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08화
이 세계는 몇 번째 세계일까.
세계의 파괴와 창조를 반복해온 당사자들도 정확히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세계란 모래성처럼 무가치할 터, 무너진 세계를 굳이 기억할 리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세계란 전부였다.
지크프렉터에게도 그랬다.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이 탄생했고, 존재하는 이 세계가 멸망할 거란 운명에 거역했다. 동료들과 뜻을 모아 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직접 전쟁에 나서진 못했다.
나태의 저주에 취한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을 때, 세계는 이미 멸망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멸망했을 수도 있다.
“....”
의지를 거세하는 저주에 취할 때면 늘 같은 꿈을 꾼다.
세계의 틈새에 봉인당한 동료들이 고통에 울부짖다가 나를 발견하고 입을 꾹 닫는다. 그리고 간신히 미소 짓는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래서 더욱 더 괴롭다. 감당하기 힘든 죄악감에 휩쓸려 스스로를 증오하고 저주하게 된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굴레다.
여느 때와 같이 오열하고 있노라니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났어.”
제이크.
행운의 신의 축복을 받아 ‘모든 사망 변수를 회피하는’ 강운을 지녔던 영웅.
지옥의 악마들을 멸하는 여정에서 동료들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던 그가, 신의 죄를 짊어진 이후 수천 년 동안 침묵했던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멋진 동료를 찾았구나, 지크.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
“제이크...!”
힘을 잃고 틈새에 스며들기 시작한 제이크를 붙잡으려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에 닿는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거지?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
흠칫 놀라 정신을 차린 지크프렉터가 고개를 들어보자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달리고 있다.
달리는 무언가의 위다.
커다란 침엽수와 시선을 나란히 하게 만들만큼 높은 무언가의 위.
휘청, 긴 수면의 여파로 퇴행한 근육이 제대로 작동하질 않는다.
극한까지 단련해놓았건만 부질없다. 나태의 저주에 시달려온 이 육체는 곧 한계다.
다소 힘겹게 몸을 일으킨 지크프렉터가 뒤를 돌아보았다.
금속 거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있었다.
옛 추억들을 회상시키는 고대의 산물, 마장기 레이더스다.
“푹 주무셨습니까?”
레이더스로부터 지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피로를 감추기 위해 애써 억양을 높이는 꼴이 갸륵하고 고맙다. 다른 기사들은 전부 죽은 건가... 안타깝고 미안하다.
이 은혜와 죗값, 신들을 죽이고 세상을 구원하여 치르리라.
“그래.”
짧게 대답하는 지크프렉터의 음성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흔들렸던 표정도 어느새 정돈됐다.
감정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이 미친 세상에서 버틸 수 있다...
스파앗━!
지크프렉터의 주위로 떠오른 고대의 룬어들이 레이더스의 앞길에 은하수처럼 찬란한 길을 만든다.
환국을 방문했을 때 썼던 마법이다.
레이더스가 그 길에 올라탔고, 이내 사라졌다.
잠시 후.
“...놓쳤나.”
현장에 도착한 삼제 해각이 쯧, 혀를 찼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으니 불쾌할 수밖에.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번 임무의 실패 원인은 자신의 무능이 아니었으니.
마장기의 갑작스러운 고속주행은 ‘물리적으로 쫓는 게 불가능한’ 개념의 것이었다. 초월자의 순보처럼 먼 거리를 도약하는 것도 아닌데 거리를 좁힐 수 없었고 저지할 수단도 없었다. 마장기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악운이 발생해서 추적에 차질이 생겼다.
어떤 거대한 힘이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무신께서 말씀하셨던 칠악의 이능 즉, 신의 권능 같았다.
‘그런 걸 쓰면 못 잡는 게 당연하지.’
다만, 권능의 위력을 감안해 봤을 때 자주 남발할만한 종류의 것은 아니다.
빠른 시일 내에 추적에 성공한다면, 그땐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침 뒤쫓아 온 추종자들에게 해각이 명령했다.
“흩어져서 다음 신탁을 기다려라.”
무신 제라툴은 위대하다.
인류는 어떤 이유로든 힘을 원하며, 힘을 원하기에 무신을 공경하는 법이다. 대륙 어디에나 무신을 기리는 신전이나 성상 등의 상징물이 존재했다. 그 모든 것이 무신의 귀와 눈이 되어주었다.
스팟!!
해각을 비롯한 수십 명의 추종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여태까지처럼 지크프렉터의 위치를 곧 찾아낼 무신으로부터 신탁이 내려오는 순간, 그들은 다시 뭉쳐 그때야말로 기필코 지크프렉터를 없앨 것이다.
한편, 템빨국의 작은 도시 바이란 외곽에선....
“이겼다!! 내가 이겼어!!”
숲의 수호자. 그것도 각성한 숲의 수호자를 템빨 왕자 로드가 쓰러뜨렸다.
기뻐서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년이다. 하지만 소년의 곁에 쓰러져있는 거대한 마물의 시체는 소년의 소행이 빚어낸 결과라기엔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각성한 숲의 수호자를 10분 만에 쓰러뜨리다니...’
기척을 숨긴 채 로드를 지켜보던 페이커가 드물게 경악했다.
확실히, 이 숲은 요구 레벨이 썩 높지 않은 사냥터다.
하지만 특정주기마다 출현하는, 그래서 로드를 한 달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던 각성한 숲의 수호자는 상당히 강력한 보스 몬스터다.
