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21화
일반적인 게임은, 하나의 세력이 득세할 경우 이를 견제할 반대 세력이 생긴다. 단일 세력으로 견제가 힘들면 연합을 꾸려서라도 대립한다.
벌써 수년 째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템빨국은 길고 긴 게임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인 셈이다.
템빨국과 대립하는 거대 연합이 생기지 않는 이유?
당연히, 템빨국이 압도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큰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
라우엘이 철저히 관리해온 템빨국은 사람들의 반감을 살만한 행위를 저지른 경우가 드물다. 각종 시스템을 활용해서 도리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한 이익을 창출해왔지, 소위 말하는 갑질이나 적폐짓을 일삼지 않았다.
게다가 그리드의 영웅적인 활약들이 템빨국의 대외 이미지를 너무 좋게 만든 것도 크게 한몫했다.
며칠 전 로드의 성인식을 보라.
여러 귀빈들의 안전을 이유로 템빨국은 성인식을 소규모로, 비공개로 진행했다. 외부인이 행사장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궁전의 출입문을 모조리 봉쇄하고 바리게이트를 쳤다.
하지만 사람들의 축하행렬은 끊이질 않았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라인하르트의 거리를 가득 채우고 그리드와 로드의 이름을 연호했다.
심지어 국가대항전 기간과 겹쳤는데도 말이다.
다른 세력들은 템빨국과 굳이 적대할 명분도, 용기도 없었다.
“천년을 갈 국가인가.”
라인하르트의 풍경을 느긋이 감상하던 파울드가 중얼거렸다.
수백 년 전, 자신이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
부흥기의 제국을 보고 느꼈던 여러 감상들을 그는 이곳 라인하르트에서 다시 느끼고 있었다.
“두꺼비가 몇 번인가 말했던 ‘건방진 놈’이 이곳의 주인이라지? 네놈도 꽤 골치 아프겠군.”
네 힘만으로 인계를 죽음으로 지배하기엔 이 왕국이 너무 강하다. 이 왕국이 네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라는 뒷말은 삼키는 파울드였다.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아그너스는 알고 있을 테니까.
짧아진 머리카락에 적응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넘긴 아그너스가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여차할 땐 바알이 나서주지 않겠나.”
“하긴....”
아그너스의 권속이 된 이후, 파울드는 벌써 수차례 지옥을 방문해서 바알과 대면했다.
그러므로 쉽게 납득하는 파울드였지만 정작 말을 꺼낸 아그너스는 바알이 미덥지 못했다.
‘바알이 나서봤자 의미 없겠지만.’
모든 악마는 인계에서 약해진다. 대악마도 예외가 아니다.
최소 3배, 4배는 약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바알은 훨씬 더 큰 페널티를 받았다.
놈의 육신은 인계에 강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의식의 편린을 ‘잘게 쪼개’고 그 쪼갠 편린을 바알의 계약자에게 이식해야 간신히 인계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32위 대악마 벨리알보단 강했지만, 고작 그 정도 수준으로는 ‘지금의 인계’에서 아무런 활약도 못한다.
‘뭐... 덕분에 내가 온갖 혜택을 누리는 거겠지.’
당대 바알의 계약자는 인계에 약한 바알을 대신해서 인계 정복을 실천하는 대행자다. 바알은 아그너스가 강해질 수 있게끔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하지만....
‘하지만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갑자기 인계에 흥미를 잃고 다른 일을 강요할 수도 있다. 그게 바알의 성격이다.
‘...애초에 바알의 목적은 뭘까.’
표면적으로 보이는 바알의 행동 원리는 욕구의 충족.
순전히 자신의 오락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다일까?
명색이 최종 보스급의 존재라면 숨겨진 속내쯤 있어야 그럴듯하지 않나?
아그너스가 최근 품기 시작한 의문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개골. 묘지를 찾았다.”
아그너스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오른 개구리.
바알의 권속이며 아그너스의 감시역인 체파르데아가 자랑스레 보고했다.
“수고했다.”
조금 떨어진 꽃 위에 앉은 잠자리를 뼈 가시로 꿰뚫고, 끌어온 아그너스가 체파르데아에게 던져줬다.
긴 혀를 뻗어 그것을 받아먹은 체파르데아가 좋다고 쩝쩝거리다가 버럭 성을 냈다.
“개골! 개구리 취급하지 마라! 개골!!”
“여긴가.”
체파르데아의 시끄러운 성격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적응했다.
떠들어대는 녀석을 무시하고 이동한 아그너스가 한적한 묘지 앞에 섰다.
묘지 안에 잠들어있는 시신이 느껴진다.
네크로맨서만 읽을 수 있는 ‘망자의 기척’이라는 것이다.
바알의 계약자인 아그너스에겐 한술 더 떠서 망자의 생전 모습과 특징 일부가 머릿속에 자연히 떠올랐다. <캐릭터 관찰>의 일종이었다.
