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01화 (1,291/1,794)

템빨 66권 - 02화

혈마법은 학문(學問)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공부와 노력 등의 개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

혈마법은 순전히 혈통에서 기인하는 힘이며, 베리아체의 권능에 기원을 둔다.

베리아체의 피와 마력을 티끌만큼이라도 계승한 존재들. 즉, 뱀파이어는 누구나 혈마법을 쓸 수 있지만 뱀파이어가 아닌 존재는 혈마법을 쓸 수 없다.

<혈왕>의 칭호를 얻은 그리드조차 혈마법을 습득하기 위해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직계’의 혈마법을 흡수(이마저도 자신의 성격과 상성이 좋은 혈마법으로 국한된다)하는 방법밖에 없을 정도이니.

혈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 ‘뱀파이어의 정점’인 마리로즈의 혈마법을 무효화시키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데 방금 그 일이 일어났다.

그리드에 의해서.

“너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해?”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이며 그리드를 바라보던 마리로즈가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물었다.

그윽한 눈길엔 호기심과 호감이 반반씩 섞여있다.

혜안의 주인답게 눈치가 빠른 메르세데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빛을 차갑게 가라앉혔지만, 정작 눈길을 받은 당사자 그리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지금의 그는━

“...당신한테 잡아먹힐 뻔 했었죠.”

단지 엄청나게 무서워서 벌벌 떨 뿐이다.

마리로즈와 처음 만난 날이라.

동파육이었는지, 깐풍기였는지, 이젠 이름조차 기억 안 나는 사기꾼 힐러의 피를 ‘웃으며’ 쪽쪽 빨아먹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리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무섭다.

“....”

“....”

마리로즈와 메르세데스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잠시 침묵한 그녀들이 곧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먹힐 뻔 했었다라. 네겐 그날의 추억이 고작 그 정도였구나.”

“당신은...! 당신은 처음부터 전하의 정조를 노렸던 겁니까!!”

“흐음~ 여기사 너는 꽤 까졌네.”

“무, 무슨 말씀을!”

잠시, 분위기가 진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상황 파악이 안 될 땐 잠자코 있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학습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마리로즈는 메르세데스에게 적의를 품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언성을 높이는 인간을 저토록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니.

두 사람을 빤히 관찰하던 그리드가 문득 이유를 깨달았다.

‘혜안 때문인가.’

신조차도 경계하는 힘.

대악마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그 힘은 마리로즈에게도 탐나는 것일 터.

‘그렇군. 마리로즈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엔 메르세데스의 존재도 포함되는 거야.’

나를 얻으면 메르세데스의 힘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일 테니.

‘즉, 원 플러스 원...’

편의점 상품이 된 느낌이지만 뭐, 상관없다.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인 마리로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원 플러스 원이 아니라 원 플러스 투 취급을 받아도 좋았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동안 분위기가 진정됐다.

메르세데스는 이성을 되찾았고, 마리로즈는 그런 메르세데스를 더 이상 놀리지 않았다.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리드.”

“넵.”

“나는 너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해.”

“....”

내가 상태이상에 면역하는 걸 보고 놀랐었던가?

첫 만남을 돌이켜보는 그리드에게 마리로즈가 웃으며 설명했다.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나는 괴물 취급을 받으면서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어. 한데 너는 그런 나의 봉인을 풀어놓고도 태연했지. 마치 죄 따위 저지르지 않았다는 듯이.”

‘....아, 기억났다.’

당시의 그리드는 마리로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리로즈가 누군지 관심조차 없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설령 마리로즈가 ‘재앙’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때 당시의 그리드는 세계의 평화나 인류의 안전을 신경 쓸 위치가 아니었을 뿐더러 지극히 이기적이었으니까.

자신이 괴물의 봉인을 풀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환을 염려할 인물이 못 됐었단 뜻이다.

“나의 봉인을 풀고, 나와 당당히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내게 아무런 적의도 보이지 않는 너를 보고 나는 기뻤어. 태어나 처음으로 베리아체의 자식이 아닌, 마리로즈라는 개인으로 평가 받는 기분이었거든.”

“....”

마리로즈는 재앙도, 괴물도 아니다.

역사에 정확하게 기록된 마리로즈의 악행은 제2대 교황 크레이슐러와 레베카의 딸들을 해쳤다는 것 외에 없다. 인간들의 피를 흡혈했다는 기록은 그녀가 단지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붙은 대전제일 수도 있다.

‘심지어 크레이슐러는 마리로즈가 아닌 파그마에게 죽었다.’

