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08화 (1,298/1,794)

템빨 66권 - 09화

‘페이커?’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가 만든 은하수를 타고 알 수 없는 땅으로 떨어진 지발.

레이더스가 탐지한 생명체가 페이커라는 사실을 알아본 그가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적의 추적을 피해 도망친 곳에 하필 딱 템빨단원이 있다니,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기가 막히지 않나.

하지만 이내 사정을 파악했다.

“이곳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인가.”

레이더스의 손 위에 선 지크프렉터의 읊조림이 지발에게 상황을 이해시켰다.

지크프렉터가 사용한 고대의 전이 마법은 사용자의 의지에 호응하는 좌표로 두 사람을 이동시켰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

템빨국은 시스템에게 그런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성장했단 건가.

너털웃음을 흘리며 레이더스를 회수한 지발이 지크프렉터와 함께 지상에 내려왔다.

그에게 다가온 인물은 페이커가 아닌 웬 꼬맹이였다.

“바, 방금 그거 마장기 맞죠?”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꼬마.

면갑을 뒤집어 쓴 탓에 생김새와 아이디는 식별이 안 된다.

하지만 지발은 꼬마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지발의 식견이 뛰어나기에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었다.

지발이 봤을 때, 이 덜 자란 소년이 무장하고 있는 아이템은 하나 같이 너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이 설령 재벌 2세라고 해도 이만한 구색은 갖추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현재 장소는 몬스터가 리스폰되지 않는 구역... 보스 존이다. 맵을 펼쳐 확인한 위치는 바이란. 거기에 달을 보니 각성한 숲의 수호자가 등장하는 날일 터. 한데 수호자가 보이질 않는다.

“꼬마야, 너 혹시 그리드의 아들이냐?”

여러 근거를 토대로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수 초.

자신을 한눈에 알아본 정체불명의 이방인을, 소년 로드는 경계하지 않았다.

“네, 귀공의 존함은 지발이시죠?”

로드가 면갑을 벗으며 활짝 웃었다. 그 또한 레이더스를 통해서 지발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었다.

지발이라는 뛰어나고 용맹한 전사가 마장기를 움직이노라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들은 기억이 있는 까닭이다.

지발이 혀를 내둘렀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숲의 수호자를 사냥한 게냐. 아무리 페이커가 도왔다...”

-쉿.

“....”

지발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페이커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귓속말을 보내온 페이커의 반응이 그를 경악시켰다.

-뭐야? 너 꼬맹이한테 숨어있던 거였어? 설마 숲의 수호자를 꼬맹이 혼자서 레이드 했다고?

-맞다.

-핏줄이 엄청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임이네...

그리드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강한 거라면, 내가 낳을 자식도 제법 뛰어나지 않을까?

그동안 게임에서 혼인하고 자식을 낳는다는 개념이 낯설고 어색해서 기피했던 지발의 인식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지발님께선 어떤 연유로 바이란을 방문하셨나요? 혹시 숲의 수호자를 사냥하시려고 했던 건가요?”

“너는 네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템빨국 소유의 보스를 탐낼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어?”

“아바마마께서 적들에겐 가차 없다는 사실을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발님은 아바마마의 벗 아니신가요?”

“....”

벗?

당황한 지발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페이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페이커를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레이더스에 내장된 생체 탐지기 덕분이었다.

의문을 단순히 눈빛으로 보내려다가 실패한 지발이 결국 다시 페이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쩝, 페이커의 쌀쌀맞은 말투는 조금 불편한데...

-그리드하고 내가 친구라고 소문낸 사람, 나 아니다?

-그럼 그리드가 낸 소문이겠지.

-그리드가?

전 7대 길드의 수장이었던 지발은 레이단을 침공하는 등 템빨단과의 전쟁을 주도했었다. 국대전 등의 행사에서 매번 템빨단의 앞길을 가로막기도 했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이후에는 템빨단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했고, 어떤 사건들이 생겼을 땐 종종 협력하기까지 했지만 친구 소리를 듣기엔 좀...

-불쾌하면 그리드한테 따져라.

-아니 내가 언제 불쾌하대? 그냥 좀 의외라서 놀란...