“뒤집어쓰기.”
콰르르륵!!
망자의 존엄이 짓밟힌다.
망자의 가족이 정성들여 가꾼 묘지가 처참하게 파헤쳐졌고 썩은 시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아그너스의 육신에 덧씌워졌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스킬 <뒤집어쓰기>의 효과로 생김새와 능력치가 변동됩니다. 2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임의로 해제할 수 있습니다.]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바알의 계약자>의 전용 스킬을 제외한 모든 스킬의 사용이 봉인됩니다.]
“킁킁.”
악취가 사라졌다.
이번 모습은 머리 길이도 제법 마음에 든다.
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그너스에게 체파르데아가 핀잔을 주었다.
“하다하다 이번엔 농노냐? 개골! 바알의 계약자쯤 되면 최소 영웅의 시체를 뒤집어써야 면이 사는 것을! 한심하다! 개골!”
“농노?”
아그너스가 연못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확실히, 누가 봐도 농노의 행색이었다. 심지어 늙었다.
문제는....
‘병사 출신인 줄 알았다만.’
스탯이 높다.
뒤집어쓰기의 효과는 대상의 ‘죽기 전 모습과 능력치’를 뒤집어쓰는 것인데 고작 늙은 농노의 능력치로 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스탯이 높다. 특히 근력과 체력이 정예병사급. 기사 바로 아래의 수준이다.
의아해하던 아그너스의 눈가가 문득 휘었다.
‘아아, 이게 바로 템빨국의 농부라는 건가.’
스윽.
아그너스가 도시의 전경을 시야에 담았다.
곳곳에 설치된 병영에서 훈련 중인 병사들, 마탑에서 실험 중인 마법사들, 아카데미에서 교육 받는 학생들과 거리를 지키는 기사들, 심부마다 자리 잡고 있는 괴물들....
그들에게만 집중됐던 아그너스의 의식이 외성문 바깥의 논밭까지 뻗어나간다.
아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수천 명의 농노들이 이제는 군세로 와 닿았다.
그리드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군세.
‘대단하구나, 그리드.’
내가 이성을 잃은 짐승으로 지내온 몇 년 동안 너는 여기까지 일구어냈는가....
감탄하는 아그너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의 병사들을 죽여서 자신의 병사로 삼는 순간 탄생할 최강의 군대를 떠올려본 것이다.
인류의 등불이 여기까지 성장한 이상, 인류와 대적하게 될 자신의 힘도 그에 비례해서 강해지리라.
콰작!
묘한 희열에 휩싸인 아그너스가 자신의 왼팔을 뜯어냈다.
***
세공사 엘리자베스.
템빨단원들의 액세서리 제작 의뢰를 전담하며 성장해온 그녀는 이제 어엿한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 대륙 최고의 세공사를 논할 때면 반드시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은 늘 새로운 손님들과 퀘스트를 불러 모았고,
“미안하지만 당분간 손님 안 받아요. 예약도 안 돼요.”
공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엘리자베스는 손님을 더 이상 늘리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장인급 세공사가 되어 간단한 아티펙트의 제작이 가능해진 시점부터는 더욱 더.
“내쫓기 전에 이 설계 도면부터 봐주시겠습니까?”
“....?”
당돌하게 말하며 설계도를 건네는 소년.
템빨단에 있으면 자주 마주치게 되는 뱀파이어처럼 흰 피부를 지닌 그에게 시선을 돌린 엘리자베스가 히죽 웃었다.
“왜? 그 설계도가 있으면 이 누나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니?”
“아마도요.”
“헤에, 그래?”
이런 유형의 손님은 의외로 많다.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서 대화의 물꼬를 틀고 의뢰를 맡기기 위한 수작이다.
어린 녀석이 발랑 까져서는...
‘저 노인네가 시킨 거겠지.’
가라앉은 시선으로 소년의 일행을 힐끔 쳐다본 엘리자베스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봐. 대신 별거 없으면 그대로 바이바이야.”
끽해야 예쁜 귀걸이, 목걸이나 만들어 달라는 것일 테다.
어머니께 드리고 싶은 선물쯤 되려나.
‘마음은 기특하다만, 엄마 선물 정도는 거리에 즐비한 다른 세공사를 찾아가서 의뢰하란 말이야.’
흥, 사람을 대체 뭐로 알고.
“....?”
웨이브 진 금발을 귀 뒤로 넘기며 설계도를 펼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복잡하지만 정교한 수치와 기하학적 형상들.
설계도를 빼곡하게 채운 수식과 형태는 장인급 세공기술 레벨이 3에 도달한 엘리자베스의 한계를 극한까지 쥐어짜게 만드는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뭐, 뭐야? 이 부품들은? 마장기의 기관이라도 조립할 작정이야?”
물론 과장 섞인 질문이다.
설계도가 그리는 부품들은 그런 과장을 보태게 만들 정도로 섬세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요. 의수(義手)를 만들 부품들이 필요할 뿐이에요.”
