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300화 (66권) (1,290/1,794)

템빨 6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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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66권 - 01화

“이건.... 레베카 여신의 초상화군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착각했던 눈치다.

세 번째 그림을 보고 흠칫 놀라 뒷걸음친 메르세데스가 뒤늦게 그림의 정체를 파악하고 자세를 고쳤다.

“마치 저희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모나리자의 시선이다.

그림을 어느 방향에서 보든, 그림 속 레베카의 시선은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를 쫓아왔다.

‘소름 돋는군.’

모나리자처럼 온화한 얼굴이었다면 그나마 신비롭다는 감상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레베카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깔보는 듯한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붙으니 영 불쾌하고 소름끼친다.

“악마가 그린 그림이겠죠?”

메르세데스 또한 드라시온 레이드에서 활약했다. 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악행을 저지른 천사들의 추태를 그녀도 목격했다.

‘신은 무조건 선하다’는 진리가 그릇됐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신이 악하다’는 귀결을 내놓은 건 아니다.

아직 인류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아마도. 인간의 작품은 아니겠지.”

레베카에 대한 해석은 차치하고, 태초의 지옥을 알고 있다는 점만 봐도 미상의 작가는 악마일 확률이 높다. 이곳이 마리로즈의 성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작가의 정체는 베리아체일 수도.

‘...아니, 베리아체일 가능성은 낮다.’

만약 그녀가 작가였다면, 자신을 지옥에서 추방한 야탄도 레베카만큼이나 흉측하게 묘사했을 테니까.

저벅.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그림 속 레베카의 시선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제길, 설마 귀신같은 건 아니겠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다.

레베카의 시선이 계속해서 쫓아오는 느낌이다.

“전하?”

귀신은 싫다. 무서운 건 아니고(아마도) 생리적으로 싫다.

급기야 뛰기 시작하는 그리드를 메르세데스가 뒤쫓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드디어 네 번째 그림을 발견하고 그 앞에 멈춰 섰다.

네 번째 그림의 주인공은 다시 야탄이었다.

단지 검게 칠해진 존재.

홀로 벼랑 위에 선 그는 아래를 굽어보는 듯했다.

그의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어둠.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에선 관(冠)처럼 당당하게 일렁였던 그것이 이젠 꺼지기 직전의 불씨처럼 기세가 사그라졌다.

“왠지 의기소침해 보이네요.”

예술에 정답은 없다.

작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보는 이의 해석에 따라서 작품의 본질이 결정된다.

그리드는 메르세데스의 감상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도리어 적절한 감상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위 어둠의 기세가 약해진 까닭일까, 벼랑 아래를 내려 보느라 자연히 굽어진 등 때문일까.

그림 속 야탄은 정말로 기운이 없어 보였다. 고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악의 근원이 저런 모습이라... 딱히 어울리진 않는다.

저벅저벅.

두 사람은 조금 더 걸었다.

곧 다섯 번째 그림 앞에 섰다.

두 번째 그림에 등장했던 적색과 녹색, 그리고 거인이 야탄의 곁으로 다가와 서있었다. 야탄은 다시 허리를 올곧게 펴고 머리 위 어둠을 위풍하게 불태웠다.

“기운을 되찾은 느낌이네요. 신은 혼자 존재하는 것으론 의미가 없다, 섬김 받아야 비로소 신이다, 라는 것을 표현하는 걸까요.”

과묵한 메르세데스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다.

이쯤 되면 평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은 눈치다.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가 원래 살던 저택엔 여러 그림이 장식돼 있었지.’

메르세데스가 황제의 기사였던 시절.

그녀는 자신의 저택에서 네 번째 기사 규라탄(대악마 아스타로트)의 습격을 받았고 그리드가 그녀를 도왔다.

당시 처참히 무너진 저택 외벽을 통해 저택의 내부가 어렴풋이 노출됐었다. 온갖 그림들이 걸려있던 광경이 그리드의 기억에 스쳤다.

‘나는 왜 이제야 떠올린 거지.’