마리로즈는 인간들은 해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자신이 괴물 취급 받은 이유는 단지 베리아체의 딸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거겠지.

“무엇보다도 봉인을 풀어준 게 고마웠고 말이야. 봉인을 풀 능력이야 있었지만 귀찮아서 하염없이 미루고만 있었거든. 나를 봉인했던 관은 어딘지 모르게 불쾌해서 종종 악몽을 꾸곤 했는데 제법 끔찍했어.”

‘크레이슐러 그 변태 영감탱이.’

크레이슐러는 영원히 마리로즈를 품고 싶다는 열망으로 관짝의 에고가 되는 걸 서슴치 않았던 인물이다. 잠들어 있는 마리로즈에게 얼마나 변태 같은 사념들을 전달했을지, 상상만으로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런 네가 혈왕이 되어 내 배필이 될 자격을 얻고, 블러드 마스터의 힘까지 얻어 나와 대등한 위치까지 올랐으니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뭘까.”

블러드 마스터.

베리아체의 내의에 귀속된 스킬이다. 혈마법에 완전 면역하는 기능을 발휘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은 5분. 만약 마리로즈가 적이었다면 쉴 새 없이 퍼붓는 혈마법의 파상공격을 견디지 못했을 테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블러드 마스터의 힘을 얻었다는 건, 지옥을 다녀왔단 거려나.”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응, 브라함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는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야한단 말이야. 어머니가 지옥에 남긴 안배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어.”

‘안배.’

투쟁의 대악마 레라지에.

베리아체의 안배는 지옥에서 착실하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언젠가 지옥에 행차할 마리로즈에게 분명한 힘이 되리라.

“네가 내 어머니의 속옷을 입고 다니기로 결심했다는 건 제법 대단한 것 같아.”

“...!?”

기사인 메르세데스는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주인에겐 더더욱.

그런 그녀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리드를 돌아본 것은, 마리로즈의 발언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리드가 다급히 설명했다.

“베, 베리아체의 속옷은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형태를 바꾸는 마법의 속옷이야!”

“네, 전하를 믿...습니다.”

“...믿는 거 맞지?”

자꾸만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마리로즈 자체가 부담되는 상대이기도 했기에, 그리드는 이 자리를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불편한 시간이 길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혈왕이라는 건 정확히 뭡니까? 저는 혈왕이 모든 뱀파이어의 왕이라고 들었는데 당신의 태도를 보면 전혀 왕 취급을 못 받는 것 같은데요.”

“왕 맞아. 그래서 나의 배필이 되어야만 하는 거고.”

“혈왕이 당신의 배필이 돼야 하는 이유는 뭡니까?”

“나는 오직 혈왕하고만 사랑을 나눌 수 있거든. 내가 사랑을 나눠야 어머니가 낳은 직계들보다 더 강력한 직계를 낳을 수 있고.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옥을 징벌할 군대가 되는 거야.”

“제가 거절하면... 당신의 복수는 이뤄지지 못하는 겁니까?”

마리로즈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놀란 눈으로 그리드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곧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혈왕의 자격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복수가 실패할까봐 걱정하는 거니?”

“혈왕이라는 지위가 결국 당신과 뱀파이어들을 위한 안배라면, 책임 질 각오도 없는 제가 짊어질 자격은 없겠죠.”

호감도를 올리는데 도가 튼 그리드이다.

역시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후훗... 역시 넌 귀여워. 근데 나와 사랑을 나누는 걸 거부하는 이유가 뭐야? 내 외모와 성격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라고 자부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특히 외모는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그리드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이미 복수형이네. 그럼 한 명 더 늘려도 상관없잖아?”

“...지금 품고 있는 사랑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놈입니다.”

“....”

시선을 떨구는 그리드.

그의 눈빛에 담긴 혐오와 증오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리로즈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개 숙인 그리드는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뭐, 거절해도 괜찮아. 대신 네가 힘들어질 각오를 해야 돼. 혈왕의 의무는 나와 함께 어머니의 복수를 이루는 건데 자식을 낳아 대행자로 내세울 게 아닌 이상 네가 직접 싸우는 수밖에 없어.”

그러므로 네가 의무를 거부하는 순간 혈왕의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 라는 설명을 덧붙이기도 전이었다.

“싸우겠습니다.”

어느새 고개를 든 그리드가 마리로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가 당신과 함께 싸울게요.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아까운 남자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좋아. 아쉽지만 너의 뜻을 존중할게. 대신 너도 방금 전의 맹세를 반드시 지켜줘야 돼. 만약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 네가 날 외면한다면, 그때는 강제로라도 너의 아이를 잉태하는 수밖에 없어.”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의 호감도가 10을 돌파하여 <혈왕의 탄생비화>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었습니다.]

