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05화
Satisfy의 높은 자유도를 이용하는 공격법이 있다.
단순하다. 물건 활용.
발에 치이는 돌멩이, 방금 전 앉아있던 의자, 탁자 위에 놓인 도구들, 혹은 그 탁자 자체 등등.
플레이어는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물질을 만질 수 있고, 도구로 다룰 수 있으며, 무기로 활용할 권리가 있다.
손에 잡힌 물건을 냅다 던지거나 휘둘러서 대상을 공격하는 게 가능하단 뜻이다.
단 이때 공격력은 사용자의 근력에 영향을 받는다. 무기가 아닌 물건들은 별도의 공격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옳은 판정이다. 물건의 형태나 질량에 따라서 사용자의 근력의 최소 1퍼센트, 최대 30퍼센트 적용되는 공격력을 발휘한다.
즉, 효용성이 낮다.
레벨이 441에 도달한 그리드의 현재 근력이 4,400을 돌파하고 있을지언정, 그가 던지거나 휘두르는 물건은 최대 1,400 미만의 공격력밖에 못 내는 것이다. (4차 각성 근력 스탯은 1당 0.8의 공격력을 갖는다)
하지만 물건에 공격력이 극소량이라도 붙어있다면.
예를 들어 방금까지 고기를 썰던 나이프를 무기로 휘두를 경우, 그 나이프는 온전히 무기 판정을 받는다. 사용자의 근력이 100퍼센트 적용된다.
그리드는 바로 그 부분에서 착안했다.
혈검 분쇄.
마력으로 빚은 혈액,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혈액으로 검을 만들고, 파쇄시켜서 광역 피해를 입히는 혈마법.
여기서 혈액은 물질이며, 검이라는 형상은 무기다. 스킬 계수에 의거하여 그리드의 물리공격력 300퍼센트, 마법공격력 200퍼센트의 수치를 내포한 마법검.
만약 그것을 ‘착용’할 수만 있다면, 그리드는 최소 24,585의 물리공격력(+4열망의 무아검을 장착했을 때 기준)과 12,338의 마법공격력을 갖는 무기를 손아귀에 넣는 셈이다.
가설을 세운 그리드는 일단 혈검을 손에 쥐어보았다.
하지만 혈검은 결국 혈액의 집결체다. 손에 쥔 손잡이가 액체로 녹아 흐르는 바람에 ‘쥔다.’는 행위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여,
철컥!!
그리드는 <땡기미>를 활용해보았다.
피와 피로 연결된 혈검의 손잡이 부위에 땡기미를 덧씌움으로써 혈검의 형태를 보존시켰다. 컵이 물을 담는 원리였다. 그리고 땡기미를 손잡이 삼아서 손에 쥐었다.
결과.
[<혈왕의 혈검>을 장착하였습니다.]
“...!!”
혈검이 무기 판정을 받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땡기미라는 특수한 도구, 그리고 ‘모든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는’ 파그마의 후예의 직업 효과가 결합해 핵세타이아의 소검의 위력을 초월하는 무기를 창조해낸 것이다.
오싹!
그리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혈검을 쥔 손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을 느낀 그가 희열에 찬 미소를 머금고 휘둘러 보았...
퍼엉!!
[<혈왕의 혈검>이 파괴되어 소멸합니다.]
[<땡기미>의 내구력이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당장 수리가 필요합니다.]
“큭...!”
실패다.
혈검을 형상화하고 땡기미와 결합시키기까지 2.9초를 소요한 바람에, 휘두르는 순간 3초의 형상 유지 시간이 끝나버렸다.
2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혈액이 검의 형상을 갖추기까지 무려 1.8초의 시간이 걸린다는 점. 혈검 분쇄는 대부분의 혈마법처럼 ‘있어 보이는’ 연출효과를 자랑하는 까닭에 쓸데없이 아름답고 느긋했다. 그래서 가동에 시간이 걸렸다.
둘째, 검의 형상이 애매모호하다는 점.
‘손잡이의 형태를 좀 더 가시화시킬 순 없나?’
땡기미를 검의 손잡이로 삼기 위해서는 당연히 혈검의 손잡이에 덧씌워야한다. 칼날에 대충 갖다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검은 위력이 크게 줄어든다. 그래서야 굳이 이런 수고를 할 의미가 없었다.