말로만 소중하다 해놓고 사실은 메르세데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이마를 감싸 쥐었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성의한 인물인지 새삼 실감했다.

‘생각해 보면 지슈카도 기껏 나 때문에 한국까지 이민 왔던 건데.’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녀가 한국까지 이민 온 이유는 어떤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함일 거라고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까지 부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자신을 향한 지슈카의 감정은 진짜였으니.

자신은 그녀의 마음을 짓밟았다.

그녀를 위한 선택이었다곤 하지만 그녀 입장에선 납득할 수 있었을까.

‘...나는 쓰레긴가.’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지슈카의 문제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지금은 매우 중요한 구간이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감상이었어요.”

그리드가 한동안 침묵하자 메르세데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얕은 해석으로 주군의 집중을 방해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메르세데스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리드가 이 순간 다짐했다.

앞으로 좋은 그림들을 수집해서 메르세데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동시에 생각했다.

다섯 번째 그림 속 야탄이 기운을 되찾은 건 사실 허세가 아닐까, 그런 의심을 품어봤다.

그림의 정황이 그랬다.

세 번째 그림에서 갑자기 레베카 여신이 나타났고, 바로 다음 그림에서 야탄은 고뇌했다.

레베카 여신에게 어떤 교활한 속삭임을 들었기 때문일 테지.

그 속삭임은 세계의 파괴와 수복을 제안(혹은 논의)하는 것이었을 테고, 야탄의 고뇌는 깊어졌을 것이다.

바로 기운을 되찾았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단 뜻이다.

“....”

여섯 번째 그림엔 수십 개의 ‘색’이 칠해져 있었다.

흑색 야탄과 거인이라는 특징을 지닌 바알을 제외하고 정확히 32개의 색이었다.

셋밖에 없던 악마가 서른셋으로 늘어난 것이다.

33 대악마의 탄생이었다.

일곱 번째 그림은 풍경화였다.

울퉁불퉁한 대지. 매캐한 하늘. 붉은 강.

그리드가 지옥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풍경이 담겨있었다.

이어지는 여덟 번째 그림엔 수많은 마족들이 출현했다.

넓지만 영양가 없는 지옥의 대지를 각기 다른 모습의 마족 수천 마리가 빼곡히 채웠다.

아홉 번째 그림에선...

“아오, 깜짝야.”

다시 레베카 여신이 등장했다.

세 번째 그림과 마찬가지로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려진 초상화였다.

실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빛의 파동을 관처럼 머리 위에 띄운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인자하게 웃는 모습.

인류에게,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는 빛의 여신.

사람들이 흔히 아는 레베카 여신의 모습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고 행복해진다.

이 그림을 세상에 공개하는 순간 레베카교가 부흥할 거라는 확신이 생길 정도다.

역시, 레베카 여신만큼은 선한 존재가 아닐까....

데미안을 찔러 죽이고 인류를 멸살시키려고 했던 천사들의 행동은 독단, 혹은 레베카 여신을 시기하는 다른 어떤 신의 사주가 아니었을까.

그리드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촤르르르륵!!

액자가 회전하더니 그림의 뒷면이 드러났다.

아홉 번째 그림에 이은 열 번째 그림.

그것은 살육도였다.

야탄을 표현하는 흑색이 지옥과 지옥 위 인계로 넓게 뻗어나가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촤르르르륵!!

액자가 한 바퀴 더 회전했다. 그러자 다시 레베카 여신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세 번째 그림과 마찬가지로 흉측하게 미소 짓는 레베카 여신의 초상이었다. 가지런히 모은 여신의 두 손이 붉은 물감으로 덧칠됐다.

피를 뜻함이라.

“....”

불쾌하다.

그림에서 물러선 그리드가 메르세데스의 손을 붙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게 뻗은 복도.

그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하나의 횃불이 타오르며 앞길을 밝혀주지만 그 끝은 여전히 심연이다.

‘끝이 있긴 있는 건가?’

이쯤 되면 환혹 마법에 걸린 게 아닌지 의심이 생길 지경.

