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06화
지신은 ‘땅’을 밟았을 때 확률적으로 발동하는 스킬이다. 땅속성 마법에도 그 확률이 적용될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보았다. 애초에 브라함이 만든 진흙의 파도는 너무 광범위했다. 피할 곳을 찾기 힘든 만큼 발판으로 삼을 지점이 많았다.
철퍽! 발이 진흙과 맞닿을 때마다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는다. 진흙이 그리드의 발목을 삼키는 속도보다 그리드의 이동속도가 더 빨랐다. 발목이 삼켜지기 전에 자리를 이탈하길 반복했다.
[<지신>이 발동하여 대지의 제어권을 얻습니다.]
진흙의 파도를 정확히 37번째 박찼을 때였다.
끊임없이 곡선으로 움직여 원을 그리고, 급기야 거대한 구체가 되어 그리드를 가두려고 했던 진흙의 파도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일제히 브라함에게 쏟아졌다.
그리드가 브라함의 마법을 탈취한 것이다.
브라함이 대응하는 사이 검무의 보폭을 밟으려고 했던 그리드는,
“...!?”
자신에게 쏟아지는 진흙을 관조, 소멸시켜버린 브라함이 등지고 있는 수백 발의 매직 미사일을 목격하고 굳어버렸다.
그리드가 진흙의 파도를 피해 다니는 동안 브라함은 마법의 캐스팅을 연속하고 있던 것이다.
쿠콰콰콰콰콰쾅!!
매직 미사일이 쏟아진다.
빛의 비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피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순보를 쓰기도 난감하다. 매직 미사일의 세례가 시야 대부분을 뒤덮은 까닭에 순보를 써서 돌파할 구간을 포착하기 힘들었다.
까강! 까가가가강!!
그리드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선회한 10개의 갓 핸드가 매직 미사일의 폭격 지점 몇 곳을 차단했다.
오래 버틸 리 만무하다.
브라함의 매직 미사일은 그리드의 매직 미사일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갓 핸드가 허용할 수 있는 피해량을 순식간에 넘어선다.
부르르, 매직 미사일과 충돌할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는 갓 핸드들의 모습을 엿본 그리드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대로 방어에 전념해야하나?
‘안 돼.’
마법사를 상대로 발이 묶이는 건 최악의 전개다. 고작 매직 미사일을 막겠답시고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중위, 고위 마법들의 표적이 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다.
반격?
화회나 이십만대군 분쇄검 등으로 매직 미사일을 파쇄하고 그대로 역공... 보통의 마법사를 상대론 충분히 먹힐 전법이다. 하지만 상대는 브라함이다. 초월자의 감각이 매직 미사일 하나하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마다 함정 마법을 귀속시켜놓은 건가?’
진흙의 파도를 피해 다닌 고작 몇 분의 시간 동안 매직 미사일을 수백 발이나 전개한 것으로 모자라 개체마다 함정 마법을 덧씌웠을 거라고?
상대가 브라함이라지만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냐고, 혹자는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브라함의 진가를 안다.
브라함의 마법 중엔 ‘강화 메모라이즈’라는 것이 있다. 앞서 쓴 마법의 술식을 그대로 재구성하는 마법이다. 쉽게 말해 복제다. 전설급 마법은 복제가 불가능하고 고위 마법의 복제에는 다소 시간이 걸리는 등 약점이 있지만 하급 마법 따윈 단숨에 복제하는 게 가능했다. 일단 하나의 매직 미사일에 함정 술식을 덧씌운 시점부터 그와 똑같은 매직 미사일을 증식시키는 건, 브라함에겐 일도 아닌 셈이다.
‘피하는 수밖에 없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초 내외.
한데 이미 브라함은 다음 마법을 펼치고 있었다.
매직 미사일의 간격 사이사이로 수구를 퍼뜨리더니 폭발시켰다. 그러자 일대를 뒤덮는 광범위한 물의 장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순보로 탈출하지 못하게끔 결계를 만들어 가두고 매직 미사일의 폭격에 노출시킬 심산 같았다.
스파앗!!
그리드가 다급히 움직였다. 아직 물의 장막이 닿지 않은 지점을 바라보더니 순보를 전개했다.
‘뻔하다.’
브라함이 압도적인 물량으로 그리드의 시야를 지배한 이유는 그리드의 이동경로를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브라함은 그리드의 시야가 미치는 범위 대부분을 빼곡하게 쏟아지는 매직 미사일과 물의 장막으로 장악한 상태다. 그리드가 이 영역을 벗어나기 위해선 마법과 마법 사이의 미세한 간격을 노리고 순보를 써야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브라함은 그리드가 나타날 지점을 뻔히 예측하고 대비하는 게 가능했다.
“...?”
네가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나타나든 내게 즉시 포착되며 나의 마법은 이미 준비되어있다...