“신격, 혈검 분쇄.”
[<신격>의 효과로 <혈검 분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혈검 분쇄.”
땡기미를 수리한 후 재차 스킬을 전개한 그리드의 눈앞으로 혈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한 검의 형상이 아니라 새빨간 혈무를 일렁이는 검이다. 아래로는 뚝뚝, 핏물이 떨어진다.
요도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불길하게 생긴 이 검은,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자욱한 혈무에 휘감긴 탓에 손잡이의 위치가 즉각적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철컥!
손잡이를 포착한 그리드가 즉시 땡기미를 부착했다.
걸린 시간은 3초.
처음보다 길다. 결합과 동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신격, 혈검 분쇄.”
땡기미를 수리하고 다시 도전해본다.
이번엔 혈무가 조금 덜 요란했다.
덕분에 땡기미를 정확히 부착하기까지 2.3초만 소요했다.
다음은 2.4초. 또 다음은 2.8초. 또 다음은 2.7초.
“...이것도 운빨이군.”
혈검을 감싸는 핏빛 안개의 파장이 매번 미묘하게 달라서 학습과 적응을 통한 기록 단축이 불가능하다. 안개가 그나마 옅으면 손잡이를 빨리 식별할 수 있고, 안개가 유독 짙으면 손잡이 식별에 시간이 걸린다. 그마저도 0.1초~0.5초의 차이지만, 그 찰나의 간극조차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형상 구현 속도가 지금보다 0.5초만 빨랐어도 여유 있었을 텐데.’
혈검을 무기화시킨 후 공격으로 연계하려면 무기화를 2초 내에 끝내는 게 이상적이다. 한데 검의 형상을 갖추는데만 1.8초가 걸리니 시간적 여유가 없다.
‘장악력이 필요해.’
압도적인 공격력을 발휘하는 혈검을 무장하고 스킬을 연계, 그대로 파쇄시켜 추가 피해까지 노린다. 신격을 써서 총 7개의 혈검을 소환한 뒤 7개의 땡기미를 부착, 모조리 무기 판정을 받게 만든 다음 <무구의 비>를 내리거나, 5융합 검무를 연속으로 쓴다거나 하면 한 자릿수 대악마도 폭딜을 좌시하지 못할 거다.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강의 콤보다.
그 콤보를 안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선 장악력 스탯을 올릴 필요가 있는 거고.
혈마법의 형상 구현 속도가 빨라지고 유지 시간이 늘어날수록 혈검 분쇄를 기폭제로 삼는 콤보의 연계는 완전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리드가 장악력 스탯을 확인했다.
오늘 혈왕령이 발동한 것으로 아는데 여전히 0이다. 개 같은 게임. 뭐가 됐든 쉽게 주는 게 없다.
“쯧...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그래도 장악력이 올랐을 때를 상상하면 큰 위안이 된다.
혈검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순간부터 누구랑 싸워도 쉽게 지지 않을 거다.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며 전율하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을 품었다.
‘근데... 지금의 나는 혹시 약한 건가?’
17위 대악마 보티스를 레이드한 뒤로 혼자 싸워서 이긴 적이 없는 느낌이다.
‘착각...이겠지?’
삐질, 식은땀을 흘린 그리드가 기억을 되짚어봤다.
드라시온(구 사리엘) 레이드는 인원빨로 밀어붙여서 간신히 성공했고, 미르한테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고, 레라지에에겐 쫄아서 제대로 덤벼볼 엄두조차 못 냈고, 바르바토스의 권속 크르차는 레라지에와 힘을 합쳐서 간신히 무찔렀고, 마리로즈는 그냥 신이고...
근래에 싸워서 시원하게 이긴 기억이 없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적들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와중에 나 혼자만 제자리걸음인 기분이다.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진다.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 받는 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후...”
한동안 신규 아이템을 제작하지 못해서 정체된 까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기엔 석상 레벨이 아쉽다. 석상 레벨이 최소한 1개는 더 오를 때까지 재료들을 아껴두는 게 현명하단 건 바보라도 아는 사실이다.
‘석상 레벨이 오르려면 최소 2주는 더 버텨야할 거 같은데.’
2주 동안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로 지내야하는 건가?
진지하게 걱정하는 그리드의 태도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드라시온, 미르, 레라지에, 크르차, 마리로즈.