어디에 숨은 건지 모를 페이커와 대화하던 지발이 깜짝 놀랐다.

로드를 빤히 바라보는 지크프렉터의 만면에 미소가 번져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지크프렉터가 왜 저런 반응을?

“왕자께서는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지크프렉터가 로드에게 묻자, 지발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로드가 그제야 처음으로 지크프렉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한 후 대답했다.

“라인하르트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용무는 끝난 건가. 아쉽군.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해야겠어.”

“귀인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딱히 댈만한 이름은 없어. 다만 자네 아버지의 벗이 되고 싶은 사람일세.”

지크프렉터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반역자다.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다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뭔가 사연이 있겠거니 여긴 로드가 지크프렉터와 지발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시군요. 제가 두 분을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행운이 따르시길...”

“어? 잘 가라.”

멋대로 영토에 들어왔는데 거슬리지도 않나? 템빨국의 치안을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닌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지발에게 로드가 빙그레 미소지어보였다.

아버지의 벗이니 믿는다는 뜻이 담긴 듯한 미소였다.

‘요물이구만.’

예쁘장한 얼굴로 눈웃음 흘리는 스킬이 보통이 아니다.

혀를 내두른 지발이 로드가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지크프렉터에게 물었다.

“그래도 기왕 템빨국에 온 건데 라인하르트로 가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리드도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니, 은하수가 이곳으로 인도했으니 한동안 이곳에 머무는 게 낫다. 그리드는 그대의 강운이 다시 한 번 발동할 수 있을 때 찾아가 만나도록 하지.”

-그렇다는데. 괜찮냐? 페이커.

-상관없다. 그랜드마스터를 굳이 제약할 생각은 없으니.

강운에 대해서 묻지 않을까 싶었는데 별 말 없다.

뭐, 질문을 받아봤자 대답도 못해줬겠지만.

‘강운이라...’

지발은 지크프렉터의 실체를 알고 있다.

6악 지크.

지발은 자신이 언젠가 칠악성과 관련한 커다란 에피소드를 겪게 될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될 힘은 당연히 6악의 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1악의 힘이었다.

‘하필 도주기냐...’

지발이 실망하는 이유는 아직 강운의 진정한 위력을 몰라서다.

지크프렉터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발에게 칠악성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강운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려줄 계획이었다.

***

땡기미는 칼날을 검으로 전환시키는 보조 도구라고 이해하면 편하다. 은사를 사출시켜 칼날에 부착시킨 뒤 당겨와 손잡이로 활용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 소요되는 시간이 최소 0.6초였고, 사출된 은사가 어떤 방해를 받아 표적에 적중하지 않을 우려가 있었다.

그리드가 원하는 건 단순했다.

은사의 사출 속도를 높이고 표적에 적중시키는 과정을 단순화시키는 것.

그래서 엘리자베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NO였다.

엘리자베스는 땡기미를 ‘조악한 아이템’이라고 비평했다. 땡기미를 개량해봤자 한계가 명확하므로 아예 새롭게 만드는 게 낫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드는 그녀의 의견을 적극 수용했다.

구조가 단순하다고 해도 명색이 기계인 이상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는 게 맞았다.

두 사람은 레이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름을 연구하고 협력한 끝에 원하던 물건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마력 사출기>

*보조 도구

등급:레전드리(초월)

한손에 쥘 수 있는 직사각형의 박스입니다.

외형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고등급 연금 기술이 집약된 마법공학기계입니다.

템빨신 그리드와 명성 높은 세공사 엘리자베스가 협력해서 만들었습니다.

박스엔 총 1만의 마나를 저장할 수 있으며, 박스 상단의 버튼을 클릭 시 내부의 마법팬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여 저장된 마력을 사출합니다. 사출 거리는 최대 1미터이고 사출된 마력이 지정한 아이템에 닿을 시 <아이템 합체> 스킬이 발동합니다. 단, 타인 소유의 물건에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사용 조건:그리드

*아이템 합체의 유지 시간은 박스의 마나가 소모될 때까지입니다.

*아이템 합체가 발동할 경우 초당 100의 마나가 소모되며, 착용자는 박스에 실시간으로 마나를 주입할 수 있습니다.