느긋하게 마법을 캐스팅하며 그리드의 출현을 기다리던 브라함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순보를 써서 사라진 그리드의 기척이 자신이 예측했던 지점들에서 나타나지 않고 완전히 소멸해버린 까닭이다.
사라졌다, 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뭐지?’
당황하는 브라함의 표정이,
‘이건 몰랐지?’
<바르바토스의 시야>와 순보를 연계해서 ‘10킬로미터 바깥’에 출현한 그리드의 시야에 포착된다.
“무구의 비.”
투쾅-!
투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오크의 반란을 침몰시켰던 콤보.
바르바토스의 시야와 원덕구의 연계가 브라함을 덮친다.
“...!!”
아득한 상공에서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수천 개의 무구를 목격한 브라함은 귀신에 홀린 심정이었다.
작금의 상황은 지공의 지혜로도 이해 못할 불가해.
그러므로 전율한다.
이 얼마만의 미지(未知)인가!
“앱솔루트 실드!”
수백 년 만에 겪은 미지에 희열을 느낀 브라함이 드물게 격양됐다. 주문을 외우는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음성은 뇌신의 발동을 유도하기 위해 가속하며 접근 중인 그리드의 귀까지 닿을 정도였다.
‘브라함...!’
뱀파이어의 권능과 전성기 시절의 힘 상당량을 잃고도 신화를 쌓은 인물.
아직 바알이나 마리로즈에겐 근접하지 못할지라도, 그가 세계관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거물 중 하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부의 마나를 흡수해서 자원으로 삼는 고유 특성을 지닌 이상, 사실 그는 지금 당장에라도 ‘무저갱’이나 ‘적해’ 등의 특수한 공간에 한해서 최강을 논해도 좋을 괴물이었다.
누구라도 두려워할 그를, 그리드가 몰아넣는다.
[청룡의 기운과 동화하여 <뇌신>이 발동합니다.]
[당신의 신체가 번개로 변합니다. 모든 공격이 전격속성으로 변경되고 대상을 타격할 때마다 마나를 대량으로 불태웁니다. (대상 총 마나의 10퍼센트)]
[모든 물리공격에 면역하지만 마법공격에는 방어력, 저항력이 적용되지 않은 2배의 피해를 입습니다. 또한 이동하는 경로에 지력의 10배에 해당하는 피해를 주는 전류를 남깁니다. 전류 지속 2초.]
[속도가 하락할 때까지 해제되지 않으며 최대 속도에서 벗어날 시 즉시 해제 됩니다.]
“십만대군 학살검!”
파지직!!
“....!”
쿠콰콰콰콰콰쾅!!
그리드는 브라함과의 거리를 철저히 유지했다. 브라함의 시야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브라함을 중심에 두고 선회했다. 뇌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브라함에게 위치를 간파당하지 않게끔 계속해서 움직이며 무패왕의 검술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바르바토스의 시야가 유지되는 동안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요량이었다. 뇌신 상태에서 반격을 허용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거리를 절대로 좁히지 않았다.
“삼십만대군 잠행검!”
파자작!!
무구의 비를 막은 대가로 반파된 앱솔루트 실드의 틈새로 무패왕의 검술이 몇 번이나 파고든다.
번개로 체현되는 검기.
마치 청룡도를 휘두르는 미르의 검기와 닮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부터 연신 덮쳐왔으니, 브라함은 반응이 어려웠다.
초월자가 아니므로 눈으로 보거나 기감으로 읽고 대응하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고, 미리 실드를 써서 방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도 압박인 것이 검기와 실드가 충돌할 때마다 마나가 크게 깎여나갔다.
‘이 무슨... 도대체 몇 개의 힘이 융합된 거지?’
원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수의 시야, 청룡의 힘, 무패왕의 검술, 그리고 그것들이 연속하게끔 돕는 신격...
브라함을 차츰 약화시키는 ‘번개’는 다양한 힘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기술이었고, 그리드의 삶의 궤적이 담겨있었다. 그리드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해온 브라함조차도 자신이 그리드의 일부밖에 보지 못했었음을 절감할 정도였다.
한편 그리드는 선회를 멈추고 직진하고 있었다.
바르바토스의 시야의 지속 시간이 끝났으니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신격은 이미 무패왕의 검술을 연발하느라 소모한 상태다.
‘여기서 승부를 본다.’
신격을 전부 써가면서 무패왕의 검술을 연발한 결과, 그리드는 브라함의 모든 마나를 불태우는데 성공했다. 브라함은 마나 번을 겪는 동시에 앱솔루트 실드까지 유지하느라 마나가 완전히 바닥이었다.
‘브라함은 마나 드레인을 쓰는데 턴을 소비할 거다.’
지금이 승기를 잡을 기회다.
점차 가까워지는 브라함의 기척을 느끼며, 그리드가 춤사위를 펼쳤다.
