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6권 - 04화
『신규 종족 뱀파이어가 해금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종족을 뱀파이어로 바꾼 플레이어의 숫자가 단 하루 만에 100만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되며...』
『오크 때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입니다. 오크가 해금 됐을 당시엔 사람들의 종족 변경이 매우 신중하지 않았습니까? 계정당 종족 변경 가능 횟수가 2회에 불과할뿐더러, 종족마다 장단점이 있어 득실을 저울질하는데 긴 시간을 소요했었죠. 한데 뱀파이어는 해금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있습니다. 고작 하루 만에 마을에서도, 사냥터에서도 뱀파이어를 만나는 일이 흔해졌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종족 고유 특성 중에 흡혈이 있다는 점이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거겠죠. 생명력 회복 수단이 다른 게임보다 극단적으로 적은 Satisfy에서 흡혈은 훌륭한 생존 수단이니까요. 그리드와 카츠 등, 흡혈 능력을 보유한 랭커들이 레이드와 대규모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숱하게 목격해온 사람들은 흡혈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너무 위험한 거 아닌가요. 햇빛에 노출됐을 때 능력치가 30퍼센트 하락하고 일부 스킬이 비활성화 된다... 뱀파이어의 약점은 안 그래도 치명적인데 배후에는 혈왕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까지 버티고 있잖습니까. 잘 알아보지도 않고 뱀파이어가 된 사람들은 위기감이 없다고 해야 할지...』
혈왕.
뱀파이어를 지배한다는 수수께끼의 존재.
시스템은 혈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강제하진 않지만, 의무라고 명시하고 있다. 명령을 거부할 시 페널티가 뒤따를 게 뻔했다.
만약 혈왕이 그릇된 명령이라도 내릴 경우 난처한 상황들이 연출될 것이다.
『애초에 뱀파이어는 마족이라고요, 마족. 인간의 피를 식량으로 삼는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다. 뱀파이어가 됐다간 혈왕에게 인간들을 사냥하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어요.』
『종족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겁니다!!』
전문가들은 염려했고, 사람들은 공감했다.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놈에게 놀아나 기존의 동료와 친구들을 해치는 광경을 상상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온갖 위험요소를 감안해도 매력적인 종족이었다.
흡혈과 혈마법의 높은 잠재력은 둘째 치고, 기본 능력치 자체가 매우 우수했다. 근력과 체력에 특화된 대신 지력이 낮은 오크처럼 능력치가 편향된 것이 아니라 밸런스가 좋으면서도 모든 능력치가 높았다. 명백히 인간의 상위호환인 셈이다.
대신 햇빛에 노출되면 약해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낮 시간대엔 던전이나 실내에 틀어박히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외향이 굉장히 멋졌다. 뱀파이어로 종족을 변경하면 인간일 때와 비교해서 몇 배는 아름답게 외모가 보정됐다.
일생에 단 두 번밖에 못하는 종족 변경이므로 신중해야한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두 번밖에 없는 기회이므로 뱀파이어가 되기를 선택했다.
심지어 이미 오크로 종족을 바꿨던 사람들이 뱀파이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왕이면 더 강하고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자칫 혈왕의 꼭두각시가 될 수도 있다?
설령 혈왕의 병사가 되어 인간들과 싸우게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종족을 바꾼 시점부터 인간이 아닌 것을...
뱀파이어가 된 플레이어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될 뿐’이라고 주장하며 전문가들의 염려를 일축했고, 전문가들은 그들의 행태를 ‘안전 불감증과 편의주의가 빚어낸 비극’이라고 비난했다.
걱정이 들끓는 가운데.
[<혈왕령>이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혈왕은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을까.
뱀파이어가 그에게 복종해야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의문과 긴장 속에서,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은 혈왕령의 정보를 개봉했다.
혈왕령의 내용이 혈왕의 정체를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줄 거라고 믿으며.
<혈왕령>
난이도:B
레이단 사막의 몬스터 ‘자이언트 웜’은 지하를 유영하다 종종 뱀파이어의 도시를 침략합니다. 자이언트 웜을 사냥해서 도시의 치안 유지에 도움을 줍시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일주일 내에 자이언트 웜 50마리 처치(0/50)
퀘스트 클리어 보상:경험치 0.4퍼센트. 혈마법 숙련도 상승. 블러드 포테이토 10개.