슬슬 초조함을 느끼던 그리드가 걸음을 멈췄다.

새로 밝혀진 횃불 아래 열한 번째 그림이 보였다.

주저앉은 흑색.

마치 오열하듯 주저앉은 악신 야탄의 그림이었다.

야탄의 깊은 후회와 슬픔이 느껴졌다.

“이 작품을 만든 이는 레베카를 파멸의 원흉으로, 야탄을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군요.”

“음...”

이쯤 되면 피해자라기보다 호구 아닌가.

레베카의 뜻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미상의 작가는 야탄을 딱 그 정도 수준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과 악을 논할 가치도 없는 허접쓰레기.

‘이제 보니 이거.’

베리아체의 작품이 맞는 듯하다.

레베카와 야탄을 둘 다 깎아내리는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뚜벅뚜벅...

그리드와 메르세데스는 계속해서 걸었다.

복도는 끝나지 않았고, 그림 또한 끊임없이 나타났다.

첫 번째 그림부터 시작해서 열한 번째 그림에 이르기까지, 같은 그림이 똑같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파괴와 수복을 되풀이해온 세계를 표현하는 듯했다.

몇 시간을 더 걸었을까.

한동안 같은 그림들만 반복해서 나타나던 복도에 새로운 그림이 나타났다.

흉측하게 웃는 레베카와 그 앞에 주저앉아있는 야탄을 숨어서 지켜보는 적색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적색.

베리아체를 상징하는 듯한 그 색은 다음 그림에서 홀로 야탄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다음 그림에서 벼랑 밑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적색의 크기는 여태까지보다 2배 이상 작았다. 하지만 다음 그림에서 증식했다.

적색이 여럿이 되었다.

‘적색은 역시 베리아체였군.’

벼랑 밑은 인계를 뜻하며, 작아진 크기는 대악마의 힘을 잃었음을 뜻하고, 증식은 자식을 낳았음을 표현하는 걸 테지.

드디어 복도의 끝이 보인다.

새롭게 밝혀진 2개의 횃불이 다른 장소로 통하는 입구를 비췄다.

철컥.

메르세데스가 방패를 고쳐 쥐며 앞장섰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마리로즈.

주군께서 혈왕이 되신 여파일까, 그녀 또한 다른 뱀파이어처럼 주군께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

언제라도 은익을 펼칠 수 있게끔 대비하며 성의 내부에 입장한 메르세데스가 돌처럼 굳었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친다 싶더니 붉은 파도가 밀려온 까닭이다.

콰르르르르르륵!!

“윽...!”

피의 격류가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짓누른다.

은익을 펼쳐보지만 압력을 감당하기 힘들다.

뒷걸음치다가 급기야 다시 복도까지 밀려난 그녀를 향해 어둠 속 누군가가 말했다.

“네게는 자격이 없으니 물러나렴.”

마리로즈의 목소리였다.

“내 침실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혈왕뿐이거든.”

목소리에 떨림이 있다.

누가 봐도 흥분한 눈치다.

불쾌감을 느낀 메르세데스의 고운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에겐 마리로즈를 제지할 자격도, 힘도 없었다.

콰르륵!!

메르세데스를 밀쳐낸 후 지면을 적시고 있던 혈류가 진동하더니 이어서 솟구쳤다.

거대한 손의 형상을 갖춘 그것은,

덥썩!

“전하!”

그리드의 허리를 거침없이 감싸 쥐었고,

“후훗, 어서와.”

마리로즈가 있는 방 안으로 포획....

“...어, 어라?”

늘 느긋하고 여유롭던 마리로즈의 음성에 당혹이 서린다.

그리드를 감싸 쥔 피의 손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

세상의 모든 피를 태어나서부터 당연하게 지배해왔던 마리로즈 입장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사고가 정지됐다.

[<베리아체의 내의>에 귀속된 스킬 <블러드 마스터>의 효과로 혈마법을 차단합니다.]

한편 그리드는 자신의 맨살을 감싸고 있는 속옷의 감촉을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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