무게:200

“거봐요! 디자인을 개선해야한다니까요!!”

완성품의 성능은 그리드의 바람과 기대를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물론 대가는 크게 치렀다.

예로부터 돈 먹는 하마였던 연금술 시설의 최상급 연금술인 <스킬 귀속>은 시도할 때마다 처먹는 재료값만 9만 골드였고 성공 확률도 8퍼센트에 불과했다.

직업 고유 스킬, 그것도 비전투 스킬만 귀속 시도가 가능한 주제에 1회 시도마다 한화 1억 원 이상의 돈을 처먹는 것이다.

물론 그리드가 귀속시키려고 시도한 스킬이 ‘전설 등급’ 스킬이기 때문에 유난히 비싼 거라는 연구소장의 설명이 덧붙긴 했지만 딱히 위로가 되진 않았다.

애초에 연금술로 아이템에 스킬을 귀속시키는 건 가성비가 굉장히 나빴다. 사용 조건이 ‘귀속시킨 스킬의 주인’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되팔기도 불가능한 아이템을 만드는데 돈을 쏟아 붓는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템 설명을 보세요! 지극히 평범한 직사각형의 박스처럼 보인다잖아요! 80억을 들여서 만든 아이템이 평범! 그것도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게 정상이냐고요!!”

“80억 들어간 거 말하지 마.”

보조 아이템 하나 만드는데 80억...

물론 돈값은 톡톡히 하겠지만 치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정확히는 82억쯤이었죠?”

“....”

“그렇게 큰돈을! 그리고 돈보다 귀한 시간을 쏟아서 만든 아이템을 왜 그렇게 평범하게 디자인했냐고요! 제가 예쁘게 마감하겠다고 했잖아요! 왜 저한테 안 맡기고! 제 실력을 못 믿나요!?”

레전드리 초월 등급의 아이템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엘리자베스의 도움이 무척 컸다. 그녀가 없었으면 마법을 귀속시킬 정도로 정교한 마법진을 새긴 팬을 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마력을 사출하는 아이템을 구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아이템 제작에 기여한 엘리자베스의 공로는 무척 컸다. 그녀가 얻은 부가 스탯과 명성, 그리고 업적은 그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그리드가 그녀에게 감사하는 만큼 그녀 또한 이런 기회를 준 그리드에게 감사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무려 아이템 합체 스킬이 귀속된 보조 도구.

사용 조건이 그리드로 한정되지만 않았어도 천문학적인 금액에 거래됐을, 또한 거래 금액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전설급 마법공학기계의 외향이 고작 묵색 박스라니.

아무래도 재질이 탐욕이니 만큼 자세히 보면 고풍스러운 멋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세히 봤을 때의 이야기다.

엘리자베스는 그리드의 마력 사출기가 가치에 걸맞는 외형을 갖길 바랐다.

그러나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전투용 보조도구가 눈에 띄워봤자 좋을 게 없어. 싸구려처럼 보이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제, 제가 언제 싸구려처럼 보인 댔나요! 평범하다고 했지.”

엘리자베스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의 의도를 듣고도 디자인을 수정하라고 종용하는 건 억지였다.

“뭐, 알았어요. 제가 한 발 양보할게요. 이제 돌아가실 거죠?”

“응, 이곳에서의 용건은 끝났으니까.”

아직 만들 아이템이 많이 남았지만 그전에 우선 지크프렉터를 만나고 싶다.

보름 전, 로드가 각성한 숲의 수호자에게 도전하려한다는 카심의 보고를 듣고 냅다 달려갔던 페이커가 생뚱맞은 소식을 전달해왔다.

지크프렉터가 바이란에 머물게 됐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지크프렉터부터 찾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바빠도 너무 바쁘신 엘리자베스 양의 일정을 방해할 순 없어 우선 레이단부터 방문했다. 딱히 급할 이유도 없었다. 라우엘이 눈치껏 바이란의 병력을 증강시켰으니 지크프렉터는 안전했다.

‘여섯 번째 사도를 섭외하러 가볼까.’

겸사겸사 좀 쉬자.

엘리자베스는 말이 너무 많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그리드가 워프 게이트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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