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06화 (1,296/1,794)

템빨 66권 - 07화

대련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리드가 템빨국에 랭크전 시스템을 도입했다. 템빨단원들과 템빨국 인사들이 서로 경쟁하며 자신과 비슷한 실력의 상대를 찾고, 싸우며, 배우고 성장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단원들의 참여율은 그리드의 예상보다 훨씬 더 높았다.

‘점수’와 ‘순위’ 개념이 있는 시점부터 참여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본래 플레이어란 순위 같은 것에 환장하는 법이니.

“역시 우리 길드엔 강한 사람이 많네.”

“당장 독립해서 길드를 세워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이잖냐.”

“근데 랭킹이 좀 많이 의왼데...”

랭크전 개시 후 2주가 흘렀다.

상위 랭킹은 전 체다카 길드 출신들과 유라, 크리스 등이, 최상위 랭킹은 그리드와 브라함, 피아로와 메르세데스, 사리엘과 아스모펠, 그리고 카츠가 장악했다.

“...?”

“...?”

다른 사람들의 활약이야 모두의 예상대로였지만 카츠의 선전은 이변에 가까웠다.

물론 카츠는 강하다. 템빨국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강자였다. 하지만 유라, 지슈카, 페이커, 크리스급의 실력자보단 한 수 아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1대1에서 카츠는 레가스와 폰보다 불리했던 입장이다.

한데 그리드의 사도,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랭킹을 보고 놀라는 동료들의 반응에 흡족함을 느낀 카츠가 어깨를 으쓱였다.

“훗... 군계일학, 낭중지추라는 말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나.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군.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최초의 고대 클래스 전직자. 강한 게 당연하다.”

“고대 클래스? 혼자 버그 걸렸어?”

당연한 말이지만, 카츠가 고대 클래스로 전직했다는 월드 메시지는 아직 뜨지 않았다. 전직 퀘스트를 어느 정도 진행하고 힘의 일부를 해금하는 시점에 월드 메시지가 뜰 것이다. 하지만 카츠는 베리아체의 그림이라는 게 대체 어디에 있는지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첫 번째 전직 퀘스트부터 막힌 마당에 월드 메시지가 뜨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버그라... 뭐,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실없는 사람 취급을 당해도 마냥 즐거운 카츠였다.

그가 지금 당장 자신의 클래스를 인증하지 않고 말로만 은근히(?) 전직을 티내는 이유는 훗날의 극적인 상황 연출을 위해서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세상이 발칵 뒤집힐 거라고 상상하자 관종의 쾌감이 들끓었다.

“블러드 워리어와 뱀파이어의 상성이 좋은가보군.”

연신 히죽거리는 카츠 곁으로 크리스가 다가와 말했다.

랭크전에서 카츠를 만나 점수를 크게 잃은 그는 떨어진 순위에 연연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동료들의 잠재력을 잘 알고 있다. 동료들이 언제 자신보다 강해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카츠에게 진 건 솔직히 제법 충격이었지만, 카츠가 뱀파이어로 종족을 바꿨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과가 충분히 납득됐다. 다음에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기도 했고. 10번 싸우면 2번은 이기겠지.

“뭐 그런 셈이다. 크리스 너도 슬슬 종족을 바꾸지 그래?”

“생각 없어.”

“왜? 오크로 바꾸면 지금보다 몇 배는 세질 텐데.”

오크의 종족 특성은 물리 딜러의 공격력과 돌파력, 유지력을 증폭시킨다. 대검술사이자 폭군인 크리스가 오크로 종족을 바꿀 경우 최고의 시너지가 발생할 것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여전히 종족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크리스의 심미안이 오크의 생김새를 거부해서였다.

“난 녹색 털복숭이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강해지기 위해서 원치도 않는 모습을 하는 게 과연 옳을까? 그건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게임을 즐기지 못하고 지쳐서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비단 크리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뱀파이어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도 결국 외모였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크가 흉측하게 생긴 건 아니다. 취향에 따라서 오크의 야성미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싫었다.

‘이래서 요즘 스킨 제작자가 돈방석에 앉았다는 건가.’

아이템의 성능은 유지하되 외형을 바꿔주는 것으로 유명했던 스킨 제작자는 최근 캐릭터의 생김새까지 바꾸는 경지에 올랐다는 소문이다.

이목구비의 모양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도 이목구비의 위치에 변화를 줄 수 있고 피부와 홍채, 체모의 색 등을 바꿔준다고 하는데... 그 정도만으로도 굉장히 큰 인상 변화를 노릴 수 있는 듯했다.

카츠도 스킨 제작자를 만나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방어구의 외향을 바꾸고 싶어서였다.