<혈왕의 탄생비화>

홀로 인계를 배회하며 고독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절감했던 베리아체는 마리로즈를 위해서 한 가지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모든 직계의 왕으로, 직계를 낳을 수 있는 <혈왕>의 지위를 마리로즈에게 주지 않고 세상에 내놓은 것입니다.

마리로즈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혈왕이라는 짝이 필요합니다. 그녀는 베리아체와 달리 혼자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정보의 열람으로 <혈왕>의 숨겨진 기능이 공개됩니다.]

<혈왕>

종류:패시브

★마리로즈와 혼인 가능.

*혼인 후 자식을 낳을 수 있습니다.

★마리로즈와의 호감도가 상승할 때마다 마리로즈를 제약하는 나태의 저주가 약화.

*나태의 저주가 약화될 때마다 마리로즈의 모든 능력치가 10퍼센트씩 상승. 최대 150퍼센트.

★특정 조건 충족 시 혈마법 개화.

*개화하는 혈마법은 당신의 성격을 따릅니다.

★특정 조건 충족 시 직계 뱀파이어 해방 가능.

*해방 된 뱀파이어는 나태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

현재 그리드가 사용할 수 있는 혈마법은 총 5개다.

엘핀스톤을 해방하고 얻은 <극한의 수혈>과 티라멧을 해방하고 얻은 <재생의 혈류>는 흡혈과 치유계열, 크레이와 에티마를 해방하고 얻은 <혈류 파동>과 <혈검 분쇄>는 공격계열, 놀의 충성심이 부여해준 <역전의 공혈>은 광역 버프계열.

브라함은 뱀파이어의 권능을 잃었고, 마리로즈는 혈왕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앞으로 총 3개의 혈마법을 더 얻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젠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혈왕이 마리로즈에게 걸린 나태의 저주도 풀어준다고 정확히 명시된 이상, 그녀의 저주가 풀리는 순간 그녀와 관련된 혈마법을 추가로 얻을 거라고 기대해 봐도 좋을 듯했다.

‘그래도 좀 아쉽긴 하군.’

혈왕의 진가는 마리로즈와 혼인해서 직계를 생산할 수 있다는 부분에 있다. 마리로즈와 혼인하지 않는 이상 혈왕의 가치는 온전히 발휘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드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순간이었다.

[템빨신 ‘그리드’가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와의 혼인을 거부하였습니다.]

[직계를 낳을 수 없게 된 마리로즈가 차선책을 꺼내듭니다. 뱀파이어의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대륙 곳곳에 숨겨두었던 <피의 우물>을 개방합니다.]

[기존의 플레이어는 <피의 우물>을 이용해서 뱀파이어로 종족을 변경할 수 있으며, 신규 플레이어는 캐릭터 생성 시 종족을 뱀파이어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뱀파이어는 <혈왕>의 지배하에 놓입니다.]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크에 이은 두 번째 이종족의 공개.

새로운 업데이트를 보고 흥분한 플레이어들은 환호하기에 앞서 그리드부터 욕했다.

그리드를 향한 여론은 최근 몇 년 동안 최고였는데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그리드 미쳤음?

-와, 저 고자새끼 하다하다 이젠 마리로즈 누나를 걷어차네.

-지가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우리 누나를! XX!!

-아오!! 그리드 저 XX 저거 내가 그리드였으면 마리로즈랑 이렇게 저렇게! 아오! 젠장!! 빌어먹을!!

-나는 그저 부럽다.

-나도 그저 부럽다...

마리로즈가 세계관 최고의 미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리로즈의 이미지를 검색해봤고 첫눈에 반하곤 했다. Satisfy를 안 하는 사람도 마리로즈의 얼굴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녀와의 혼인을 거부한 그리드를 남자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피눈물을 흘리며 부러워할 뿐이었다.

한편 카츠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블러드 워리어>에 잠재되어 있던 베리아체의 마력이 개화합니다.]

[종족이 인간에서 뱀파이어로 강제 변경됩니다. 일부 스킬과 능력치에 변동이 생깁니다.]

[에픽 클래스 <블러드 워리어>가 고대 클래스 <베리아체의 전사>로 변경됩니다.]

<베리아체의 전사>

태초의 지옥에서 서열 제3위의 대악마 베리아체를 섬겼던 전사입니다.

“...막장이군.”

고대 등급.

마장기의 유물 등급과 등호를 이루는 등급인 건가.

하루아침에 격변을 맞이한 카츠는 너무 황당해서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