페이커가 이곳에서 활동했던 시절에는 체다카 길드가 다 함께 힘을 합쳐도 레이드하지 못했었을 정도다.
한데 로드는 혼자서, 그것도 10분 만에 숲의 수호자를 쓰러뜨린 것이다.
온갖 전설급 스킬을 보유한 로드의 잠재력이 탁월한 것도 있지만 로드가 무장하고 있는 그리드제 아이템들이 워낙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같은 대상을 공격할 때마다 공격력이 상승하는 무기, 모든 종류의 데미지 내성을 높여주는 갑옷, 일시적으로 어그로를 해제하는 망토, 그리드가 애용하는 것과 닮은 백호의 견갑과 청룡의 부츠 등등.
지난 15년 동안 그리드는 로드를 위해서 정말 많은 선물을 준비해놨었다. 로드를 아끼는 마음이 느껴졌다.
“푸른 오리하르콘이 이렇게 많이! 아바마마께서 기뻐하시겠어!”
앞으로는 자신이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하는 걸까.
주섬주섬 아이템을 챙기며 활짝 웃는 로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기특하다.
“이건...!?”
“...?”
페이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을 깎아 만든 작은 신상에 로드가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저 신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숲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고 페이커도 몇 번이나 본적 있다. 하지만 딱히 관심을 가진 적은 없다. 저 이름 모를 신상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단지 배경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드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신앙의 탄압은 좋지 않다고 배웠지만... 여긴 템빨국이야.”
콰작!
중얼거린 로드가 신상을 발로 밟아 부쉈다.
페이커가 봤을 때 그것은 매우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템빨국은 그리드의 나라이며 그리드는 신이 된 상태다. 앞으로 템빨국엔 그리드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상징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템빨국 백성들의 신앙은 그리드에게 집중돼야만 했다.
‘그림자단을 풀어서 다른 신의 상징을 모조리 없애야겠군.’
그리드에게 듣기로, 또한 사리엘 사건에서 체험하기로 신은 딱히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레베카교는 입지가 워낙 크니 레베카 여신의 상징을 건드리는 건 신중해야겠지만, 다른 종교들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생각하며, 단도를 던진 페이커가 수풀 사이에 놓여있던 다른 신상을 파괴했다.
그러다가 문득.
“...?”
대낮의 하늘을 수놓는 은하수를 발견하고 경계했다.
***
[당신의 석상에 참배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템빨신 그리드의 석상>이 9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의 손재주 스탯이 30퍼센트 상승하고 아이템 제작 시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의 근력, 체력, 지력, 민첩성 스탯이 각 9퍼센트씩 상승하고 검무계열 공격 스킬의 시전 속도와 위력, 마법의 시전 속도와 재사용 대기 시간이 소폭 상승합니다.]
그토록 고대했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석상의 레벨이 9가 되자 역시나 예상대로 <영웅왕 그리드의 석상>이 15레벨이었을 때와 똑같은 수치의 손재주 스탯과 제작 확률 보정 효과를 얻었다.
‘석상 레벨 올리기도 쉽지가 않군...’
템빨국 국민의 숫자는 진즉에 2억을 넘겼다. 그리고 그중 3분의 2가 플레이어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석상에 참배하라는 주간 퀘스트를 꾸준히 내렸는데도 석상 레벨이 오르는 속도가 예전만 못한 것이다.
영웅왕의 석상이 템빨신의 석상으로 승격하면서 레벨 업에 요구되는 경험치량이 높아진 듯했다.
‘석상의 기능 자체가 향상됐으니 납득할 수 있다.’
지금 문제는 석상의 레벨 따위가 아니다.
장악력.
이 빌어먹을 히든 스탯이 오르질 않는다.
‘왜지?’
뱀파이어가 해금되고 19일째.
뱀파이어로 종족을 변경한 플레이어의 숫자는 벌써 2천만 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매주 혈왕령을 클리어하는 뱀파이어가 2천만 명이란 뜻이다.
한데 왜 장악력이 오르지 않는단 말인가...
‘혈왕령 클리어 횟수 누적 1억 회당 1씩 오르고 이러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하다가도 장악력 스탯의 효과가 기대만큼 뛰어나다면 그 정도쯤이야 충분히 감내할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뱀파이어 플레이어의 숫자가 늘어나는 추세를 봤을 때, 누적 1억 회당 장악력 스탯이 1 오른다고 쳐도 매주 1씩 오르는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결코 나쁘지 않았다.
‘10억 회당 1이라고 해도 납득할만... 아니, 이건 너무 개돼지식 계산법 같은데.’
빌어먹을, S.A의 노예로 지낸지 너무 오래된 거 같다.
‘뭐 됐다.’
현재 그리드가 장악력 스탯을 원하는 이유는 혈마법의 구현 속도를 높이고 유지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라는 말이 있다.
장악력이 안 올랐으니 땡기미를 개량하는 방법으로 노선을 바꾸면 된다.
마침 손재주 스탯도 복구한 만큼 당분간 아이템 제작에 열중할 계획이기도 했다.
‘사출 속도를 높이고 조준 보조 옵션을 넣자. 엘리자베스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용광로에 불을 지피는 그리드의 얼굴에 오래간만에 활력이 돌았다.
휴식은 때때로 영감을 주는 법.
석상의 레벨이 오르길 기다리는 시간 동안 구상해놓은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다. 국대전에 출전한 동료들이 구해다준 재료도 넉넉하다.
“제작을 시작하지.”
강해질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