그리드의 작품들은 섬세하고 기품이 있어 매우 아름답지만... 카츠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아이템에서 막 불꽃이 흘러나오고 날개가 솟아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고급지고 점잖기보단 화려해서 눈길을 끄는 종류의 멋 말이다.

생각하는 동안 진행 중이던 랭크전이 끝났다.

지슈카와 데미안의 대결이었는데 결과는 지슈카의 압승이었다. 그리드에게 신검을 얻고 과거의 힘을 되찾아가는 중인 데미안이 일방적으로 당해버렸다.

“지슈카의 레이팅 점수도 벌써 2,557점인가... 궁성이 되고나서 확실히 강해졌군.”

넓은 시야와 공격 범위, 그리고 궤도를 바꾸는 화살을 이용한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의 저격, 근접전에서의 전투를 가능케 해주는 회피 기동과 속사...

궁성으로 전직한 지슈카는 어떤 거리에서도 최강의 실력을 발휘하는, 말 그대로 무결점의 존재로 등극했다. 레벨만 복구해도 최상급 대열에 합류할 수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난 레벨이 초기화되지 않았군.’

역시 고대 클래스는 특별하다 이건가.

잘나가는 웹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에 심취해 웃던 카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그리드가 지슈카와 마주치더니 손발을 허우적거렸기 때문이다.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고 우물쭈물하는 꼴을 보니 뭔가 굉장히 켕기는 게 있어보였다.

“그리드는 왜 저러지?”

“반트너가 말하기를 그리드가 지슈카를 사랑하게 됐다던데.”

“반트너가?”

그럼 헛소리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카츠가 대련실에 입장했다.

정확히는 ‘던전’이다.

포식이불족발이 랭크전용으로 제작한 던전. 아직 2개의 던전밖에 없지만 차츰 숫자를 늘려나갈 계획이란다. 던전마다 특색을 두어 길드원들이 더 다양한 환경에서의 전투에 적응하게끔 돕겠다는 의도였다.

포식이불족발은 ‘엘리자베스가 템빨단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게끔’ 템빨단을 돕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글쎄. 사실 누가 봐도 그건 핑계였다. 포식이불족발은 겉으로 쌀쌀맞게 행동하는 것치고 템빨단을 위해서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해주고 있었다. 단순히 조카를 돕는 거라고 보기엔 너무 열정적이다.

‘뭐,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템빨단은 천재들이 만든 집단이다. 그들의 재능과 영향력을 보고 꿈을 키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합류해왔다.

그러므로 템빨단엔 늘 에너지가 넘친다. 단원 전원이 향상심이 충만해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다. 그들과 함께하면 자신 역시 정열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함께 달리고 싶어지고, 응원하게 된다.

포식이불족발도 같을 것이다.

그리드에게 블러드 카니발을 잃은 원한도 진즉에 잊었을 터.

그가 첫 번째로 만든 랭크전용 던전이 그리드의 대장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구조인 것이 바로 증거다. 템빨단원 모두가 그렇듯 포식이불족발 또한 그리드를 존중하고 있었다.

“카츠 너 3,000점 넘었더라. 나한테 지면 점수 많이 깎일 텐데 미리 각오해.”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자격을 지닌 사람은 그리드밖에 없다.”

“하핫! 그건 까봐야 알지! 마하 스피어!!”

랭크전에서 이긴다고 해서 어떤 보상이나 명예가 뒤따르는 건 아니다. 점수도, 순위도 모두 템빨단 내부에서만 취급되는 정보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도움이 된다.

비슷한 수준의 상대를 찾지 못해 대련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 사람들은 점수와 순위 시스템으로 객관화된 수치 덕분에 좋은 경쟁자를 만날 수 있었고, 그건 빠른 성장과 즐거움으로 직결됐다.

랭크전은 사냥과 레이드의 굴레에서 지쳐가던 템빨단원들에게 단비가 되어주었다. 레가스나 툰 같은 무투파들은 3일 내내 랭크전만 할 정도였다.

***

“이런 제길!”

지발은 노련하다. 초창기부터 크라우젤과 경쟁해온 인물답게 여러 방면의 경험을 쌓은 그는 특정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적의 추적을 따돌리는 형태의 퀘스트만 해도 수십 번을 겪어봤기 때문에 추적과 도주 양쪽에 능했다.

지발은 무신의 추종자들에게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랜드마스터를 숨겨놓을 은신처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일말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고, 은식처를 정한 후에도 신중하게 움직였으며, 혹시 몰라 주기적으로 은신처를 바꾸기도 했다.

한데 고작 열흘 만에 또 무신의 추종자들의 추적을 허용한 것이다.