그들은 애초에 플레이어 혼자서 대적할 상대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상대들은 몰라도 최소한 크르차 정돈 혼자서 사냥해야할 수준이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의 권속.
바르바토스는 그리드가 끝내 넘지 못할 벽일 수도 있지만, 크르차는 결국 권속, 쫄따구 아닌가.
비록 놈이 바르바토스의 지원 사격을 받고 있었다곤 해도, 쫄따구조차 쉽게 레이드하지 못했다는 건 굉장히 화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바르바토스의 권속은 여럿이고, 놈들과 싸울 때는 항상 바르바토스의 엄호가 뒤따를 거다.’
그리드와 바르바토스는 명백히 적대 관계가 되었다. 지옥에서 활동하다가 바르바토스의 권속에게 갑자기 습격 받아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바르바토스의 권속 정도는 혼자서 때려 부술 정도의 힘을 갖춰야했다.
결론을 내린 그리드는 일단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의 나는 정확히 어느 수준일까.
확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다음 헬가오 리젠 타임에 혼자서 잡아볼까? 아니, 헬가오의 패턴은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니까 그건 진검 승부라고 볼 수 없어.’
누구랑 싸워야 실력을 제대로 점검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리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빛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이어서 굉음이 폭발했고, 산 하나가 무너졌다.
탐욕을 단조 중인 브라함이 일으킨 재해다.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바르바토스의 지원 사격 따위 무시하고 크르차를 손쉽게 사멸시켰을 인물.
위대한 대마법사 브라함을 상대로, 지금의 자신은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아군의 전투력을 파악해놓는 건 당연한 의무다.
“순보.”
그리드의 몸이 방금 막 반파된 산의 정상으로 옮겨졌고,
“드디어 덤벼보는 거냐.”
브라함의 홍옥 같은 눈동자엔 이미 그리드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었다. 등지고 선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그리드를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오만에서 비롯된 미소 따위, 흔적도 없었다.
최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건 브라함도 마찬가지였다.
브라함 또한 실력을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때마침 투지를 드러내며 찾아온 그리드는 브라함 입장에서도 무척 반가웠다.
“대련, 응해주시는 겁니까?”
“나는 살면서 승부를 피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트라우카는...”
콰아앙!!
브라함이 먼저 선공에 나섰다.
하늘을 거슬러 오르는 불의 비가 그리드를 덮쳤다.
파직!
끊임없이 솟구치는 불의 비를 일일이 베어서야 끝이 없다.
뇌전에 휩싸인 그리드의 몸이 격발됐고, 블링크를 써서 회피한 브라함은 곳곳에 디코이를 깔았다.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초월자를 상대로 디코이만큼 유용한 마법도 드물다. 수십 개의 디코이를 브라함의 기척으로 읽은 초월자의 감각이 그리드를 혼란시켰다. 하지만 그리드는 침착하게 파의 검무로 응수했다.
수십 줄기의 검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지는 그 순간.
퍼펑! 퍼퍼퍼퍼펑!!
갓 핸드들이 수십 개의 물 폭탄으로부터 그리드를 보호했다.
그리드의 대응보다 브라함의 역습이 빨랐던 것이다.
콰르르르릉!!
무너진 산의 잔해가 그리드의 발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지의 방벽이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솟구치는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만 했다.
촤하하학!!
물 폭탄이 폭발하며 쏟아졌던 수류가 대지의 방벽과 뒤섞이며 진흙을 만든다. 하늘에 가득 번진 진흙의 파도는 그리드의 시야를 봉쇄했고, 이는 즉 그리드의 전투력이 반감했다는 의미와 같았다.
전율하는 그리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브라함의 건재함에 안도했고, 그런 브라함을 상대로 반격의 실마리를 찾은 본인의 발전에 희열을 느꼈다.
“지신.”
콰과과과과과과광!!
그리드를 집어삼킬 듯이 뒤쫓던 진흙의 파도가 도리어 브라함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숨 쉬듯 당연하게 그것을 관조, 소멸시킨 브라함의 좌우로 수백 개의 빛이 번쩍였다.
매직 미사일의 세례다.
“아... 아아아...”
하늘과 땅을 오가는 검과 마법의 격돌을 멍하니 바라보던 행정관 라빗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