허공을 답보하는 5융합 검무의 보폭이 고고하여 하늘을 유영하는 용을 연상시킨다.
“낙룡극...?”
낙룡극살파는 이미 발동했고, 그리드의 몸은 어느새 시야에 들어온 브라함을 향해서 쏘아졌다.
돌이킬 수 없단 뜻이다.
쿠오오오오━
뜨겁게 달아오른 대기.
당황하는 그리드의 얼굴을 뒤덮은 그림자가 점차 짙어진다.
푸욱-!
그리드의 검이 브라함의 가슴을 꿰뚫었다.
하지만 한 번으로 그쳤다. 강력한 찌르기와 수십 회의 베기로 구성된 낙룡극살파의 검격이 완성되지 못했다.
꽈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그리드의 몸을 짓뭉갠 까닭.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온갖 경고메시지와 함께 불사의 발동을 뜻하는 알림창이 그리드의 시야를 뒤덮었다.
특정 조건에서 발동하는 회복 스킬들이 발동할 틈조차 주지 않는 일격필살의 파괴력.
전설의 대마법 메테오의 위력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운석과 함께 지상까지 추락한 그리드가 연쇄되는 폭발 속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나가 완전히 고갈됐을 브라함이 무슨 수로 메테오를 발동시킨 건지 그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잿더미에 뒤덮인 상공에서 브라함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새 회복한 마나로 수백 개의 워터 볼을 소환, 메테오가 일으킨 폭발에 의해 형성된 헬파이어를 잠재운 그가 여전히 넋 놓고 있는 그리드에게 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놀라고 있는 거냐?”
“아니... 메테오를 쓸 정도의 마나를 어디서 갑자기 끌어온 겁니까?”
“마나는 없었다. 마나가 고갈되기 전에 알람으로 설정해놨던 마법이 발동한 것뿐이야.”
“알람으로 설정해놨던 거라고요? 제가 그 타이밍에 접근할 걸 어떻게 알고요?”
“네 공격이 내게 한 번 적중할 때마다 내 마나 총량의 10분의 1이 깎여나갔지... 네가 어느 시점에 내게 접근하고 싶어 할지 예상하는 건 쉬웠다.”
“와...”
그리드에겐 레벨의 격차를 무마시킬 수 있는 펜릴의 힘이 있다. 그러므로 브라함과의 레벨 차이는 이번 승부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순수하게 실력 차이로 진 거다.
하지만 그리드는 분하지 않았다. 도리어 너무 기뻤다. 브라함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고 든든했다.
환하게 웃는 그리드가 브라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져놓고 뭐가 좋다고 웃는 거냐? 앱솔루트 실드는 어떤 공격이든 상쇄시키는 전설급 방어마법이지만 공격을 막는 순간 내구력이 다하고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 무구의 비를 내린 다음 소모전을 노리기보다 곧바로 낙룡극살파와 순보를 연계시켰다면 확실히 우위를 점했을 텐데 너무 소극적이었어.”
“다음에 대련할 땐 그렇게 할게요.”
“흥, 오늘 같은 기회는 두 번 다신 없을 거다. 오늘은 하필 디스인티그레이트를 쓴 직후에 대련을 하는 바람에 내가 너무 불리했다.”
“아니, 디스인티그레이트는 마법 단조에 써주셔야죠.”
“양아친가...?”
티격태격하면서도 기분 좋은 두 사람이었다. 오늘의 대련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됐다. 브라함은 초월자의 순보를 물량으로 제약하는 게 썩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리드는 순보를 맹신해선 안 된다는 사실과 멀리 내다보는 전술을 배웠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파악했다.
브라함과 호각을 이룰 정도가 됐을 줄이야.
이쯤 되면 자신감을 되찾을 자격이 충분하다.
앞으로 꾸준히 대련하며 실력을 쌓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스르륵 올라왔다.
“그렇죠... 오늘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없으셔야지요...”
수심이 가득한 얼굴.
행정관 라빗이었다.
여기까지 뛰어오다가 비뚤어진 안경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쳐 쓴 그가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저는... 저는 여기에 대악마가 쳐들어온 줄 알았습니다.”
“....”
“....”
그리드와 브라함이 입을 꾹 다물었다. 대련의 여파로 일대가 완전히 초토화 돼있었다. 몇 개의 산이 무너졌고, 숲이 활활 불타고 있었으며, 크고 작은 크레이터 수십 개가 지면 곳곳에 형성돼 도로를 새로 깔아야 할 듯했다.
“앞으로 대련하실 때는 적진 한가운데에서 하시길 추천 드리고 싶군요... 아니, 차라리 지옥에 가서 하시면 악마의 숫자도 줄이고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십니까?”
“....”
“....”
템빨신 그리드와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을 입 다물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라빗 정도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