<혈왕령>
난이도:C
사막의 오아시스에 도사리다가 여행자들을 해치는 몬스터들이 있다는 소문입니다. 오아시스를 정화해서 여행자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도시의 활성화에 이바지합시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일주일 내에 3개의 오아시스 정화(0/3)
퀘스트 클리어 보상:경험치 0.3퍼센트. 혈마법 숙련도 상승. 블러드 포테이토 10개.
<혈왕령>
난이도:E
뱀파이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이나 몬스터의 혈액을 섭취해야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구시대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재배하는 <블러드 포테이토>가 동족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습니다. 도시의 농부들을 도와 <블러드 포테이토>를 수확하세요.
퀘스트 클리어 조건:일주일 내에 블러드 포테이토 100개 수확(0/100)
퀘스트 클리어 보상:경험치 0.2퍼센트. 혈마법 숙련도 상승. 블러드 포테이토 10개.
“...평범해!?”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에게 도착한 혈왕령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뱀파이어 도시가 있는 레이단 사막의 치안을 위해 싸우거나 농업을 돕거나 하는 식이었다.
지극히 평범하다.
긴장하고 있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여행자를 위협하는 몬스터를 처치하라고? 이쯤 되면 평범한 정도가 아니라 착한 거 아니냐.”
“혈왕 뭐야... 이름이랑 하는 짓이 안 어울려...”
뜻밖의 전개가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예상과 달리 너무 평범해서 맥이 빠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뭐, 살인을 저지르거나 종족 간의 전쟁이 발발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안도한 사람들이 이내 혈왕령의 보상에 집중했다.
확정 경험치 보상.
퀘스트 난이도에 따라서 최소 0.1퍼센트, 최대 0.5퍼센트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다.
몬스터 몇 마리만 잡아도 경험치가 오르는 저레벨 구간에선 전혀 가치가 없는 보상이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이 보상은 천금보다 귀해진다. 특히 하이랭커급 고레벨 플레이어들은 혈왕령이 일일 퀘스트가 아닌 주간 퀘스트라는 사실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카츠였다.
“퀘스트 난이도는 랜덤인가...”
하필 난이도 F의 퀘스트가 걸리다니.
F등급 퀘스트의 경험치 보상은 0.1퍼센트... 매우 화가 나지만, 이마저도 감지덕지긴 하다.
애써 위안 삼는 카츠의 기분은 아직도 얼떨떨했다.
에픽 클래스가 하루아침에 고대 클래스로 승급하다니.
현실이 아니라 꿈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흔해진 에픽 등급의 전직서를 20억이 넘는 가격에 샀던 과거의 자신을 호구였다고 종종 자조하곤 했는데, 20억짜리 전직서가 100억, 1,000억짜리 가치의 전직서로 탈바꿈한 상황이다.
급격하게 바뀐 현실이 실감나질 않았다.
“큭큭...! 크하하핫!!”
블러드 포테이토 밭에 짐승의 피를 뿌려 혈왕령을 수행하던 카츠가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그래, 블러드 워리어는 평범한 에픽 클래스와 달랐다.’
등급은 에픽이지만 위력은 유니크 등급과 견줄만했다.
수에론의 영혼 약탈자와 비교해서 크게 꿀릴 게 없었을 정도다.
단, 뱀파어들과 달리 마력으로 피를 빚지 못하고 무조건 자신이나 타인의 피를 매개로 써야만 스킬을 발동시킬 수 있다는 점이 큰 약점이긴 했지만.
촤르르륵!!
이젠 아니다.
마나를 소모해서 자체적으로 피를 만들고,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굳이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항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조건부 강자가 아닌 완전체다.
이쯤 되면 진짜 지존... 음, 그리드가 있으니 지존은 안 되겠고 탑3 정도는 노려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페이커며, 유라며. 크라우젤 외에도 강한 놈들이 잔뜩 있긴 하지만 이 몸은 고대 클래스. 승산이 있다.’
그리드와 등을 맞대고 서로를 의지하는 미래를 떠올리며 미소 짓던 카츠가 불현듯 의문에 휩싸였다.
‘근데 왜 월드 메시지가 안 뜨는 거지?’
카츠는 눈에 띄는 걸 좋아한다.