“끄응.... 태엽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서 조립한다는 건 마나로 순환시킬 작정이라는 건데....”
“네, 할아버지에게 진짜 손처럼 움직이는 팔을 선물해드리고 싶어서요.”
소년이 함께 온 일행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나이든 농노였다.
공교롭게도 한쪽 팔이 없었다.
“장인님의 실력으로도 이 부품들을 만드는 건 힘들까요?”
“쉽지는 않지.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작업대 위에 잔뜩 깔아놓았던 보석들과 공구들을 구석으로 치웠다. 한 달 전부터 예약했던 단골손님의 의뢰물품이었지만 지금 와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할 수 있어.”
이 소년의 의뢰를 완수하는 순간 기술 레벨이 오를 것이다.
그렇게 확신한 엘리자베스가 의욕을 보였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기연을 놓치고 싶을 리 만무했다.
***
어둠엔 위험이 도사리는 법이다.
여태껏 수많은 뱀파이어의 도시를 공략해온 그리드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 도사린 사역마들이 침입자를 습격하고, 궁지로 모아 관 속에 잠들어있는 뱀파이어들의 곁으로 인도하리라.
“아무 것도 없네요.”
“...그러게.”
마리로즈의 사역마들과 뱀파이어들은 얼마나 강할까.
아무리 그래도 한 자릿수 지옥의 마물들보다 강한 건 아니겠지?
잔뜩 긴장한 채 근심하던 그리드가 맥 빠진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리로즈가 기거하는 도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준 높은 사역마들과 뱀파이어들이 은신을 구사해서가 아니다.
그냥 아무 것도 없었다.
초월자의 감각과 메르세데스의 혜안이 재차 확인시켜줬다.
‘폐허조차 없군.’
여태껏 방문했던 뱀파이어의 도시들은 말 그대로 도시였다.
온갖 형태의 건축물이 즐비해 있었고 건축물마다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개의 관들이 비치돼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존재하는 것은 어둠뿐.
무(無)의 공간이다.
“아.”
얼마나 걸었을까.
무뎌진 감각으로 하염없이 걷던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도시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보게 된 무언가였다.
“저건... 성이군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되는 어둠이 방향감각과 거리감각을 집어삼킨 상태다.
그리드와 메르세데스가 아니었다면 진즉 미아가 됐을 것이다. 심지어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겠지.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초월자의 감각이, 메르세데스에겐 혜안이 있다.
두 사람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를 분명하게 목격했고, 그것이 어떤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다.
걸음에 박차를 가한 두 사람은 수십 분을 걸은 끝에 드디어 높은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의 성을 발견하였습니다.]
[최초 발견 보상으로 일주일 동안 경험치 획득량과 아이템 획득 확률이 상승합니다.]
화르륵!
환영해주는 걸까.
성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뻗어나가는 성벽 곳곳에서 횃불이 밝혀진다.
족히 수천 개의 횃불이었다.
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숫자였다.
끼이익━ 쿵!!
성문이 열렸다.
당연히 내성문까지 이동해야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복도가 펼쳐진다.
‘외성문에서 바로 내부?’
적의 침입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구조.
감히 누구도 이곳을 범접하지 못할 거라는 만용이 빚어낸 결과물인가?
마리로즈가 어떤 존재인지 재차 실감한 그리드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키며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가 눈치 챘다.
벽에 걸린 그림들이 신화와 전설을 담고 있으며, 상상의 산물이 아닌 목격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첫 번째 그림을 홀로 장식하는 인물은 아마도 악신 야탄이었다.
온통 검게 칠해진 존재.
허공에 뜬 채 일렁이는 어둠을 관처럼 머리 위에 둔 그는 두 번째 그림에서 세 명의 악마를 곁에 두었다.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작은 여성체는 붉은 색감으로 칠해진 것을 보아 시조 베리아체 같았다. 팔짱이라도 낄 기세로 야탄의 바로 곁에 붙어있었다.
고개를 조아린 채 야탄의 뒤에 시립한 악마는 녹색 색감으로 표현되었는데 누군지 유추하기 힘들었다.
마지막 악마는 거인이었다.
홀로 일행과 거리를 두고 떨어진 놈은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검게, 붉게, 희게 칠한 것으로 보아 바알이 분명했다.
‘여기까지가 태초의 지옥.’
그럼 다음은?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세 번째 그림을 보고 싶어서였다.
“...!”
세 번째 그림 앞에 멈춰선 그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흑색, 적색, 녹색, 그리고 거인.
야탄과 악마들을 색과 특징으로 표현했던 앞선 그림들과 달리 세 번째 그림은 사진처럼 정교하게 그려진 초상화였다.
빛의 여신 레베카.
그리드에게도 익숙한 그녀의 얼굴이 액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깔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리드를 바라본다.
마치 악마다.
미상의 작가는 레베카야말로 악마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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