‘자꾸 왜 들키는 거지?’

이쯤 되면 첩자가 있는 건가 의심해야할 정도다.

하지만 현재 지발과 활동하고 있는 기사들은 그랜드마스터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인물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이 지발을 의심해야할 입장이었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건가?”

고대의 라이더인 지발은 모든 탈 것을 완벽하게 다룬다. 그가 운전하는 모든 것들은 생물과 기계를 구분하지 않고 성능보다 더 높은 성능을 발휘했다.

지발의 마차를 쫓아 달리는 기사들의 숨이 벅차오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랜드마스터를 태운 마차는 전 네오 적기사 출신인 정예 기사들의 체력을 극한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숲을 빠르게 주파했다.

“어, 쭉 달릴 거다.”

“하지만 이 앞부턴 제국령이다.”

“제국의 군대랑 저놈들을 엮이게 만들고 그 사이에 빠져나갈 거야.”

“그래...”

계속되는 적의 추적에 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그들은 지발을 불신하지 않고 지발의 지시를 따랐다. 은신처가 벌써 몇 번째 발각당한 걸 보면 지발이 수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믿으려고 노력했다. 그랜드마스터께서 지발의 지시를 따르라고 하셨으니 믿고 따르는 수밖에.

“이럇! 헉?”

말을 채찍질하던 지발이 깜짝 놀라 급히 마차를 세웠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이쪽으로 도망칠 걸 예상이라도 한 눈치였다.

“아 이런 염병 빌어먹을 새끼들, CCTV라도 달아놨냐? 너네 대체 뭐야?”

욕이 절로 나온다.

지발은 작금의 상황들을 납득할 수 없었다. 도주와 은신 과정에서 뭔가 실수를 범했다면 또 모를까, 사람들의 시선을 잘 속이고 흔적도 말끔하게 지웠는데 왜 자꾸 추적을 당한단 말인가?

‘심지어 눈깔까지 가리고 다니는 놈들한테.’

마치 시스템이 방해하는 느낌이라 굉장히 불쾌하다. 자유를 침범당한 기분이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발은 이런 조작질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세 놈이면 싸울만하다.’

8개의 비급을 익힌 놈들.

수준이 매우 높긴 하지만 레이더스의 상대는 아니다. 더군다나 이쪽엔 전 네오 적기사단 출신의 기사가 9명이나 함께하고 있다.

“돌파한다. 다 때려죽이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무신의 추종자들은 확률적으로 <무신의 비급>을 드롭하는 네임드 몬스터다. 보통 사람은 잡고 싶어도 못 찾아서 못 잡는다.

마음을 다스리며 마차에서 내린 지발이 그대로 굳었다.

무신의 추종자 수십 명이 추가로 나타난 까닭.

“...이건 좀 망한 거 같은데.”

이 정도의 위기감은 그리드와 싸웠을 때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것 같다.

한 마디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판단은 빨라야한다.

즉시 레이더스를 소환하려고 하는 지발을 기사들이 둘러쌌다.

“우리가 길을 열 테니 넌 이대로 돌파해라.”

“뭐? 그럼 너흰 어쩌...”

“지크프렉터님을 꼭 살려다오.”

적기사가 되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를 거두어주신 분이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다. 우리도 몰랐던 우리의 재능을 이끌어주시고 그토록 갈망했던 힘을 주신 분이다. 추악한 신들을 쓰러뜨려야할 사명을 지닌 고귀한 분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목숨쯤 얼마라도 바칠 수 있다.

“이런 말하기 낯간지럽다만 우리는 지발 너를 믿는...”

각오를 다지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던 기사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

지발의 사고가 굳었다.

바로 곁에서 숨결을 토하던 기사들. 아니, 동료들이 머리를 잃고 피를 흩뿌리다가 이내 풀썩 쓰러지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정을 죽인 놈들과 한패라고 들었는데 수준이 낮구나. 이정도 참 한심하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얇은 나뭇가지 위에 한 손으로 물구나무 서있는 놈이 보였다.

삼제 해각.

놈의 이름이었다.

“직접 나설 것도 없었어.”

해각은 지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가 추종자들한테 턱짓하자 수십 명의 추종자가 일제히 마차로 덤벼들었다.

마차 안의 그랜드마스터는 여전히 잠들어있는 상황.

지킬 수 없다.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지발은 알고 있었지만 싸우기를 선택했다. 레이더스를 소환, 탑승하여 마차를 끌어안았다. 그랜드마스터가 세계관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몇 달을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그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Satisfy를 시작하고 7년.

지발은 처음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1악성 제이크의 영혼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특수 조건들을 달성하여 히든 패시브 스킬 <강운>을 획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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