”

“그럴 일은 없다. 신은 지옥과 천상을 오갈 수 있지만 악마에겐 그런 권한이 없으니. 지옥에서 천상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존재는 악신 야탄이 유일하나 야탄의 활동 주기는 세계의 멸망을 초래하는 순간을 제외하곤 없다.”

“곧 죽을 놈들이 뭔 헛소리들을 지껄이는지 모르겠군.”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이었다.

꽈장창!!

식당 창문이 깨지더니 괴한이 난입했다.

안대로 두 눈을 가린 채 한쪽 손으로 물구나무를 선 놈의 이름은 해각.

놈의 뒤로 수십 명의 무신의 추종자가 추가로 등장했다.

“용케도 보름을 넘게 숨어있었구나.”

“저 개자식...!”

지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동료들을 죽인 원수와 대면했으니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흥분해서 돌진하는 그를 2명의 무신의 추종자가 막아섰다. 동시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

“...!”

모두의 이목이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차가운 시선으로 해각을 노려보는 그리드의 모습이 좌중을 압도했다.

“여기가 어딘진 알고 기어들어온 거야?”

피를 뚝뚝 흘리며 혈무를 일으키는 검.

그리드의 손에 쥐어져있던 그것이 벼락처럼 쏘아져 해각을 찌르고,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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