초창기엔 고강화 무기를 자랑하려고 일부러 마을 한복판에 서있는 걸 즐겼을 정도의 관종이다.
기껏 최초로 고대 클래스로 전직했건만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있단 점이 카츠는 영 불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리드를 비롯한 대부분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들도 전직 후 시간이 꽤 경과한 후에야 월드 메시지로 전직이 공개됐었다.
‘뭔가 다른 조건이 있는 건가?’
그 조건이 뭔지 빨리 알아내야만 한다.
그래야 나 카츠가 세계 최초의 고대 클래스 전직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다.
[‘블러드 포테이토 밭에 피 뿌리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혈왕령 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
최초의 고대 클래스 전직자인 내가 밭에 물 아니, 피나 주고 있다니...
자괴감을 느끼는 카츠였지만 경험치 0.1퍼센트의 보상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당분간 이 전직 퀘스트라는 것부터 해볼까.’
<베리아체의 그림>을 찾으라는 내용의 퀘스트.
대악마 주제에 왜 그림 따윌 그린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더 단서를 찾기 힘들겠지만 어쨌든 뭐라도 해야 한다.
초조함에 휩싸인 카츠가 밭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네놈은?”
익숙하고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반푼이 카츠가 아닌가.”
“수에론.”
영혼 약탈자.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몇 번이나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곤 하지만, 수에론은 여전히 Satisfy를 대표하는 최강자 중 하나다. 전쟁터에서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요주의 인물로 꼽혔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카츠 네놈도 뱀파이어가 된 거냐.”
“원수? 내가 왜 너 따위의 원수지?”
“놈... 비겁하게 현상금을 걸어서 나를 괴롭혔던 사실을 기억에서 지운 거냐?”
그리드의 템빨에 이어 카츠의 돈빨에 희생당했던 수에론은 카츠에게 여전히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맞은 놈은 기억해도 때린 놈은 기억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일이 있었나?”
“흥! 됐다! 승부다!!”
영혼 약탈자는 죽은 대상의 영혼을 뽑아 공격수단으로 삼는다. 카츠의 블러드 워리어처럼 시체가 많아야 강해지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유니크 클래스인지라 블러드 워리어보단 전체적인 성능이 뛰어났다.
대상이 살아있을지라도 영혼에 개입해서 움직임에 장애를 일으키는 등 전투에 최적화된 스킬들을 보유했다.
츠캉!
블러드 포테이토를 수확하려고 구매해온 호미를 내려놓은 수에론이 검을 뽑아 쥐었다.
그는 카츠를 손쉽게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피를 흘리지 않으면 된다. 압도적으로 뭉개버리면 그만이다.
“시체가 없는 이곳에서 네놈은 평범한 전사에 불과하지!”
자신만만하게 소리친 수에론이 <영혼 구속>을 전개함과 동시였다.
“블러드 토네이도.”
“...!?”
수에론의 주변으로 혈류가 똬리를 틀더니 곧바로 피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혈마법이 아니다.
이제 막 뱀파이어로 전직한 플레이어들은 아직 고난도의 혈마법을 습득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게도 이건 블러드 워리어의 스킬인 것이다.
‘피 한 방울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과 달라진 카츠의 능력에 놀란 수에론이 당황하다가 문득 깨닫고 감탄했다.
“그렇군. 네놈, 블러드 포테이토의 수분을 자원으로 삼은 건가? 큭큭,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순발력이군.”
“아니... 마나로 쓴 거다.”
“흥, 내가 밭에서 벗어날 걸 염려해 바로 거짓말부터 지껄이는 거냐. 더러운 돈으로 살수를 썼던 놈답게 담대하지 못하구나.”
“싸우는 장소 따위 상관없다. 최초의 고대 클래스 전직자인 난 언제, 어디서든 최강이니까.”
“....”
수에론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대 클래스?
존재하지도 않는 등급을 지껄이는 카츠의 허풍이 질린다는 반응이었다.
같은 시각.
“오, 과연.”
그리드는 <혈검 분쇄>를 전개할 때 생성되는 혈검을 손에 쥐고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혈검 하단에 <땡기미>를 부착해 손잡이로 삼은 것이다.
그것으로 ‘마법의 형상’이 아이템 판정을 받았다.
혈액이라는 ‘물질’로 구성된 혈마법의 특징을 이용한 결과였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